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화)

[책임있는 기업, 존경받는 리더] ⑥ “나누려는 마음 있으면 다 돼… 주저말고 나서야”

책임 있는 기업, 존경받는 리더 <6> 세정그룹 박순호 회장
100만원에서 시작한 나눔 2008년엔 부산지역 최초로 아너소사이어티에 가입해
나눔은 여유보다 마음… 몽골에서 지하수 팔 땐 외상으로 기계 사서 보내
앞으로 아프리카에도 물 공급 더 해주고 싶어

작년부턴 사회복지사에 賞 임직원들은 명절 때마다 이웃 찾아가 생필품 전달해
인터뷰를 위해 기다리는 동안, 회장실 밖으로 커다란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직원은 양팔 가득 자료를 끼고 있었다. 남성복’인디안’을 비롯해 여성복 ‘올리비아 로렌’, 영캐주얼 브랜드 ‘NII’ 등 10여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는 패션 기업 세정그룹 박순호(67) 회장과 인터뷰할 시간은 딱 1시간. 본사가 부산에 있다 보니 서울지사에 올 때는 빽빽한 스케줄이 밀려 있다고 했다. “출근하자마자 아직 화장실도 못 갔습니다.” 첫인사로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은 거칠고 투박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13개 계열사에 종업원 6000명, 연매출 1조원에 달하는 중견기업을 키워낸 40년 역사가 손에 담겨 있었다. 자연스레 사업 이야기가 시작됐다.

세정그룹 제공
세정그룹 제공

“경남 함안의 시골에서 자랐는데, 모두가 어려웠던 시대를 지내며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산의 한 지역 시장에서, 장사가 안 돼 문 닫은 건물 2층을 뜯어내고 공장을 차렸다. 74년에 창업한 이후 큰 위기가 세 번 있었다. 가장 어려웠을 때는 1988년 무렵, 재래시장의 도매상을 정리하고 대리점 체제로 유통방식을 바꿀 때였다. 2년 넘게 고민해서 내놓은 안이었으나, ‘재래시장에 물량이 없어서 못 파는데 무슨 짓이냐’ ‘너무 위험하다’고 다 반대했다. 연평균 30% 이상 성장하며 크게 성공했다.”

박 회장은 최근 또 한 번 혁신을 시작했다. 창립 40주년을 앞두고 2020년 그룹 매출 2조5000억원을 달성한다는 목표로, ‘인디안’을 기반으로 한 통합 유통 브랜드’웰메이드’를 론칭했다. 비즈니스 패션부터 아웃도어, 글로벌 패션브랜드까지 20대부터 60대의 남녀 소비자들을 위한 원스톱 멀티 쇼핑 공간으로, 2014년까지 ‘웰메이드’ 유통망을 400개까지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패션 브랜드로는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하면 드물게 1조원대 클럽에 포함된 자수성가 기업이다. 2008년 부산에서는 최초로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의 고액 기부자 모임)에 가입하는 등 ‘나눔 경영’으로도 이름나 있다. 왜, 언제부터 나눌 생각을 했나.

“돈을 많이 벌고자 했을 때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고용 창출이고, 둘째는 사회의 그늘진 곳에 손길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 초창기, 아내의 손에 이끌려 삼랑진 ‘오순절 평화의 마을’을 방문했다.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을 돌보는 곳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돈 100만원을 봉투에 담고, 600여명분의 떡과 옷을 담은 상자 19개를 싣고 갔다. 우리 딸들도 데리고 갔다. 그게 나눔의 시작이었다. 정말 좋았다. 그때 우리는 남성복만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할머니가 많아서 돌아온 후 마음에 걸렸다. 부산 평화시장의 한 도매상에 가서 할머니들 몸뻬바지와 윗옷 300장을 원가로 사서 한 번 더 갖고 갔다. 사업 초기 회사는 어려웠지만, 작게나마 나눔을 시작한 게 30년 넘게 계속 됐다.”

―수십년째 돈을 기부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기부를 많이 하는 분들을 만나보니 ‘여유가 있어서 나누는 게 아니다’는 공통점이 있더라.

“18~19년 전쯤인데, 몽골에 계신 수녀님이 회사를 찾아왔다. 어찌 찾아왔는지 나도 잘 모르는데, 수녀님 세 분이 몽골의 산 아래에 천막을 치고 영하 38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학교를 짓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매년 6000만원씩 보냈다. 9년이 지나니 학교가 4개 동이 되더라. 그런 후에 ‘물이 없어서 가축도 못 키워서 굶어 죽어가니 지하수 파는 기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 신부님과 비용을 분담해 중고 굴착기를 샀다. 근데 구멍을 뚫다가 잘못해서 기계가 부서졌다는 편지를 받았다. 하는 수 없이 주위의 기업하는 지인들을 불러 함께 하자고 설득했다. 못 하겠다고 다 떨어져나갔다. 결국 내가 외상으로 기계를 사서, 몽골에 보냈다. 그걸로 1000구멍을 뚫었다고 하더라. 채소도 키우고 가축도 기르는 모습을 사진 찍어 보내준다. 아직 한 번도 몽골에 가보지 못했지만, 사진을 보면 진짜 좋다. 하려는 마음이 있으니 다 되더라.”

―나눔을 시작하면, 이곳저곳에서 “어려우니 도와달라”는 요청이 많다. 고액 기부자들은 이 때문에 자기 이름이나 직함을 밝히기 꺼리기도 한다.

“내가 전국구가 되었다(웃음). 회사 일이 바쁘니까 도저히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2011년에 사재를 포함해 330억원을 출연한 세정나눔재단을 만들었다. 이제 재단에서 우선순위를 정해 나눔 활동을 전문적으로 하고 있다. 재단에서는 작년부터 사회복지사들을 발굴해서 시상하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세정사회복지사대상 시상식). 부산에만 사회복지사가 6000명도 넘는데, 이들은 저임금과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몸으로 뛰면서 봉사하는 분들이다. 작년에는 상금 500만원을 현금으로 줬는데, 함께 일하는 분들에게 상금 턱을 내느라 더 힘들어하는 걸 보고 올해는 아예 500만원짜리 금메달을 만들어서 드렸다. 작년에 스무 분을 발굴해서 시상했다.”(그는 “나는 아너소사이어티가 뭔지도 몰랐다”며 “상 받거나 존경받으려고 기부하는 건 아니다”고 했다.)

―회장님의 봉사나 기부 활동이 직원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지는가. 세정그룹의 사회공헌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

“우리 회사 임직원들 하는 정도로는 어디 내놓을 수가 없긴 하지만…. 난 돈으로 참여하는 것만큼 솔선수범해서 봉사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명절 때마다 항상 직원들이 지역의 어려운 이웃 200~300가구를 가가호호 방문한다. 쌀 20㎏, 조미료, 음료수, 세제 등을 모두 담아서 지역별로 나눠서 각각 전달해드린다. 그렇게 한 지 10년쯤 됐다. 갔다 오면 직원들이 ‘우리가 건강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참 잘사는구나’ 생각한다. 애사심도 갖고 일도 더 열심히 한다. 부산 송도에 있는 소년의 집을 13년째 후원하고 있는데, 임직원들이 자선 바자회를 열어 1억4000만원가량을 모아 매년 기부한다. 그 돈으로 소년의 집에 사는 1800명쯤 되는 아이들 겨우살이가 된다.”(박 회장의 딸 셋 중 한 명은 수녀로 평생 봉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 나눔 문화가 잘 정착되고 ‘감사하는 마음’이 늘어난다면,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병폐도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눔과 기업 경영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공유해달라.

“최근 ‘이건희 개혁 20년 또 다른 도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눈물이 난다. 대기업 회장이니까 아쉬울 것 없이 잘 먹고 잘사는 줄 알아도, 밤잠 설쳐가며 기업의 새로운 20년을 구상하는 걸 상상해봐라. 그리고 ‘나눔’ 이야기와 관련해선, 아프리카 아이들 물이 가장 큰 문제다. 구정물 먹는 아이들 생각해봐라. 지하수 파는 기계가 아프리카에 더 들어가야 한다. 맑은 물을 먹을 수 있어야 질병에 걸려 죽는 아이도 없다. 나도 물 파는 기계 갖고 아프리카에 한번 가보려고 한다. 나눔 경영은 특별한 철학이 있는 건 아니다. 베풀면 회사가 좋아진다. 베푸는 것 이상으로 채워진다.”

인터뷰=박란희 편집장

정리=정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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