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본드 중독 ‘문제아’에서 위기청소년 품은 ‘1등 선생님’로…청년 교사의 인생스토리

‘문제아’에서 위기청소년 품은 ‘선생님’으로 

김진영 ‘세상을품은아이들’ 생활지도교사 인터뷰 

 

그의 어릴 적 별명은 ‘문제아’였다. 숨을 들이마시면 온몸이 나른해지는 ‘약’을 즐겨하다 ‘큰 집(소년원)’에 들어갔다. 중학교도 중퇴했다. 다섯차례의 정신병원 입원, 3번의 재판을 거친 소년원 입소. 발버둥 치면 칠수록 어둠은 점점 더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론 안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방황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기 때문. 

내가 겪었던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바로 잡아야겠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그는 더이상 방황하지 않는다. ‘문제아’로 불리던 그의 이름 뒤엔 ‘선생님’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위기청소년 공동체인 ‘세상을품은아이들(이하 세품아)’에서 생활지도교사로 활동 중인 김진영씨의 이야기다. 

2017 세품아 자전거국토종단에 참가한 청소년과 생활지도교사 김진영(왼쪽)의 모습. ⓒ세상을품은아이들

 

◇강해지고 싶었던 ‘독립군’, 일탈을 택하다

세품아는 가정, 학교, 사회로부터 소외된 아이들의 치유와 자립을 돕는 위기청소년 공동체다. 상처 치유를 위한 음악·여행 중심의 교육을 진행하고, 청소년들이 내면의 가치를 실현하는 삶을 살도록 지원한다. 2008년부터 지금까지 약 300명의 위기청소년들이 세품아와 인연을 맺고, 건강한 사회구성원이자 ‘문제해결자’로 성장해왔다. 

김진영씨 역시 세품아 출신이다. 김씨는 “나의 비행은 몸이 약한 나를 타인으로부터 방어하려는 것에서부터 시작됐다”고 입을 열었다. 실제로 그는 몸이 약했다. 태어난 지 100일 무렵, 신장에 이상이 생겨 소변 배출 기능을 상실한 신장 하나를 제거해야만 했다. 조금만 무리해도 쉽게 피로해졌고, 또래에 비해 몸집도 왜소했다. 그럼에도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일진’ 그룹에 속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어머니의 폭력도 그의 일탈을 부추겼다. 

“첫 가출은 10살때였습니다. 팬티 한 장만 입고 매를 맞다가 도저히 못견디고 집을 나와버렸어요. 1학년 때부터 학교도 자주 빠졌죠. 초등학교 선생님과 어머니의 체벌이 너무 심해서,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동네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잤죠.”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상처 받은 그는 방황을 계속했다. 인근 고등학생 형들과 어울리던 김 씨는 처음으로 물건을 훔쳤다. 담배와 술을 접한 것도 이 시기였다. 가출을 많이 해서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독립군’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거리에서 만난 형들이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훔쳐오라고 시켰습니다. 당시 제 나이가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었거든요. 성공할 때마다 형들에게 인정받는 기분이 들어 점점 더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친구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더 강한 척을 하고, 일탈을 반복하게 됐죠.” 

그리고 중학교 2학년때 김씨는 본드를 처음 경험하게 된다. ‘신기한 경험’이라던 친구들의 말이 충동의 방아쇠를 당겼다. 

◇방황의 끝, 삶을 바꾼 두 명의 아버지

“실내에서 본드 흡입을 했는데 어느 순간 제가 거리에 나와 있더라고요. 기억이 끊긴 상태였는데, 저는 순간이동을 했다고 믿었어요.”

김씨는 본드가 주는 환상에 매료됐다. 본드를 할 때면 스파이더맨처럼 손목에서 거미줄을 발사하는 슈퍼히어로가 되기도 하고, 친구들과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환상이 진짜처럼 느껴졌다. 본드가 주는 즐거움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압도했다. 그가 본드를 끊지 못한 이유다. 

2009년 중학교 3학년이던 김씨는 학교 폭력에 대한 징계로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당시 전국적으로 학교 폭력 추방을 위한 움직임이 강화되던 때였다. 선생님과 부모님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무려 5번이나 강제 입원됐지만, 퇴원한 뒤 바로 본드에 손을 댔다. 결국 그는 보호관찰법 위반으로 소년원에 가게 됐다. 소년원 퇴소 이후 한 달만에 아버지가 사준 오토바이를 타고 나가 친구들과 다시 본드를 했다. 아들의 새 삶을 바라던 아버지의 기대는 또다시 무너졌다. 

이듬해 겨울, 김씨의 나이 17세 되던 해에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고 했다. 마침 근처에 있던 김 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제일 먼저 도착했지만 아버지의 손은 이미 차갑고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아버지의 죽음이 저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책감에 휩싸여 자살기도도 하고, 우울증에 시달렸어요. 하지만 몸이 아프신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을 위해 돈을 벌어야한다는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죠.” 

그때부터 김씨는 돈을 벌기 위해 일용노동직부터 시작했다. 굴삭기와 지게차 등 기술을 배우는 훈련생으로도 생활했다. 그러나 약해진 체력과 좁은 취업문은 그를 좌절시켰다. 그러나 가족을 생각하면 다시 방황할 순 없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그는 명성진 세품아 이사장(부천 예수마을교회 목사)을 찾아갔다. 

“목사님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07년입니다. 트럭 밑에서 잠을 자던 저를 교회로 데려가 밥을 먹이고, 몸을 씻기고, 옷을 주셨죠. 또 가출을 하더라도 잠은 교회에서 자라고 했어요.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다 몰려 와서 교회가 ‘문제아’들로 넘쳐났어요. 목사님은 하루종일 우리와 함께 계셨어요. 본드 중독을 막기 위한 목사님 나름의 방법이었죠. 무섭게 혼나기도 하고, 함께 울기도 하고. 나중엔 음악을 가르쳐주셨어요. 목사님의 따뜻한 손길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힘들고 외로울 때, 가장 먼저 목사님이 떠오르더군요.” 

◇내 아픔마저 닮은 아이들

김씨는 세품아에서 생활하며 가스, 배관 전문 기술학교에서 훈련생 과정을 시작했다. 통학하는데만 왕복 4시간 이상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김씨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포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루 10시간 이상 훈련을 받고 돌아오면 녹초가 됐지만, 세품아에서 함께 생활하던 동생들이 그에겐 활력소였다. 세품아에서 만난 아이들은 자신처럼 가출과 범죄를 반복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폭력과 학대 등 가정과 학교에서 소외받았던 아픔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나와 비슷한 과거를 안고, 나의 아픔까지 닮아있는 이 아이들을 돕고 싶었어요. 한참 고민 끝에 ‘청소년 상담가’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습니다. 평소 ‘형처럼 나도 달라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거든요. 그런 동생들 덕분에 저도 자신감이 생겼고요.” 

세품아 생활지도교사 김진영(왼쪽에서 두번째)씨가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세상을품은아이들

목표를 정한 김씨는 고졸 검정고시 준비부터 시작했다.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 동생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전혀 창피하지 않았단다. 2번의 검정고시, 대학 입시 재수를 거쳐 2015년 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학과에 당당하게 입학했다. 

“합격 통지를 받고 명성진 목사님께 아이들과 함께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그 해 4월, 세품아 생활교사로 정식 입사했습니다.”

생활교사로 2년 넘게 아이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져 힘에 부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다시금 의욕이 솟아났다. 

“세품아에 새로 들어온 열아홉살 친구와 샤워를 같이 한 적이 있어요. 말수도 적고 적응을 잘 못하던 친구였는데 먼저 샤워를 같이 하자고 해서 조금 의아했어요. 그러더니 대뜸 ‘형, 저도 6학년 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제일 먼저 발견했어요. 형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들어서 꼭 함께 이야기 하고 싶었어요’라더군요. 사실 아버지께서 스스로 삶을 끝내신 게 나 때문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았고 숨기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런 나의 아픔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됐죠.”

파란만장했던 청소년기의 경험, 군대를 면제 받을 수밖에 없었던 가정형편, 정기적인 치료 없인 일상 생활조차 불편하신 어머니와 어린 두 동생의 이야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무게···. 그때부터 김씨는 세품아의 아이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저없이 할 수 있게됐다. 그는 “우리 세품아 공동체에 오는 아이들은 모두 저마다 숨기고 싶은 아픔들을 가지고 있다”면서 “상처는 겉으로 드러내야 더 빠른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씨의 이야길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보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면 더 빨리 치유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씨는 세품아에서 ‘최고의 선생님’으로 불린다. 아이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기 때문. 올해로 교사 3년차인 김군은 지난 6월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 종주도 다녀왔다. 일주일 동안 강원도 고성에서 경상북도 포항 호미곶까지, 동해안 400km를 함께 달렸다.

“신장 기능이 약해 쉽게 피곤해지고 입술이 갈라지는 제겐 자전거 종주가 한계에 대한 도전입니다. 다음엔 백두대간 종주, 산티아고 순례길 완주도 함께 도전하고 싶어요. 혹시 제가 넘어지더라도 저를 일으켜줄 아이들이 함께 있어서 든든합니다.” 

2017 세상을품은아이들 자전거 국토 종단 을 하는 김진영 생활지도교사(왼쪽)와 청소년의 모습. ⓒ세상을품은아이들

※이 기사는 임상엽 세상을품은아이들(세품아) 팀장이 더나은미래와 동그라미재단이 함께 진행하는 ‘비영리 리더 스쿨 4기’ 과정을 통해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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