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화)

경계에 서 있는 700만명의 사람들 [사각지대 해법 찾기①경계선 지능인]

수원 영아 사망사건, 청년 무연고 사망… 사회문제가 곪아 터진 후 이슈가 돼야 새로운 대책이 만들어지는 것은 여전합니다. 2024년 복지 예산 122조 3779억원. 매년 복지 예산은 늘어나지만, 정책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사각지대는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더나은미래’는 아동·청소년·청년·노인·장애인 등 사회복지 현장의 사각지대는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민간 차원의 해법과 성과를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사각지대 해법 찾기] 기사를 연재합니다. 첫 번째 대상은 ‘경계선 지능인(느린학습자)’입니다. /편집자 주

영유아기에는 타인의 언어 이해, 자기 생각과 감정 표현 혹은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보인다. 학령기에는 쉽게 지치고 산만해져 학교 적응에 힘들어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를 어려워한다. 청소년기에는 반복된 학업 실패로 학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성취가 기대에 못 미쳐 좌절한다. 청년기에는 취업과 근무에 어려움을 겪는다. 

모두 경계선 지능인의 이야기다. 경계선지능인이란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DSM)’ 제4판 기준 지능지수(IQ)가 71부터 84에 속하는 사람으로, 맞춤형 교육 등의 지원을 받으면 학습과 근무 등의 생활이 가능해 ‘느린학습자’라고도 불린다. 

아직은 느린학습자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7월 공개된 국회입법조사처의 ‘경계선 지능인 현황과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경계선 지능인은 지능지수(IQ) 정규분포도에 따라 전체 인구의 약 13.6%를 차지한다. 인구수로 환산하면 약 700만명에 이른다. 전문가들은 이들은 “지적장애도 비장애도 아닌 ‘경계선’에 속해있기 때문에, 사각지대에 놓여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경계선 지능인은 종종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들은 가해자의 말 한 마디나 행동이 순수한 호의인지 범죄인지 구별하는 것을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부산여성가족개발원의 홍미영 박사는 ‘경계성 지능장애 여성의 성폭력·성매매 피해 예방방안’ 연구에서 “자기 의사와 주장을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표현하며 타인의 말이나 지시에 순종하는 성향이 높아 성폭력과 성범죄의 강압적인 상황에서 피해에 그만큼 취약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경계선 지능의 친모가 아동학대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올해 1월 두 살배기 아들을 62시간 동안 혼자 방치해 숨지게 한 20대 친모 A씨가 2심에서 감형(징역 15년→11년)을 받은 것. 재판부는 항소심 판단에 대해 “A씨가 경계선 지능으로 성장 과정에서 부모에게 적절한 양육을 받지 못하고 교육도 받지 못해 사회적 판단력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계선 지능인을 위한 맞춤형 교육이 필요해”

현장에서는 문제의 근원을 “경계선 지능인을 위한 적절한 교육이 제때 진행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본다. 서울시 동북권 NPO 지원센터는 2019년도 ‘느린학습자 지원 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연구’에서 느린학습자 자녀를 둔 학부모 16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설문조사 결과, 성인 느린학습자에게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필요한 지원 프로그램은 맞춤직업훈련이라는 응답이 56명으로 가장 많았다.

같은 연구에서 초·중·고 교사 107명을 대상으로 필요한 정책을 물었을 때에는 ‘느린학습자 맞춤형 개별화 교육 지원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72명으로 가장 많았고, ‘느린학습자 전문 교사 양성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53명으로 뒤를 이었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맞춤형 교육’이었다.

송연숙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장은 “느린학습자도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사회 지원책이 부족해 그림자처럼 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어 “현장에서는 느린학습자의 특성을 이해하는 교육자를 찾기 어려워 사설 센터에 의존하고 있어 개인과 가정의 부담이 크다”고 지적했다.

교육 과정 쪼개고, 반복적 학습… 2배 이상 많은 수업시수 구성하기도

느린학습자 교육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달라야 할까.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느린학습자 특성에 대한 이해’를 꼽았다. 느린학습자는 주의 집중력이 짧고 배운 내용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며, 대화할 때 요점을 알아듣고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해 자신감이 낮아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느린학습자를 위한 프로그램에는 ‘반복’과 ‘격려’를 내재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느린학습자에게 중요한 것은 ‘반복 학습’이다. 경계선 지능인 교육지원센터인 이음발달지원센터는 치료교육을 실시하기 전에 진단평가를 거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일대일 맞춤형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음발달지원센터 김혜진 대표는 “학습 속도가 늦고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순서에 맞춰 진도를 나갔다고 해서 다 아는 게 아니다”라며 “배운 것을 적용해 학습하는 게 어렵기에 반복을 정말 많이 해야 하고, 아이들이 잘 알고 있는지, 이해했는지를 모니터링하고 확인하는 단계가 필수적”이라고 전했다.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센터에서 진행하는 바리스타 자격증(SCA) 취득 직무교육 현장의 모습.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센터

탁현정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이하 ‘밈센터’) 연구기획팀장도 ‘반복 학습’을 강조했다. 탁 팀장은 “교육 과정을 잘게 쪼개어 반복적으로 긴 기간 학습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계적으로 숙지할 수 있도록 반복했을 때 따라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밈센터에서 바리스타 자격증(SCA) 취득 직무교육을 진행하는 김지연 선생님은 “비장애인 대상 수업은 총 25시간으로 구성되지만, 느린학습자 대상 수업은 그 두 배인 50시간으로 구성한다”고 말했다. 이어 “비장애인 대상 수업의 최대 정원은 한 수업당 10명이지만, 느린학습자 수업의 경우 최대 6명까지로 제한해야 한다”고 전했다. 기간은 늘리고 정원은 줄여, 한 명 한 명에게 알맞은 속도로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느린학습자 전문 교육기관 느린아이연구소에서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직접 체험하고, 발표하고, 만들어보는 과정이 있는 교육을 진행한다. 느린학습자의 부모이자 상담가이기도 한 느린아이연구소 김동옥 대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지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느린학습자에게는 한결같이 처음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100번도 200번도 반복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격려’와 ‘칭찬’, 느린학습자 교육을 읽는 키워드

“몇 개월이 걸릴지언정 꾸준히 포기하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기간과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안 되는 경우는 없거든요. 느린학습자라도 조기에 개입해 맞춤형 교육을 받으면 학교생활 적응이 가능해요. 느린학습자는 이미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라 가뜩이나 자신감이 없기 때문에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가장 큰 보상임을 기억해야 해요.” (김동옥 느린아이연구소 대표)

격려와 칭찬 또한 ‘맞춤형’으로 이뤄져야 한다. 느린학습자는 어릴 때부터 눈높이에 맞는 교육을 받아온 게 아니기에, 자신감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바리스타 직무교육에서도 구체적인 칭찬과 긍정적인 피드백은 필수다. 김지연 선생님은 “학습 과정에서 뒤처지는 상황이 반복되다 보니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적고 자신감이 부족하다”며 “한 분씩 세심하게 지켜보며 잘한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칭찬과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수업을 진행하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이교봉 서울시 밈센터장은 “자아효능감과 성취감을 길러주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경쟁과 평가 없이, 서로 편안한 정서적 안정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고 전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 kyuriou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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