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느린학습자들이 가꾸는 도심형 스마트팜 ‘올치’

지하철역에서 채소 키워 판매·유통
느린학습자 9명 교대 근무로 운영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7월 마지막 날. 부산 거제해맞이역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스마트팜 ‘올치(Allchee)’에서는 다 자란 채소들이 푸른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느린학습자인 허모(25)씨는 2m 높이의 수경재배 스마트팜에서 채소를 정성스레 수확하고 있었다. 그는 “싱그러운 채소를 수확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며 웃었다.

허씨는 이곳에서 5개월째 스마트팜 시설을 관리하고, 채소를 수확하고 있다. 채소 포장과 판매, 배송도 모두 허씨의 업무다. 채소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스마트팜 옆에 마련된 매장에서 팔기도 한다. 허씨의 꿈은 언젠가 스마트팜을 직접 만들어 사람들에게 수경재배 기술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이곳에서 다양한 업무 기술을 잘 배워서 나중에 저만의 수경재배 스마트팜을 차리고 싶어요”

느린학습자 허모씨가 부산 거제해맞이역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스마트팜 ‘올치(Allchee)’에서 상추를 가꾸고 있다. /부산=박근영 청년기자
느린학습자 허모씨가 부산 거제해맞이역 지하철 역사에 설치된 스마트팜 ‘올치(Allchee)’에서 상추를 가꾸고 있다. /부산=박근영 청년기자

스마트팜 운영은 협동조합 ‘매일매일즐거워’가 맡고 있다. 이곳 외에도 매일매일즐거워가 관리하는 스마트팜은 총 10곳.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느린학습자 총 9명이 하루 3~4시간씩 교대로 일한다. 매일매일즐거워는 2014년 자폐성 발달장애 아동을 둔 부모들이 ‘자폐성 장애인과 느린학습자들에게 즐거운 매일매일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을 모아 설립한 단체다. 처음에는 물놀이 등 즐거운 놀이를 하는 공동체였지만, 차츰 느린학습자들을 위해 맞춤형 교육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으로 발전했다. 2019년에는 느린학습자 아동·청소년이 사회에 진출할 나이가 됐을 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기 위해 느린학습자 청년들이 관리하는 스마트팜 운영을 시작했다.

“느린학습자를 위한 경제적 자립 모델을 고민하던 중, 부산 연제구에서 스마트팜 지원 사업을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부산 화신사이버대학교 주차장에 컨테이너 2개 동을 설치하고, 느린학습자 청년들을 고용해 버섯을 키우면서 스마트팜 운영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민재은 매일매일즐거워 국장(45)이 말했다. 매일매일즐거워는 이후 스마트팜을 시공하고 설치하는 기술을 익혀 부산금융센터역, 고신대학교 등에 총 10개의 스마트팜을 설치했다.

도심형 스마트팜 ‘올치’에서 키우고 있는 채소들. /부산=박근영 청년기자
도심형 스마트팜 ‘올치’에서 키우고 있는 채소들. /부산=박근영 청년기자

느린학습자들이 매일매일즐거워에 입사하면 택배 포장, 샐러드·샌드위치 배송, 매장 운영, 스마트팜 운영, 영업 등 직무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매장을 찾아온 손님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는 법, 아이스박스에 정기배송할 농산물을 넣어서 우체국을 통해 발송하는 법, 손님이 주문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만들고 서빙하는 법, 매장 내 위생 관리 방법, 스마트팜 농장에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법, 제품과 매장을 홍보하는 법 등 자세한 직무 교육이 진행된다. 매일매일즐거워에서 일하는 느린학습자들은 업무를 하다가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고, 새로운 꿈을 찾기도 한다. 허성규씨처럼 ‘언젠가 나만의 사업을 해보겠다’는 직원도 많다. 민 국장은 “느린학습자의 눈높이에 맞는 적절한 직무 교육만 이뤄진다면, 느린학습자들도 충분히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몫을 해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매일매일즐거워’의 목표는 느린학습자 청년 고용을 늘리는 것이다.

느린학습자 청년들은 부산 지하철 등 도심 교통망을 이용해 부산은 물론, 김해와 울산까지 직접 배송을 한다. 민 국장은 이런 배송 방식이 국내 대규모 농장이나, 해외에서 농산물을 가져오는 방식에 비해 탄소를 덜 발생한다고 강조했다.

“코스트코 같은 대형 유통업체는 과일이나 채소를 수천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가지고 옵니다. 이 과정에서 트럭이나 선박은 탄소를 배출하죠. 농산물에는 장시간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농약을 뿌립니다. 철도역사 내 스마트팜에서 재배한 채소를 철도를 이용해 배송하면 탄소배출량이 훨씬 적어요. 소비자는 가까운 지역에서 생산된 신선한 채소를 먹을 수 있고요.”

스마트팜이 안정적으로 운영되면서 김해 경전철, 대구 지하철 등에서 ‘스마트팜을 설치해달라’는 문의도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 협업을 제안하는 공공기관이나 기업도 늘어나는 추세다. 느린학습자를 고용해 매일매일즐거워가 운영하는 사업장에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한다. 민 국장은 “다른 지하철역이나 기차역에 스마트팜을 더 설치하고 농산물 판로를 확대되면, 느린학습자 청년들에 대한 고용도 자연히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느린학습자들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매일매일즐거워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동시에 지구 환경도 살리고요. 이런 여정에 더 많은 분이 동참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산=박근영 청년기자(청세담14기)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