2024년 4월 29일(월)

12가지 핵심과제 ⑦ 기부·나눔 문화_미국자선기부협회 린지 라폴 회장 인터뷰 “이젠 기부도 계획성 있게 지속적 나눔 문화 이어나가야”

미국 고액 기부자들… 3代 모여 유산 기부 논의, 소비습관 나쁜 자녀보다 자선단체 기부 선호해… 법·제도 정비하고, 투명성·전문성 갖춘 자선단체 늘어나야

미국의 계획기부 모델을 연구하고 관련 제도 개선을 주도하는 미국자선기부협회(ACGA)의 린지 라폴(Lindsay L. Lpole) 회장.
미국의 계획기부 모델을 연구하고 관련 제도 개선을 주도하는 미국자선기부협회(ACGA)의 린지 라폴(Lindsay L. Lpole) 회장.

40년 전, 미국 기부문화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충동적으로, 일회적으로 기부하는 게 아니라, 기부자들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법으로 기부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이는지 지속적인 모니터링이 가능하고, 기부 성과를 측정할 수도 있다. 기부한 자선단체로부터 죽기 전까지 연금을 타서 생활비에 보태기도 한다. 은행에서는 나만의 맞춤형 기부 설계가 이뤄지고, 실시간으로 기부액에 따른 세금 혜택을 공지 받는다. ‘계획 기부(Planned Giving)’의 도입은 미국의 개인 기부를 95%까지 끌어올렸고(기업 기부는 5%), 이는 대공황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도 감소하지 않은 채 성장을 계속했다. 1994년 설립 때부터 미국자선기부협회(ACGA)에서 미국의 계획 기부 모델을 전파하고 있는 린지 라폴(Lindsay L. Lapole) 회장을 지난 6월 13일 인터뷰 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계획 기부란 단어가 낯설다. 계획 기부란 무엇인가.

“지금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어 눈앞의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할 경우, 이는 계획 기부가 아니다. 계획 기부를 하려면 자신의 재산 상태를 살펴본 뒤, 평소 관심을 가지던 자선단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세제 혜택을 꼼꼼하게 따지는 등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자선단체는 기부자의 소득 수준을 고려해 정기적으로, 효율적으로 기부할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한다. 계획 기부란 기부자와 수혜자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전략적이고 신중한 나눔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미국의 고액 기부자들은 어떤 식으로 계획 기부를 하는가.

“미국인들은 기부하기 전, 자신의 수입과 재정 계획, 가족의 요구 사항, 분배 방식 등 다양한 요소를 먼저 검토한다. 고액 자산가들 또한 기부를 결정하기 전 최소 3세대가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재정 상황은 어떻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다. 이때 특히 고려되는 사항이 자녀의 소비 습관이다. 미국의 고액 자산가들은 자녀가 모든 돈을 관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자녀가 유산을 마음대로 낭비할 바에, 자선단체에 기부해 의미 있는 일에 쓰이길 바란다. 고액 자산가들의 기부 유형을 보면, 유산 기부가 80%나 된다. 사후에 원하는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개인재단을 만들거나, 기부자 조언기금(기부자가 자선단체의 펀드에 기부해 세제 혜택을 받고, 자신의 펀드 운영 및 배분을 조언할 수 있는 형태), 자선기부연금(개인이 현금이나 자산은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여생 동안 연금 형태로 일정 소득을 보장받는 형태) 등의 형식으로 기부하기도 한다.”

-계획 기부는 미국에서 보편적인가.

“미국에선 지난 10년간 계획 기부를 컨설팅하는 전문가층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개인 기부자도 늘어나고, 자선단체의 전문성도 쌓이고, 자산 계획과 모금 기술을 결합한 기부 컨설팅 시장도 열렸다.”

-미국의 개인 기부자들은 계획 기부에 얼마만큼 참여하고 있는가.

“계획 기부는 고액 자산가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5000달러를 기부하는 사람부터 420만달러를 기부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미국 계획기부위원회(NCPG)의 조사에 따르면, 2000년 한 해 동안 전체 미국인의 2%가 계획 기부 상품을 이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92년에 조사된 0.6%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수치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미국의 수십만개의 자선단체가 계획 기부 방법으로 모금하고 있는데,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나라의 고액 자산가들은 유산 기부나 개인 기부보다 기업 이름이나 회사의 주식을 기부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은 어떻게 개인 기부자의 계획 기부를 활성화할 수 있었나.

“기부 문화를 바꾸는 법과 제도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지난 1969년, 미국 의회는 개인 출연재단이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까다롭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개인 기부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재단 출연이 어려워지자, 자선 단체에 유산을 기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자선 단체는 개인 기부자들에게 보다 의미 있고 효과적인 맞춤형 기부 설계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1986년 기부를 제외한 다른 형태의 세금 공제 방법의 대부분을 철회되는 법안이 통과됐다. 이 때문에 세금 공제를 원하는 재무 설계자나 고액 자산가들에게 계획 기부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카네기나 빌 게이츠 등 유명 인사들의 기부도 계획 기부 확산을 일으켰다. 기부를 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던 고액 자산가들이 이후 대거 계획 기부에 동참했다. 유명 여배우 딕시 카터는 2009년 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여성들의 계획 기부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가정의 재정을 관리하고, 아내가 남편보다 약 6~8년간 장수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들의 계획기부가 중요해질 것이다.”

-한국에도 잠재적 기부자 수요는 증가하고 있지만,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하다. 계획 기부를 통해 한국에서도 개인 기부를 활성화하면 좋을 것 같은데, 조언 부탁드린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미국도 세제 개혁 이후 계획 기부 프로그램을 시범적으로 운영해보고, 차근차근 개인 기부자를 늘려 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선 단체가 계획 기부를 한 개인 기부자들에게 신뢰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국의 연방 정부, 주 정부는 계획 기부를 하는 자선 단체의 자격 요건을 엄격하게 정하고 있다. 자선 기부 협회는 이들로부터 연례 보고서를 받고, 이를 바탕으로 입법 활동을 한다. 한국도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자선 단체의 투명성, 전문성을 높이면 계획 기부를 통해 개인 기부 문화가 점차 확산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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