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고액 자산가 겨냥, 기부 금융상품 잇따라

국내 기부 트렌드
원금에 이자까지 기부… 운용 수수료 지정기부 상품도
NGO 투명성 높이고 세제 개혁 뒷받침 돼야

세계적인 투자은행인 바클레이즈의 ‘세계 부자 보고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부자는 2007년 43만3000명이다. 2017년에는 105만3000명으로 증가하여 세계 12위의 부자대국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주거용 부동산을 제외한 모든 자산의 순가치가 미화 100만달러 이상인 개인을 ‘부자’라고 정의). 이와 함께 개인기부 참여율도 높아지고 있다. 2009년 세계기부지수가 81위에 머물렀던 한국은 1년 만에 57위로 뛰어올라, OECD 국가들 중 가장 빠른 기부증가 속도를 보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개인 기부가 늘어나는 지금, 기부 문화의 확산을 위해 보다 전략적인 ‘계획기부’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최근 국내에도 기부와 금융상품이 결합된 새로운 계획기부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삼성증권은 2010년 8월부터 금융권 최초로 사내에 기부 컨설턴트를 도입, 기부컨설팅을 시작했다. 기부를 원하는 고객이 담당 PB(Private Banker)에게 신청하면 기부 컨설턴트가 1대1 상담을 통해 재단 설립이나 비영리 공익단체 기부를 자문해준다. 차선주 신문화팀 과장은 “증권사의 자산관리시스템 안에 기부컨설팅 서비스를 앉혀놓아 고객과 1차 면담을 하는 PB들이 내용을 소개한다”며 “월 2~3회씩 컨설팅 의뢰가 들어오는데, 아직까지 국내 고액자산가들은 대부분 재단 설립을 원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하지만 컨설팅을 받는 중간에 재단 설립을 포기하는 고액기부자도 많다. 차선주 과장은 “재단법인을 만들려면 주무관청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서류작업과 허가받는 과정이 까다롭다”며 “설립한 후에도 1년에 두 번 주무관청에 사업계획과 결과를 보고해야 하고, 세무 확인과 국세청 공시를 해야 하는 등 운영절차도 복잡해 자산가들 상당수가 ‘착한 일 하는 게 쉽지 않다’며 깜짝 놀란다”고 말했다. 삼성증권은 34개 비영리기관과 협약을 맺고, 고액 자산가들이 원하는 곳에 맞춤형 기부를 권유하기도 한다. 기본재산이 묶인 채 이자수익 등으로 운영되는 재단에 비해 기부금액이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자산가는 비영리기관의 투명성을 문제 삼아 기부를 꺼린다고 한다.

미상_사진_기부나눔문화_손에든하트저금통_2012◇재단 외에 대안은 없나

기부의 역사가 깊은 미국은 기부를 전제로 운용되는 금융상품이 다양하지만, 그동안 국내의 고액 기부자들의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다. 재단을 설립하거나, 맞춤형 기부를 하는 방법이었다. 오준석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미국에선 노인이 현금이나 자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남은 여생 동안 일정 소득을 보장받은 후, 죽은 후 자산은 자선단체에 귀속되도록 하는 ‘기부연금’도 있다”며 “과거에는 한 맺힌 기부 형태의 단발성 기부가 많았는데, 이런 단발성 기부는 저소득층이 사회 주목을 받기 위해 자꾸 비참하게 보이도록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딜레마’에 빠지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진국에서는 전략적이고 꾸준한 계획기부가 많이 도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6월 말 신한금융투자와 손을 잡고 국내 최초로 ‘기부자조언기금(Donor Advised Fund)’을 도입한다. 기부자가 공동모금회 이름으로 된 신한금융투자 계좌에 가입하면, 이 기금의 원금과 이자는 자신이 원하는 기부처에 기부된다. 기부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부처는 590개 정도다. 김효진 공동모금회 국민참여추진단장은 “고액 기부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기부처를 다양하게 고를 수 있고, 원금뿐 아니라 이자까지 더해져서 기부되기 때문에 기부금액도 더 커진다”고 말했다. 최초 가입금액은 1000만원 이상이다. 김 단장은 “신용카드 기부, 포인트 기부 등 다양한 방법에도 불구하고 고액 기부자들은 아직 무통장 입금을 선호하는 등 매우 보수적인데, 금융상품을 소개하니 어려워한다. 이를 적극 알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 기부자조언기금은 1931년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2010년 기준으로 약 16만2000개의 계좌가 있으며, 이 계좌에서 나오는 기부금액은 60억달러(6조원)가 넘고, 자선단체 기금의 21%가량을 차지한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로 유명한 영화배우 폴 뉴먼과 스누피의 만화로 유명한 만화가 슐츠 등은 따로 재단을 설립하지 않고 기부자조언기금을 통해 기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기부자조언기금·운용 수수료 기부하는 증권사 기부 마케팅도 등장

기부형 금융상품도 이미 출시됐다. 하나대투증권은 펀드나 주식계좌를 자사 계좌로 옮기거나 신규 가입하면, 수수료의 20~30%를 원하는 기부단체에 자동기부하는 기부금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서울대와 중앙대, 한양대 등 총 20개 학교, 대한적십자사, 문화예술위원회, 연세 세브란스병원, 스마일재단,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등과도 업무협약을 맺었다. 한 중견 상장회사는 정기예금과 펀드, 퇴직연금 등 1500억원의 금융자산을 하나대투증권으로 옮겨와, 이 수수료의 20-30%가 대한적십자사에 기부되기도 했다. 전병국 하나대투증권 청담금융센터 상무는 “기부자는 추가 지출 없이 단순히 금융상품에 옮겨오거나 신규 가입만 해도 후원이 가능하고 소득공제 혜택을 받는다”며 “개인뿐 아니라 법인 입장에서는 문화와 관련한 비영리기관 후원을 통해 문화 컨설팅 등을 받을 수도 있고, 학교나 비영리기관 입장에서는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기부금이 증가하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폐쇄된 기부 문화, 고액 자산가들 지갑 닫아

하지만 아직 국내엔 고액 자산가들의 계획 기부가 활발해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오준석 교수는 “우리나라는 기부한 이후를 위해 마련한 절차나 과정이 없다”면서 “고액 자산가들은 기부 이후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기부금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길 원하는데,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니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을 꺼리게 되고, 개인 기부도 늘지 않았던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부를 ‘계획적’으로 한다는 것 자체에 반감을 갖는 이들도 많다. 특히 자선기부연금(CGA)의 경우, ‘이미 준 돈을 다시 돌려받는 게 기부가 맞느냐’는 반응이 많기 때문이다. “‘세제혜택을 받기 위해서 기부한다’는 이야기를 들을까 봐 ‘계획기부’가 본격적으로 도입돼도 선뜻 기부를 하기 어려울 것 같다”며 ‘계획기부’를 망설이는 자산가들도 많다고 한다.

잠재적 기부자들의 수요는 늘고 있으나, 이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부족한 것도 문제다. 우리나라는 유산 기부를 해도, 수혜자에게는 기부금의 일부만 돌아간다. 민법상 상속인에게 최소한의 재산을 보장하는 유류분 제도 때문이다. 또한 4000여개의 비영리단체들이 직접 기부연금을 발행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비영리법인이 스스로 기부 관련 펀드를 운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문가들은 “‘계획기부’를 할 경우 현금 소득의 50%, 자산 소득의 30%까지 소득세를 공제하는 미국처럼, 우리나라도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한 세제 개혁도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란희 편집장

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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