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Cover Story] 예술가에 빌려준 낡은 공장… 기업과 지역문화도 바꿨다

[Cover Story] 예술로 사회공헌하는 해외 기업들 노키아그룹 케이블 공장… 핀란드 예술가 보금자리로 문닫은 영국의 화력발전소… 세계 3대 현대 미술관인 테이트모던으로 재탄생… 獨 음악전문 출판사 ‘쇼트’… 문화예술 교육·도서 개발

새 정부가 국정 비전으로 ‘문화 융성’을 키워드로 제시하면서 문화예술 교육을 활용한 사회공헌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5월 조선일보 더나은미래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기업 사회공헌 관련 설문에서도 응답자의 절반가량이 ‘소외 계층에 대한 정서 지원’을 기대한다고 답했다. 문화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이에 더나은미래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으로 글로벌 기업들의 문화예술 사회공헌 현장을 취재했다. 편집자 주


  건물 안은 미로 같았다. 열 걸음만 떼어도 벽에 칠해진 색깔과 디자인이 확 바뀌었다. 대중문화 잡지가 전시된 벽 맞은편에 서양화가 그려져 있고, 반대편 계단에는 만화 캐릭터를 형상화한 ‘그래피티아트(Grafity art·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가 눈에 들어왔다. 각 공간에서 진행되는 교육 프로그램들도 다양했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를 가르치는 평생교육반을 지나자 재생 용지를 손에 든 아이들이 건축 수업을 듣고 있었다. 1만5000평에 달하는 5층 건물은 핀란드 주민들로 북적거렸다. 지난 10월 2일 핀란드 헬싱키의 복합문화센터 ‘카펠리(KAPELLI)’ 현장이다.

신진 예술가들이 전시된 1층 갤러리 모습.
신진 예술가들이 전시된 1층 갤러리 모습.

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카펠리(KAPELLI)는 약 1만5000평에 달하는 최대 규모의 건물로, 현재 문화예술복합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신진 예술가들이 전시된 1층 갤러리 모습.

◇민관 협력으로 살린 폐공간…핀란드의 문화예술 소통 창구 되다

카펠리는 노키아(Nokia)그룹이 운영하던 핀란드 최대 규모의 케이블 공장이었다. 1987년 휴대폰 제조업에 집중하기 위해 공장 이전을 준비하던 노키아는 핀란드 예술가들에게 건물을 개방했다. 당시 공간이 없어 활동하지 못하던 아티스트들에게 저렴한 비용으로 임대를 해준 것. 핀란드 각지에서 건축가, 사진작가, 화가, 음악가들이 몰려들었다. 갤러리·예술 교육·문화 축제 등이 활발해졌다. 그로부터 4년 뒤 노키아는 건물 임대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새 휴대폰 공장을 짓기 위해 부지를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 독특한 공간을 죽이느냐, 살리느냐. 기로에 서 있던 헬싱키시와 노키아는 결국 ‘모두를 살리는’ 전략을 택했다. 헬싱키시는 카펠리 건물을 기부받는 대신 노키아에 새로운 공장 부지를 제공했다. 그리고 비영리 부동산 회사가 카펠리 건물 임대업을 유지하도록 했다. 영리 기업들엔 1㎡당 월 임대료(전기료 포함)로 16유로(2만3000원)를, 예술가들에겐 9유로(1만3000원)를 받는다. 약 72억원에 달하는 카펠리 연간 매출액 중의 99%가 임대 수입이다. 카펠리에 입주한 총 250개 단체 중에서 50곳이 영리 기업에 해당한다. 카펠리 대외협력팀 애니(Anni) 매니저는 “영리 기업들이 건물에 함께 입주한 문화예술 단체들의 마케팅, 자산관리, 광고 컨설팅을 지원하고 있다”며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축제나 예술 교육 커리큘럼이 다양해지고 수익 구조도 탄탄해졌다”고 말했다. 최근 카펠리에 들어온 자산 관리회사 ‘헬싱키 캐피털파트너스(Helsinki Capital Partners)’ CEO인 토미 켐파이넨(Tommy Kemppainen) 대표는 “주로 유명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들의 자산 관리를 해왔는데, 최근 고액 자산가들과 아티스트를 연결하는 브리지(Bridge·다리) 역할까지 하고 있다”면서 “핀란드 문화 경영의 선진 모델이 카펠리를 중심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카펠리에 입주한 아티스트들은 건물 벽을 자유롭게 꾸미고, 다양한 이벤트에 활용하고 있다.
카펠리에 입주한 아티스트들은 건물 벽을 자유롭게 꾸미고, 다양한 이벤트에 활용하고 있다.
카펠리 외부 전경.
카펠리 외부 전경.

◇문화예술 교육으로 영국의 사회 변화 이끌어내다

기업 및 기업가들의 문화예술 사회공헌은 영국 사회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뉴욕 모마, 파리 퐁피두센터와 함께 세계 3대 현대 미술관으로 이름난 영국 런던의 테이트모던(Tate Modern). 런던 템스강변에 있는 건물 초입부터 99m 높이의 웅장한 굴뚝과 산업혁명 시대를 연상시키는 회갈색 벽돌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이 건물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런던 중심부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세워졌던 화력발전소(뱅크사이드 발전소)였다. 공해 문제로 1981년 문을 닫은 지 20년 된 이 건물이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된 것은 영국 정부와 테이트재단의 협업 덕분이었다. 영국의 자선 지원 재단인 카프(CAF)의 개인 고액 기부 담당 매니저인 벤 아이어씨는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앤드루 카네기를 비롯한 조지프 라운트리 등 유명 고액 기부자들이 자선 재단을 만드는 전통적인 기부 문화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부유한 사업가 헨리테이트(Henry Tate)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탕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산을 벌어들인 헨리테이트는 그동안 개인적으로 수집한 미술 작품들과 8만파운드(약 1억4000만원)를 영국 정부에 기증했다. 영국 정부와 테이트재단은 이 화력발전소를 현대미술관을 지을 장소로 낙점했다. 8년여의 공사 기간 끝에 외관은 최대한 손대지 않고, 내부만 미술관의 기능에 맞춰 리모델링했다. 굴뚝 또한 그대로 뒀고 반투명 패널을 사용해 밤이면 등대처럼 빛을 내도록 개조한 덕분에 이 굴뚝은 오늘날 연 470만명이 찾는 테이트모던의 상징이 됐다. 이뿐 아니라 테이트모던은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 주민과 소통하고 있다. 테이트모던 갤러리 입구에는 기업, 재단의 모금 캠페인에 동참해준 기부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3파운드를 기부하세요’라는 모금함을 설치해놓아 기부를 유도한다. 테이트모던은 인근 3개 공립학교 예술 프로그램을 직접 지원하고, 미술관에서 직접 운영하는 창작 스튜디오, 패밀리 갤러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운영한다. 1873년 영국에 진출한 독일 기업 도이치은행은 올해부터 11~18세를 대상으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 ‘본투비(Born to Be)’를 시작했다. 현재 영국에는 직업이 없거나 진로 교육을 받지 못한 청년들이 100만명에 달한다. 도이치은행은 이들의 취업 능력 향상을 위해 4년간 16만명의 아이에게 다양한 문화예술 기관들과 파트너십을 맺어 청소년 교육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디자인벤투라(Design Ventura) 프로젝트는 비즈니스 및 디자인 전문가들이 13~16세 학생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이끌어내고, 컨설팅한다. 아이들이 직접 제품을 디자인하고, 가격을 책정하고, 홍보를 통해 판매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재정 형편 때문에 운영이 어려운 런던 스포츠 클럽을 지원, 스포츠와 교육을 결합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영국 정부와 테이트재단의 협업으로 연 470만명이 찾는 현대미술의 상징, ‘테이트모던(Tate Modern)’.
영국 정부와 테이트재단의 협업으로 연 470만명이 찾는 현대미술의 상징, ‘테이트모던(Tate Modern)’.

◇기업 역량 살려 세대 통합 예술 교육 시작한 독일 기업 ‘쇼트(Schott)’

독일 기업 문화 후원을 측정하는 ‘AKS(Arbeits kreis Kultursponsoring team)’ 조사에 따르면 독일 기업들은 연간 약 3억5000만유로(약 4000억원)를 문화 인프라 및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1991년 조직 내에 문화 지원 부서를 조직해 100년 넘게 오케스트라·소극장 등을 설립, 지원하고 있는 독일 제약회사 바이엘(Bayer AG)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한편 독일 출판 기업인 ‘쇼트(Schott)’는 최근 기업이 가장 잘하는 것과 지역의 니즈(Needs·필요)를 접목한 사회공헌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30년 동안 독일의 대표 음악 서적 전문 출판사로 성장한 쇼트는 특히 문화예술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 유치원 아동을 위한 음악 교육부터 가족이 함께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까지 다양하다. 나무·양철판 등 생활 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통해 아이들이 직접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도록 한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박자를 맞추고 연주를 하면서 소통할 수 있는 ‘뮤직가르텐(Musicgarten)’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쇼트는 정부·학교 관계자 및 예술 강사들과 몇 차례에 걸친 워크숍과 연구를 통해 문화예술 교육 커리큘럼과 책자를 개발하고 있다. 프로그램이 기획되면 실제 교육 전문가들이 자녀와 함께 체험을 해보고, 부족한 부분을 끊임없이 보완한다. 런던·헬싱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