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목)

당신이 빌린 건… 정장이 아닌 희망입니다

정장 공유 서비스 ‘열린옷장’

취준생 면접용 옷값 걱정 덜어주려 시작
기증자 사연 담긴 응원 메시지 함께 전달

月평균 100명 기증… 현재 800벌 보유
컴퓨터로 재고 관리 후 사이즈 무료 수선

청년 구직자 규모는 100만명에 육박한다. ‘급하게 면접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옷값 걱정이라도 덜어주자’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공유단체 ‘열린옷장'(비영리단체)은 2012년 여름, 기증받은 단 10벌의 정장을 토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현재 800벌의 정장을 보유하고 있다. 직원 수도 늘어 10명의 직원들이 ‘옷장지기’로 일한다. 취업 시즌인 지난해 12월, 기자는 이틀간 열린옷장의 자원봉사를 하며 ‘취업전쟁’을 둘러싼 청년들의 이야기를 간접 체험해봤다. 편집자 주


“딩동.”

열린옷장 직원이 대여자 앞에서 넥타이 매는 법을 시연하고 있다. /열린옷장 제공
열린옷장 직원이 대여자 앞에서 넥타이 매는 법을 시연하고 있다. /열린옷장 제공

벨소리와 함께 TV 스크린에 자신의 이름이 뜨자 김영선(가명·27)씨가 탈의실로 향했다. 내일 있을 면접 때 입을 검은 정장과 흰 블라우스를 빌리기 위해서다. 옷장지기들이 김씨의 팔다리 길이와 허리둘레를 1㎝ 단위로 측정해 컴퓨터에 입력하자, 400여벌의 여성복 중 김씨 몸에 가장 잘 맞는 옷의 번호가 떴다. 옷을 입어본 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도 된다. 구직 기간이 길어져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김씨는 “이번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대기업, 중소기업, 외국계 기업 가리지 않고 80군데 지원했지만 서류, 인·적성 전형에서 대부분 탈락해 내일 첫 면접을 치른다”고 말했다. 재킷(1만원), 치마(1만원), 블라우스(5000원), 구두(5000원)를 빌린 김씨가 낸 돈은 3만원으로, 일반 정장대여점에 비해 30~50% 저렴하다. 빌린 옷과 함께 ㈜식스타즈에서 기부해준 양말, 조향사 노인호씨가 재능기부해 만든 향수까지 덤으로 포장되니, TV 화면에 ‘의류가 준비되었습니다’란 문구가 떴다.

“바지 기장이 조금만 짧았으면 좋겠어요.”

동계 인턴 면접 때 입을 양복을 빌리러 온 김동현(26)씨가 입을 열자, 직원들이 곧바로 바지 수선을 해줬다. 손님들이 ‘빌린 정장’이더라도 ‘맞춰 입은 정장’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맞춤형 수선은 무료로 제공된다. 김동현씨는 “할인매장도 둘러봤지만 너무 비쌌다”며 “정장대여업체는 하루에 4만원인데, 단돈 2만원으로 3박4일 동안 양복을 빌려 입을 수 있어 편하다”고 말했다.

열린옷장의 김소령(앞줄 왼쪽에서 둘째)·한만일(뒷줄 왼쪽에서 셋째) 공동대표와 직원들. /열린옷장 제공
열린옷장의 김소령(앞줄 왼쪽에서 둘째)·한만일(뒷줄 왼쪽에서 셋째) 공동대표와 직원들. /열린옷장 제공

◇취준생 100만명 시대… 면접 정장 부담 덜어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에 위치한 건물 5층, 45평 남짓한 공간에 수백 벌의 남녀 정장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공채 면접이 몰리는 겨울 시즌이면, 청년 구직자들이 하루에도 80~90명씩 방문하는 열린옷장은 늘 만원이다. 10평짜리 대기실에는 정장 대여 신청서를 작성하는 키보드 소리만 ‘타닥타닥’ 들릴 뿐 긴장이 감돌았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라는 이옥희(23·도시교통공학 전공)씨는 “전공의 특성상 대놓고 남학생들을 선호하는 직장이 많아 이제 곧 졸업인데 취업이 어렵다”며 “첫 번째 면접인 소방공무원 면접 때 정장을 입어본 후 맘에 들어 다시 빌리러 왔다”고 했다.

이날 만난 이들은 면접을 앞둔 구직자부터 결혼식장에 입을 정장을 빌리러 온 청년까지 다양했다. 촬영을 전공했다는 최준규(23)씨는 “누나 결혼식 때 입을 정장을 빌리러 왔다”고 했다. “촬영감독 밑에는 1단계, 2단계, 3단계 조수가 있는데, 저는 3단계에서 막내 사이예요. CF촬영팀에 속하면 한 달에 15만원 벌어요.”

◇기증 대신 자원봉사… 정장 대신 응원 공유

현재 열린옷장에 옷을 기증하는 이들은 매달 100여 명에 달한다. 수선과 신체 사이즈 측정, 세탁 등 일감이 몰리는 오후가 되면, 열린옷장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때 셔츠와 블라우스 다림질은 자원봉사자들의 몫이다. 다림질감이 매일 족히 100장이 쌓이기 때문이다. 기자도 직접 다림질 자원봉사에 나섰다.

“치익~치익~.” 다림질 전문 기계 두 대가 뿜는 스팀이 정장 셔츠로 둘러싸인 3평 남짓한 좁은 공간을 채웠다. 다림질이 손에 익은 열린옷장 직원들은 셔츠 한 장을 3분이면 거뜬히 다리지만, 처음 와 본 자원봉사자가 직원들처럼 빠르고 꼼꼼히 해결하기는 어렵다. 스팀다리미로 여성 정장 20~30벌까지 다리니 목과 어깨, 오른쪽 손목이 뻐근했다.

셔츠, 블라우스 다림질감이 하루에만 100여 장 쌓였던 지난해 12월, 기자가 이틀 동안 열린옷장에서 자원봉사를 해봤다. /열린옷장 제공
셔츠, 블라우스 다림질감이 하루에만 100여 장 쌓였던 지난해 12월, 기자가 이틀 동안 열린옷장에서 자원봉사를 해봤다. /열린옷장 제공

쉽지 않은 다림질 자원봉사지만, 많게는 하루에 3~4명의 봉사자가 이곳을 찾는다. “‘이 옷 입고 합격해라’란 마음으로 즐겁게 셔츠를 다렸어요.” 대학 방학을 맞아 매주 토요일마다 열린옷장에서 봉사하는 박광운(23·서강대 화학공학 2년)씨가 말했다. 박씨는 “봉사활동은 얼마나 정기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기증할 수 있는 정장은 없지만 이렇게라도 돕고 싶다”고 말했다.

“내일 면접 꼭 합격하세요!”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취업 스터디를 하느라 바쁘지만 시간을 내 자원봉사를 한다는 윤준보(27)씨가 대여자에게 옷을 건네며 말했다. 윤씨는 “같은 처지의 구직자들을 응원하고 싶어 봉사하고 있다”고 했다.

◇옷과 함께 메시지 나눠… 대여자가 기증자로

공유 경제는 여러 사람이 유휴 자원을 나눠 쓴다는 장점이 있지만, 참여자 간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한다. 정장을 저렴하게 빌려줬는데 상대방이 옷을 망가뜨려 놓고 배상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열린옷장은 어떻게 기증자와 대여자 사이 믿음을 쌓았을까. 우선, 의류를 훼손하거나 분실한 경우 대여비의 5배에 달하는 배상금이 따른다. 그러나 김소령(42)·한만일(33) 공동대표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바로 옷의 기증자가 누군지 알려주고, 기증자가 대여자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방법이다.

“2012년만 해도 손상돼 돌아오는 정장이 꽤 많았어요. 배상금 조건을 추가해도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죠. 2013년 여름부터 기증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어요. ‘첫 출근하는 날 입었던 정장’ ‘공기업에서 근무하며 30년간 입었던 정장’ 등 옷에 담긴 사연은 각양각색이었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망가지거나 더러워져 돌아오는 정장이 부쩍 줄었습니다. 기증자의 사연을 읽은 대여자들은 아마 ‘이 옷은 누군가의 소중한 옷’이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이곳에 쌓인 기증자의 응원 편지와 대여자의 감사 편지만 해도 대형 서류 파일 10개가 넘친다고 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