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월)

시각장애인이 그렸습니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엄정순 ‘우리들의 눈’ 디렉터
17년 전 회화과 교수 관두고 시각장애인예술협회 설립
처음엔 예술적 호기심에 시작 점차 깊은 사회적 편견 느껴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그들도 예술활동 할 수 있어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 같죠

‘바람도 찍을 수 있나요?’

한 여성의 귀를 촬영한 사진 옆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한빛맹학교에 다니는 김희수(15·중3)양이 찍은 사진이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생각하면 오산이다. 지난 16일 찾은 서울 종로구 화동 ‘우리들의 눈’ 갤러리에는 한빛맹학교·서울맹학교·청주맹학교·충주성모학교 등 시각장애인 학생 100여명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어나더 아트 클래스(ANOTHER Art Class)’라는 제목의 전시회엔 사진뿐 아니라 그림·입체·타일·판화 등의 작품도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을 활용해 시각적인 표현을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그걸 잘 모를 뿐이죠.”

엄정순 우리들의 눈 디렉터는 "시각장애 청소년들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을 활용해 시각적 표현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상호 기자
엄정순 우리들의 눈 디렉터는 “시각장애 청소년들은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을 활용해 시각적 표현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상호 기자

엄정순(52) 한국시각장애인예술협회 우리들의 눈(이하 ‘우리들의 눈’) 디렉터가 입을 열었다. 뮌헨 미술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건국대 회화과 교수로 활동하던 그녀는 17년 전, 교수를 그만두고 시각장애인 청소년을 위한 문화예술교육단체를 설립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떻게 생각을 표현하는지 알고 싶어 3년간 맹학교에서 미술 자원봉사활동을 한 게 계기였다”고 한다. 예술적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엄 디렉터는 점차 시각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못 보고, 미술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면서 사회는 이들의 가능성을 외면했다는 것.

‘우리들의 눈’은 현재 4개 맹학교를 찾아가 매주 1회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한 11개 맹학교와 함께 순회 아트프로그램 ‘장님 코끼리 만지기’ 프로젝트(시각장애 학생들이 코끼리를 직접 만져본 체험을 작품으로 표현)를 운영한다.

미술 수업을 시작하면, 예술가 선생님과 시각장애 학생이 1:1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마음의 벽을 닫고 지내던 아이들은 점점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한번은 장기가 하나하나 마비되는 병에 걸려서 몸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시각장애 청소년을 만났어요. 교육을 잘 받을 수 있을지 걱정도 많이 됐죠. 그런데 수업 시간이 되자 그 친구가 한 손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희미한 빛에 의존해 그림을 그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하구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됐습니다.”

우수 작품을 따로 선정해 연 6~7회 전시회도 개최한다. 최근에는 예술가의 꿈을 키우는 시각장애인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만, 어려움은 17년째 계속되고 있다. “기업이나 대중의 이목을 끌기가 쉽지 않아요. 아프리카에 구호식량을 보냄으로써 생기는 변화처럼 눈에 띄는 성과가 바로 보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죠.” 다행히 이들의 활동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기업 동반자들이 하나 둘 등장했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이번 전시회를 후원하고, 엔비디아코리아는 2010년부터 우리들의 눈과 함께 ‘터치 비주얼’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해외에서는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과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왔다. 일본에서는 시각장애인이 손으로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 ‘톰 갤러리(Gallery Tom)’가 1984년부터 운영되고 있다. 대영박물관이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해외의 유명 전시관에서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박물관 관람 프로그램을 연구·적용 중이다.

인터뷰를 마칠 무렵, 엄 디렉터가 갑자기 기자의 등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흰 벽에 ‘지금은 침구사로 일하지만, 맹학교 시절에 받은 미술 수업은 나에게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심어줬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문화예술교육은 개인이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활동입니다. 이 활동을 잘 살찌워서 시각장애인 예술가가 탄생하도록 돕는 것이 작은 소망입니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이 후원하는 ‘2013 우리들의 눈 기획전’은 오는 30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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