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12가지 핵심과제] ⑩ 의료… ‘협력’으로 건강해지는 마을

하나로 뭉친 보건의료진… 지역사회 튼튼해진다
‘고혈압·당뇨병 등록관리’ 보건소와 1차 병원 손잡아
예방·교육·진료 통합… 3차병원 이용 줄어들어
각계 의료진 정기모임해 정보 네트워크 구성하고 음악회 등 지역축제 마련
의료기관·주민이 소통해 신뢰 관계 형성해야…

미상_사진_의료_악수_2012일본 미야기현에 위치한 작은 마을 와쿠야쵸(通谷町)에는 주민 1만7000명이 모여 산다. 센다이시로부터 50㎞ 떨어진 시골이지만,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건강한 마을로 꼽힌다. 1년 동안 와쿠야쵸 주민 한 명이 사용하는 평균 의료비는 25만엔(357만원)으로 일본 지자체 35곳 중 셋째로 의료비 지출이 적다. 1인당 사용하는 국민보험료도 넷째로 낮다. 병원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와쿠야쵸 마을 중앙에는 일본 대도시 주민도 부러워할 만한 400병상 규모의 주민의료복지센터가 있다. 진료뿐만 아니라 건강관리, 영양 교육, 수술, 재활, 간병 등이 모두 한곳에서 이뤄진다. 방문간호·재활 서비스도 활발해, 인근 지자체 10곳이 도움을 받을 정도다. 충분한 진료 시간이 확보되고, ‘마을 주치의’로서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이 부여되기 때문에 이곳에 근무하는 보건의료인력·사회복지사들은 물론 환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1972년, 와쿠야쵸 마을엔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다스리지 못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노인들이 많았다. 젊은 층은 계속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 해 1월, 마을회관에 주민들이 빙 둘러앉았다. 몇 주에 걸친 토론 끝에 “보건의료와 복지가 결합된 지역 공동체 모델을 만들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1만명에 달하는 주민들이 센터 건립을 위해 자신의 땅을 선뜻 내놓았다. 이렇게 모인 땅이 3만평에 달했다.

건강추진위원회를 결성한 이들은 주민 1만명의 서명을 받아 와쿠야쵸 군수를 찾아갔고, 군수는 중앙 정부에 협력을 요청했다. 센터는 비티엘(BTL·민간이 자금을 투자해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면 정부가 운영기간 동안 이를 임차해 사용하고 임대료를 지급하는 방식) 방식으로 짓고, 부족한 운영비는 연금 재정과 정부 보조금으로 충당했다. 인근 지역 대학병원에서도 이 모델이 마을 안에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조사·연구를 하고, 인력 수급을 도왔다.

정부, 지자체, 의료기관, 대학, 주민이 모두 ‘협력’해서 이룬 모델인 만큼 센터 구조와 콘셉트도 그에 맞췄다. 중앙에 공원을 만들고, 보건소·병원·건강관리센터·재활센터를 그 주변에 빙 둘러 세웠다. 아동 공부방과 청소년문화센터 등 복지시설도 포함돼 있다. 주민은 아이를 공부방에 맡기고 건강관리센터에 들러 영양 교육을 받고, 저녁엔 동네 청년들이 준비한 공연을 감상한다. 잠시 쉬러 왔다가 보건소에 들러 평소 앓던 질환에 대한 설명도 듣는다. 특별히 약을 많이 먹거나 수술을 받지 않아도 와쿠야쵸 마을 주민은 건강했다. 아동부터 노인까지 세대가 통합되고, 환자와 건강한 이들 모두 이곳에서 하나가 됐다.

◇보건소와 1차 의료기관의 진정한 ‘협력’

국내에도 지역 내의 의료기관끼리 자발적으로 협력해 주민의 건강을 증진시킨 사례가 있다. 지난 4월 백명숙 부천시 원미보건소 계장은 내과·가정의학과·소아과 등 인근 1차 병원에 200통 넘는 전화를 돌렸다. 지역 의사회의 모임이 있으면 두꺼운 서류를 들고 당장 달려갔다. 지난 2007년부터 질병관리본부와 보건복지부가 지원하고 있는 ‘고혈압·당뇨병 등록관리사업(이하 고당사업)’의 시범지역으로 올해 부천시가 선정됐기 때문이다. 고당사업은 심뇌혈관질환자들이 지역 내 1차 의료기관을 이리저리 옮기더라도, 건강 상태를 통합 관리할 수 있도록 도입한 ‘등록시스템’이다. 고당사업에 등록한 65세 이상 환자들은 진료를 받을 때마다 매월 진료비 1500원과 약값 3000원을 할인받는다. 백계장은 지역주민의 건강을 위해 병원들에 동참을 권했고, 3개월 만에 부천시 진료기관 230곳 중 169개 병원(73.4%)이 참여 의사를 밝혔다.

고당사업은 지역사회 보건소와 1차 의료기관의 ‘자발적인 소통과 협력’에 기반한다. 1차 의료기관이 고혈압·당뇨 진단을 받은 환자를 등록하면 보건소는 등록환자에게 전화를 걸어 질병 관련 상담을 하고, 영양·질병예방 교육도 실시한다.

진료 날짜를 잊지 않도록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도 보건소 역할이다. 3차 병원처럼 문자 메시지 등 환자 관리 시스템이 부족한 1차 의료기관으로서는 보건소가 병원 진료를 안내해주니 좋고, 보건소는 환자의 심뇌혈관 질환을 조기에 예방할 수 있어 좋다. 실제로 고당사업을 3년간 진행했던 대구시의 경우 1차 의료기관 이용률이 4.3% 증가했고, 등록환자의 35%가 꾸준히 약을 복용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3차병원 이용률도 2.5% 하락해 환자들의 ‘무분별한 대형 병원 행보’가 줄어들었다.

◇주민의 건강 위해 하나 된 의사들

안산시 의사회는 작년 1월부터 노인정, 교회, 공사장 등을 찾아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건강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교안은 직접 의사들이 만든다. 지난해 진행한 건강 교육만 벌써 50차례가 넘는다. 한 번에 200여명이 넘는 인원이 몰려들어 당황할 때도 많지만, 이천환 안산시의사회 회장은 “병원 밖에서 계속 주민들과 만나니 진료 볼 때는 몰랐던 환자들의 건강 상태를 알게 된다”고 설명한다. 지난 6월 28일엔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건강음악회’도 열었다. 안산 상록수보건소가 주민에게 공연을 홍보·모집하고, 안산의사회는 공연 직전 만성질환 관리에 대해 교육을 진행했다. 적극적으로 시민과 접촉하고 도움을 주려는 의사회의 모습에, 이들을 바라보는 주민의 눈빛에 신뢰감이 생겨났다.

안산시는 의사회·약사회·간호사회·한의사회·치과의사회와 보건소, 국민건강보험공단 안산지사까지 총 8곳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 모임을 갖는다. 지역 주민의 건강 상태나 질병 정보를 공유하고, ‘건강음악회’처럼 축제나 행사를 기획할 때 십시일반으로 준비한다. 이들의 끈끈한 협력은 안산 주민의 건강으로 이어졌다. 4년 전, 신종플루가 유행해 대부분의 지역이 손을 쓰지 못하고 있을 때 이들은 정기모임을 통해 신종플루 예후를 미리 예측, 공유하고 빨리 대처할 수 있었다. 유승흠 한국의료재단 이사장은 “1차 의료기관들이 주민과 자주 접촉하고 건강 증진을 위해 협력하면 주치의제도를 뛰어넘는 의사-환자 간 신뢰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기업 CSR, 자원봉사 연결하는 의료협력 모델도 가능

박윤형 순천향대학교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지역사회 내의 자원봉사자와 사회 공헌 사업을 하는 기업을 참여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면서 “몇몇 보험회사에서는 상담원이 독거노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와 건강 상태를 체크하는 사회 공헌 프로그램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상담 인력이 부족한 보건소와 협력하면 또 하나의 좋은 모범 사례가 나올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종구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는 “의사들이 ‘마을주치의’처럼 지역 공동체 일원이 될 때 비로소 진정한 1차 의료가 시작된다”면서 “일본의 와쿠야쵸 사례처럼 지역 주민이 주인공이 되어 지자체·병원·정부·대학이 함께 협력하는 모델이 국내에도 탄생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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