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학생이 수업의 중심”… 혁신학교를 가다

경기도 광명시 운산고등학교 현장 르포

 

“외계 행성 탐사 방법 중 ‘시선 속도법’이 있지요? 멀어지는 물체에서는 빛의 진동수가 감소하고, 가까워지는 물체에서는 증가한다는 ‘도플러 효과’를 응용한 것입니다.”  

지난 2일 오전, 경기도 광명시 운산고등학교 1학년 2반에서 지구과학 수업이 한창이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 “우리가 스펙트럼으로 관측하면 알 수 있어.” 학생들이 나서서 발표도 하고, 질문도 한다. 교사는 한 발 물러서서 학생들끼리 토론하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이후 보충 설명과 내용 정리를 따로 해주지만 일방적으로 내용을 주입시키지는 않는다.

27명 중 졸거나 다른 일을 하는 학생은 없다. 책상 배열 또한 특이하다. 칠판을 향해 일렬로 늘어놓은 대신 ‘ㄷ’자 형태다. 토론하기 쉽게 서로 마주보고 앉은 것이다. 이날 발표를 했던 박지훈(17) 군은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친구들이 발표하고 자유롭게 질의응답을 하니 지루하지 않고 이해가 더 잘된다”고 말했다.

서로 모르는것을 묻고 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협력적인 교실 분위기다. ⓒ권유진

 

 

◇모든 것은 수업에서 시작 ‘배움 중심 수업’

 

혁신 교육의 기본은 수업이다. 운산고의 ‘배움 중심 수업’은 수업의 주도권을 학생에게 넘기는 것으로 시작했다. 교무부장을 맡고 있는 연현정(38) 교사는 “교사가 앞에서 가르친다고 학생들이 다 배우는 게 아니라는 회의감이 들었다”며 “진짜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한 결과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단계가 배움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생각해, 이것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다.

이런 수업 방식이 학생들에게 체화되려면 한 교과의 수업만 바뀌어서는 안됐다. 운산고가 수업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교사들이 전체적으로 혁신 교육 철학을 공유하고 함께 ‘배움 중심 수업’으로 바꿔갔기 때문이다.

2011년 개교한 운산고등학교 전경 ⓒ권유진

수업이 변하자 교실도 변했다. 이는 자연스레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에 기록할 자료로 이어졌다. ‘창의적 체험활동’(창체)은 일반고에서는 학생부에 쓰기 위한 보여주기식 활동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운산고는 수업이 창체까지 이어지도록 해, 학생들이 의미없는 활동을 하지 않도록 했다.

예를 들어, 국어 교과의 ‘기형도 프로젝트’의 경우  수업시간에 기형도 시인에 대해 공부하고 이것으로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대회를 연다. 이 프로젝트가 발전해 광명시가 주관한 기형도 생가 살리기에도 보탬이 됐다. 배움이 자연스레 좋은 스펙이 된 것이다. 연현정 교사는 “학생부라는 목표가 아니라 배움을 추구하니, 자연스레 좋은 결과가 따라왔다”고 강조했다. 실제 90%이상 수시 전형으로 대학을 가는 운산고의 경우 이런 학생부를 바탕으로 좋은 입시 결과를 내고 있다.

 

◇학교 민주주의, 교사의 역량 중요

 

배움 중심의 수업이 가능한 바탕에는 학교 민주주의가 있다. 강범식(57) 교장은 “배움 중심 수업이 되려면 기본적으로 학교 내의 문화나 제도가 민주적이어야한다”고 말했다. 실제 운산고는 교장과 교사, 교사들 사이에서 권위적인 위계질서가 적은 편이다. 교무회의에서도 직위나 연차에 상관 없이 자유롭게 안건을 내고 토론한다. 강 교장은 “교사 스스로 존중 받는 경험이 있어야 학생들에게 그것을 전해줄 수 있다”며 “기존 관료제에서는 교사가 존중받지 못하고 그 스트레스가 오롯이 학생들에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교사 역량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도 잘 되어있다. 다른 학교와 달리 교사끼리 수업을 자주 공개한다. 일종의 ‘재능기부’인 셈. 서로의 수업을 보고 배우는 것이다. 자기 교과를 뛰어넘고 학생들을 이해하기 위함이다. 수업을 참관한 뒤에는 좋았던 점을 나누며 서로를 배워간다. 전문 학습공동체가 활성화 되어 있는 것 역시 운산고만의 차별점이다.  같은 주제에 관심 있는 교사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상담도 한다. 교사 스스로 마음만 먹으면 능력을 기를 수 있는 환경이 잘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배움 중심 교실에서 교사의 역할은 끝까지 지켜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것. ⓒ권유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관계가 무너지면 배움은 불가능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상위권 학생에 대한 ‘학생부 몰아주기’는 이곳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교사와 학생 간의 믿음, 보이지 않는 관계를 중요시하기 때문. 연현정 교사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무너지면 배움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공감교실’도 이런 관계를 중요시하기에 실행되는 프로그램이다. 교과 과정에 부적응한 학생도 혼자 남겨두지 않는다. 이런 학생을 한 명씩 대상으로 교사 6~7명이 전략회의를 하고 그 학생만을 위한 자리를 만든다. 자존감이 약한 학생에게는 칭찬 샤워를 하는 등의 방법이다. 자신감을 높이고 수업 속에 어울려서 배울 수 있도록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다.

강범식 교장은 힘주어 말했다.

“학교의 참된 모습은 입학할 때보다 졸업할 때 훨씬 성장한 모습으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성적뿐 아니라 인성 등 여러 역량이 포함돼죠. 고등학교를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발판으로만 바라보는 순간 교육의 본질은 무너집니다.”

 

권유진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7기)

 가슴엔 태양을, 입술엔 노래를 담고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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