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아산미래포럼 기획 시리즈] ④ 보육원 나온 아이들 홀로 서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아산미래포럼 기획 시리즈] ④ 가정 외 보호 청소년
시설에 10년 이상 머문 아동… 보호·의존에 익숙해져 현실감각·해결능력 결여
성인 돼 퇴소 하자마자 퇴소정착금 순식간 다 쓰고 하층민으로 전락하기 일쑤
계획 없이 대학 진학했다가 학업 놓치고 장학금도 끊겨
“정착금, 자립용으로만 쓰고 3년간 사회 적응기 갖는 등 보호·관리 프로그램 필요”

정승진(23·서울 관악구)씨는 20세가 되던 해 1월 1일 보육원을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이었다. 14년 동안 단체생활을 하는 게 지긋지긋해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 자립정착지원금(양육시설이나 그룹홈에서 퇴소하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지자체별로 1인당 100만~500만원 상당을 지급)으로 받은 500만원 중 400만원은 누나와 함께 살 집의 보증금으로 보탰다. 신발 매장에서 일해 번 돈은 월세, 전기세, 생활비, 휴대전화료로 통장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 시작하는 사회생활에 유흥비로 쓰는 돈도 만만치 않았다. 저축은 그림의 떡이었다. 지인에게 사기도 당해 모은 후원금을 모조리 날렸다. 정씨는 “가족이 없는 이들은 대부분 지지 기반이 약해 조금만 잘해줘도 사람들을 잘 믿는 편”이라고 했다. 현재 그는 심기일전해 독산동 한 의류 공장에서 일하며 창업 준비를 하고 있다. 신혜령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 아동자립지원사업단장은 “퇴소 후 아동들은 모아놓은 돈을 그동안 자신을 보육원에 방치한 부모에게 줘 버리거나, 경제 관념이 부족해 본인의 생활 기반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받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 현실 감각·문제 해결 능력 떨어지기도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보육원 등 아동 양육 시설에 맡겨진 아동(18세 미만)은 2011년 1만5313명이다. 이와 비슷한 규모인 1만5486명은 대리 양육(조손 가정), 친인척 위탁, 일반 위탁 등의 형태로 보호받고 있다(보건복지부, 2011 가정위탁보호현황보고서). 3만명을 웃도는 아동이 ‘가정 외 보호’ 상태에 있는 셈이다. 한편 2010년에는 869명, 2011년에는 973명의 아동이 대학 진학, 취업 등으로 시설에서 퇴소했다. 시설 아동 중 매년 1000명가량이 사회로 나가고 있지만, 자립은 여전히 숙제다. 전문가들은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양육 시설에서 생활하면서 받는 것에 익숙해진 의존성, 수동성이 자립에 큰 걸림돌”이라고 입을 모은다.

양육 시설에서 생활할 때는 각종 지원 프로그램으로 생활에 큰 어려움을 못 느끼지만, 퇴소 후 하층민으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지난해 서울 금천구의 A보육원을 퇴소한 후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김미진(가명·21)씨는 “그전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 자원봉사자 등 우호적인 사람이 대부분이었지만, 막상 사회에 나가보니 적대적인 사람도 많다”면서 “자립 전에도 기업에서 주말마다 경제 교육을 해주기도 했지만 수많은 프로그램 중 하나라고 느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되더라”고 했다. 이어 “막상 시설을 나와보니 청소, 빨래, 하루 세 끼를 먹는 문제까지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았다”고 덧붙였다.

그래픽=송윤혜 기자
그래픽=송윤혜 기자

◇친구 따라가는 대학, 부적응자도 늘어난다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도 많다. 이진수(가명·22)씨는 2년 전 O대 공과대학에 기회균등전형으로 입학했다. ‘다들 가는 대학인데 나도 가야지’라는 생각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진학을 급히 결정한 이씨였다. 막상 수업을 들으니 따라가기 힘들었다. 공부엔 더욱 흥미를 잃었고,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불어나는 등록금을 감당할 수 없어 한 학기 만에 자퇴를 결심했다. 지난해 S대 유아교육학과에 입학한 한유정(가명·21)씨도 대학 입학 첫 학기에 적응을 못 해 F학점을 받으면서 장학재단에서 지원이 끊겼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 학업도 놓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시설 퇴소 아동의 20% 정도(2010년 227명, 2011년 245명)가 대학 진학을 결심하는 만큼 부적응을 위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보건복지부·아동자립지원단, 2011 시설퇴소아동 실태조사 및 분석). 김수현 돈보스꼬 자립생활관 자립지원전담 요원은 “등록금은 장학재단과 연계해서 해결할 수 있지만 생활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고 했다.

이응오 서울SOS어린이마을 자립지원팀장은 “고등학교 입학 시기부터 취업인지 진학인지 일찌감치 결정해 준비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이에 4년 전부터 서울SOS어린이마을은 ‘언어, 수리, 외국어 3과목 중에 2개가 5등급 안에 들어와야 장학재단에 추천서를 써준다’는 내부 지침을 마련해 공표하고 있다. 김광빈 동명아동복지센터 원장은 “전공 공부에 대한 의지가 부족하고 학업 능력이 떨어지는 데다 추후 등록금에 대한 압박까지 이어지면서 대학 중퇴자가 상당수 발생하고 있다”며 “대학 중퇴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얻을 수 있는 좋은 취직 기회도 놓치고, 보호 기간 연장 불가로 시설에서도 퇴소해야 해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자 자립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퇴소 후 2~3년, 홀로서기를 위한 보호 체계 필요해

아동 양육 시설 입소 기간은 퇴소까지 최소 10년에서 최대 18년 정도다. 이 기간에 투입되는 인건비, 양육비, 운영비 등을 계산하면 매년 1인당 약 1500만원에서 2000만원이 소요된다. 이응오 자립지원팀장은 “퇴소 후 2~3년을 잡아주지 못하면 약 20년 동안 공들여 양육한 것이 물거품이 된다”고 했다. 자산 관리, 인간관계 등 아이들이 직접 사회에 나가 부딪히면서 느끼는 현실적인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양육 시설 내에는 기업들이 사회공헌으로 진행하는 교육·체험 프로그램이 넘쳐나지만, 퇴소 후 아동을 위한 사후 모니터링은 물론 자립 지원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2011년부터 서울시에서는 아동 10인 이상 생활 시설에 자립 지원 전담요원 인력을 1명씩 배치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사회복지사들은 “시설 아동 수가 30명이든 70명이든 상관없이 1명이 자립 담당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퇴소 아동들에게 개개인의 통장으로 입금되는 퇴소 정착금 전달 방식도 문제로 꼽는다. 동명아동복지센터 김연희 사무국장은 “디딤씨앗통장(CDA)처럼 주거자금, 학자금 지원 등 자립을 위한 용도로만 제한해서 사용할 수 있는 방식이 더 바람직한 것 같다”고 조언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일반 가정의 아동도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성인기로 전환하는 데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르게 마련”이라면서 “상대적으로 지지 기반이 약한 가정 외 보호 아동들의 성공적인 자립을 위해서는 더 폭넓은 차원의 보호 체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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