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Cover Story] 누군가 나를 행복하게 했듯이 이젠 나도 누군가를 행복하게 합니다

Cover Story 나눔의 선순환을 이루는 사람들
사회복지사 김봉수씨 ‘불량청소년’ 방황하다 복지관에서 마음잡고 한국생명의전화에 취업
“나 같은 아이 위로하고 바르게 잡아주고 싶어”
‘달항아리’ 박진오씨
청각·지적장애 가졌지만 도자기 공예로 세상 소통 체험 학습·무료 강습도
“내 작품에 기뻐하는 이들 바라보는 게 가장 행복”
자원봉사자 안지형씨
난치병 앓던 청소년기 메이크어위시재단 통해 소원 이루고 봉사 결심
“환자 고통 잘 아는 만큼 진심으로 용기 건네죠”

사고로 부모를 잃은 아이가 한 아동복지 단체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 순간부터 아이는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한다. 아이는 대학 졸업 후 자신을 보살펴준 단체에 취직한다. 고아원에서 꿈을 키웠던 자신처럼, 소외된 아이들의 꿈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다. 그는 결국 이 단체의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오른다. 고(故) 김석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회장 이야기다. 2010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소외된 아이들의 아버지로 불렸다. ‘도움의 선순환’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2012년 12월, 이 기적은 계속되고 있다. 편집자 주


안지형씨 , 박진오씨, 김봉수씨
안지형씨 , 박진오씨, 김봉수씨

◇”불량청소년, 생명지킴이 되다”, 한국생명의전화 김봉수 사회복지사

우산이 꺾일 정도의 비바람이 몰아쳤다. 마포대교 위에 서니, 쌩쌩 스쳐가는 자동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김봉수(31)씨가 초록색 수화기를 들고 ‘생명의전화’라고 쓰여진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에는 ‘마포남단서쪽 34번’이라는 발신지가 큼지막하게 떴다. “17초 정도 걸리네요.” 시간을 확인한 그는 “정상입니다”라고 말을 이었다. 지난 14일, 김씨는 마포대교에 설치한 긴급전화기를 점검하고 있었다. 이 전화기는 투신자살을 목적으로 교량에 선 사람이 마지막으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전화기로, 수화기를 들면 곧바로 한국생명의전화로 연결돼 상담이 가능하다.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최후보루인 셈이다. 김씨는 한강다리 4곳에 설치된 16대의 긴급전화기를 관리·감독한다. 김씨는 “누군가에게는 50년을 결정짓는 소중한 5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김봉수씨는 서울 월곡동에 위치한 판잣집에서 자랐다. 기초생활수급자 가정이었다. 봉제공장에 다니던 어머니와 길에서 과일과 생선을 팔던 아버지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왔다. 방치됐던 김씨는 자연스레 동네 형들과 시간을 보냈다. 소위 ‘질 나쁜’ 형들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술·담배는 물론, 부탄가스나 본드에도 손을 댔다. 싸움은 일상이었다. 상점에서 물건을 훔치거나, 아이들의 돈을 빼앗기도 했다. 비디오방, 당구장을 돌며 시간을 보내고, 새벽 2시쯤 집에 들어가는 삶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김씨는 한국생명의전화 종합사회복지관과 만났다. 김씨는 “그런 생활에 신물이 났고, 전환점을 찾고 싶었다”며 “당시 무가지 뒤에 동아리모집 광고가 붙어 있었는데, 복지관의 영어팝송동아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후 부모님이 없는 시간은 동네 형들 대신 동아리 친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김씨는 “처음에는 이질감이 들었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김씨의 복지관 출입은 차츰 늘어갔다. 초기엔 토요일에 진행되는 동아리 활동만 참여했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거의 매일 드나들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 자원봉사 오는 형·누나들에게 마음의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자원봉사에도 자연스레 참여하게 됐다. 봉사활동은 고3 때까지 이어졌다. 김씨가 군 전역 후 그리스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봉사활동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1년 3월 대학을 졸업한 김씨는 한국생명의전화에 정식 취직했다. 자신을 삶을 바꿔준 바로 그곳이었다.

32년 인생에서 17년을 함께해온 곳인 만큼 애사심도 남다르다. 그는 언젠가는 청소년 관련 일을 하며 받은 도움을 갚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복지관에서 참 많은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도 들었어요. 앞으로 저 같은 아이들이 올바르게 커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제가 그 시절에 필요했던 것,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더 잘 먹지 않을까요.”

◇”나도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있어요”, 엔젤스헤이븐 ‘달항아리’ 박진오씨

흙투성이 손으로 점토를 만지는 은상(9)·은혁(7) 형제의 표정이 심각하다. 게임캐릭터 ‘앵그리버드(Angry Birds)’를 도자기로 만드는 중이다. 박진오(31)씨는 이들 사이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삐뚤어진 코를 다시 붙여주기도 하고, 물감통에 물을 추가해 주기도 한다. “아주 좋아요”라는 칭찬도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아이들의 심각한 표정과는 달리 박씨는 만면에 웃음이다. “아이들 도와주는 거 좋아해요”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남은 흙덩어리, 쓰던 물감 등 아이들이 벌려 놓은 것도 박씨가 손수 정리한다.

달항아리 작업실의 오후 풍경은 분주했다. 달항아리는 우리 도자기의 저변 확대를 위해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체험학습을 하거나, 장애인 재활교육 및 취약계층 무료 강습을 해주는 곳이다. 도자기 관련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불우아동을 양육하는 사회복지법인 엔젤스헤이븐(구 은평천사원) 소속 도예실로 출발해, 올해 초 (예비)사회적기업으로 독립했다. 박진오씨는 달항아리에서 활동하는 도예가다. 그는 바로 이곳에서 장애인재활교육을 받으며 흙을 처음 접했다.

박씨는 청각장애 2급과 지적장애 2급을 갖고 태어났다. 몸은 불편했지만 호기심과 손재주만은 정상인 못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뭐든 만져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남의 집에 들어가 화분 같은 걸 만지작거리다 깨뜨리는 일도 잦았다. 박씨의 어머니는 지체장애인이었다. 호기심 많은 박씨는 놀아주기 힘든 어머니를 대신해 밖에서 뛰어노는 일이 잦았고, 수원역 근처를 배회하다 길을 잃었다. 이후 아동보호소를 거쳐 닿은 곳이 지금 살고 있는 엔젤스헤이븐이다. 일곱 살 때의 일이다. 박씨는 기관이 운영하는 특수학교인 ‘대영학교’에서 초·중·고 과정을 마쳤다. 박씨를 도예가의 세계로 이끈 건 당시 대영학교 교사였던 장형진 달항아리 대표다. 장 대표는 “복도에서 손들고 있던 일이 잦은 말썽꾸러기였지만, 무엇인가 만드는 것을 보고 집중력과 재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한다. 박씨의 도예실(현 달항아리) 출입은 그날부터 시작됐다. 흙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 박씨는 도자기 공예에 깊이 빠져들었다. 열세 살 무렵, 헤어진 가족과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도예실을 떠나기 싫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정도다. 그 결과 지금은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은 실력의 소유자가 됐다. 박씨가 직접 기획·제작한 ‘호두함’은 달항아리에서 쏠쏠한 수익을 올리는 히트상품이다.

“작품을 보여 달라”는 기자의 말에 박씨는 라면상자만 한 함 하나를 들고 왔다. 코일링(흙을 길게 말아서 쌓아 올리는 기법)으로 한 달 동안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누나한테 줄 접시”라며 진열대 한쪽을 가리켰다.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만들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게 제일 기쁘다”는 그는 도예를 통해, 세상과의 나눔을 시도하고 있었다.

◇”내 삶이 바뀐 것처럼…”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안지형 정기봉사단원

“림프종양을 앓던 다섯 살짜리 아이였어요. 말조차 서툰 친구였는데, 유독 ‘파워레인저(어린이용 TV시리즈)’만 보면 말도 술술 하고, 힘이 넘쳤죠. 그 아이 집 근처 놀이터에서 악당이 출연한 영상을 찍고, 뉴스처럼 꾸며 아이가 보게 했죠. 준비한 복장을 입고 뛰쳐나가 직접 악당을 무찔렀어요. 주변 경찰서에 도움을 얻어 경찰차에 실어 보내기까지 했죠. 그날 아이는 진짜 ‘파워레인저’가 됐어요.”

안지형(21·건국대학교 경제학과)씨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의 정기봉사단원이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난치병 환아(만 4~18세)의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다. 안씨는 2년여 동안 20명의 소원 성취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파워레인저 만들기’도 그중 하나다. 안씨는 방학 때면 재단에서 살다시피 한다. 재단 직원들이 “앞으로 이사장이 되실 분”이라고 농담할 정도로 열성적이다.

안씨는 15세가 되던 해, 골육종(뼈에 발생하는 악성 종양)으로 병원 생활을 했다. 당시 같은 병실 친구들의 ‘소원 행사’를 지켜보면서 재단을 처음 알았다. 퇴원 후 학교로 복귀했던 안씨는 18세 때 백혈병 진단을 받으며 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담당 의사는 오랜 투병 생활로 지친 그에게 ‘소원’을 권유했고, 재단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당시 소원은 ‘부모님 여행’. 안씨는 “부모님이 식당을 하셨는데, 일 년에 쉬는 날이 신정·구정 이틀뿐이었다”며 “특히 병간호 때문에 몇 년간 고생이 심해, 하루라도 편하게 쉬게 해 드리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이뤄진 소원은 가족 4명의 1박2일 서울 나들이. 안씨는 “함께 모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가족에게 여행은 감격이었다”며 “부모님에 대한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했다.

병 때문에 포기했던 학업을 검정고시로 채우는 동안 “나도 다른 이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는 바람은 결심으로 굳어졌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대학생 봉사자로 참여를 시작했다. 안씨는 “아이들이 환자로서 느끼는 고통을 잘 이해할 수 있어서, 진정성 있게 다가가는 힘이 됐다”며 “가족여행을 통해 느꼈던 고마움과 용기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한다는 마음으로 봉사했다”고 말했다.

안씨는 지금도 한쪽 발이 불편하다. 골육종의 후유증이다. 백혈병은 6년째 진행 중이다. 항암제 성격의 약을 매일 먹어야 한다. 하지만 안씨는 “아팠던 것은 불행이 아닌 행운”이라고 말한다. 그는 “쉽게 포기하는 성격이었는데, 힘든 일을 겪고 성숙해졌다”고 했다. 봉사의 기쁨을 알게 된 것도 큰 선물이다. 그는 “내게 베풀어줬던 것도, 내가 베풀 수 있게 해준 것도 모두 고마운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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