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일)

어릴적 빛을 잃은 시각장애인 소년 세계적인 음악가 되어 희망 전파한다

이상재 교수 인터뷰
미국 피바디 음대박사 재능 기부하고 싶어서 시각장애인들 모아 체임버 오케스트라 운영
연간 100회 이상 공연 “악기 부는 재주 하나로 남에게 도움돼 기뻐”

이상재 한국나사렛대 교수가 공연에 앞서 클라리넷의 음을 맞춰보고 있다.
이상재 한국나사렛대 교수가 공연에 앞서 클라리넷의 음을 맞춰보고 있다.

술래잡기를 하다 차에 치인 소년은 그 길로 빛을 잃었다. 3년 동안 9번의 수술을 해봤지만 허사였다.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이 기댈 곳은 음악뿐이었다. 쓸쓸한 소리가 좋아 고른 악기는 ‘클라리넷’. 음악은 취미로만 하라던 부모님의 반대에 이틀을 굶으며 버텼던 소년은 미국 3대 음대 중 하나인 피바디(PEABODY) 음대 140년 역사상 최초의 장애인 박사학위 수여자가 됐다. 이상재 한국나사렛대 관현악과 교수는 몸값 높은 연주자가 된 지금도 오케스트라 운영, 재능 나눔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는 9월 2일에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주최하는 ‘나눔음악회’에 초청 연주자로 나서, 재능 기부를 할 예정이다.

―교통사고로 인해 갑자기 시력을 잃었는데, 어떻게 음악을 하게 되었나요.

“일곱 살 되던 해, 동네 형들하고 술래잡기하다가 차에 치였습니다. 몇 미터를 날아갔대요. 발목은 부스러졌고 머리도 많이 다쳤죠. 처음엔 눈은 다친 줄은 몰랐는데, 나중에 병원에 갔더니 사고 충격 때문에 망막이 손상됐대요. 3년 동안 수술을 9번 받았는데 다 실패하고 열 살 때 완전히 실명했어요. 지금은 불빛도 감지가 안 돼요. 시력을 잃은 이후 초등학교 4학년 때 바이올린을 처음 시작했고,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클라리넷을 했어요. 클라리넷의 어원은 ‘클리어(Clear)’예요. 가을바람처럼 맑은소리를 내요. 그런데 소박하고 쓸쓸한 느낌도 있거든요. 시각장애인이 돼서 힘들고 어려운 시절, 강한 바이올린 소리보다 제 마음을 더 움직였죠.”

―앞이 보이지 않는데,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다는 게 쉽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처음에 제가 음악 하는 것을 반대하셨어요. 안정적으로 특수교육과를 졸업해서 시각장애인학교 선생님이 되길 원하셨죠. 하지만 제 고집을 꺾지 못하셨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정식으로 레슨 받은 적이 없습니다. 특수학교 밴드부에서 선배들로부터 어깨너머로 배운 게 전부죠. 고3 때 뒤늦게 만난 서기영 선생님이 제 은인이셨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레슨은 물론, 대학 4년 내내 주말마다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셨어요. 정식 레슨 없이 제멋대로 악기를 연습해 왔기 때문에 첫 1년 동안은 엄청나게 혼났죠. 작은 습관부터 시작해 고치고 다듬는 것의 연속이었어요. 선생님께서는 매번 악보를 불러주셨어요. ‘도, 레, 미…’ 이런 식으로요. 지금은 점자악보가 있지만, 예전에는 선생님이 불러주는 악보를 점자로 찍어 그걸 모두 외워서 연주해야 했어요. 나중에는 선생님께서 직접 점자법을 배워서 악보를 그려주시기도 하셨죠.”

―그런 환경에서도 중앙대 음대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세계 3대 음대 중 한 곳에 당당히 입학하셨습니다. 유학 시절 2시간만 자고 연습하다 난청 위기를 겪었단 얘길 들었습니다.

“저는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지휘를 볼 수 없으니까요. 생계를 위해서는 교직에 들어가야 했죠. 학위가 필요했어요.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유학을 선택한 이유죠. 중대 음대를 최우수로 졸업했지만, 유학은 모두 말렸어요. 말도 안 된다고 했죠. 한 학기도 못 견디고 돌아올 거라는 비아냥도 들었습니다. 어렵사리 미국 학교에 들어왔더니, 이번에는 주변의 수군거림이 느껴지는 거예요. 맹인이라서 특별히 따로 뽑았다는 선입견이었죠. 기분이 너무 나빴어요. 정당하게 경쟁해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죠. 박사학위를 꼭 받아 내야겠다는 마음에 악착같이 했던 거죠. 박사과정 때는 100명 넘는 지원자 중 10명도 안 뽑혔는데, 그중 동양인은 저 혼자였습니다. 개교 이후 시각장애인 박사학위수여자는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어요.”(그는 “미국 피바디 음대 시절 헬기 타고 레슨 받으러 다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연습실과 방에서만 살았다”며 “당시 유학비를 대느라 부모님이 많이 힘드셨다”고 말했다.)

―연간 100회 이상 공연한다고 들었습니다. 꿈을 이룬 소감이 궁금합니다.

“전 아직도 악기를 부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2007년 12명의 시각장애인과 결성한 하트시각장애인 체임버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들과 연주를 많이 다닙니다. 작년에 카네기홀에서 시각장애인들로는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무대를 만들었는데, 4번이나 기립 박수를 받았어요. 나이 50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도 공연을 앞두고는 떨립니다. 기대와 긴장이 섞여 있죠. 연주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청중에게 한순간이라도 평생에 남을 기억을 주자는 것이죠.”

―재능 기부 활동도 많이 하고 계신데요. 나눔의 의미가 훨씬 특별할 듯합니다.

“음악을 사랑하지만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악보를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을 모아서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재능을 나누는 이유는 되돌려주기 위해섭니다. 제가 잘해서라기보단 부모, 친구, 선배, 사회로부터 받은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거든요. 악기 부는 재주 하나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돕는 거죠.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는 시각장애인 유예은양의 멘토로도 활동한 것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는데, 올해 ‘나눔톡콘서트’에서 재능을 나누고 있어요. 이번 9월 2일에 열리는 나눔음악회는 어린이재단이 양성하는 음악 인재들이 모이는 뜻깊은 자리인데, 불러주신 게 오히려 감사합니다. 제 꿈은 딱 한 가지예요. 지금처럼 연주하고, 나누는 시간이 계속돼 저를 통해서 사람들이 희망을 보는 겁니다. 긍정적인 기운과 희망 에너지를 죽는 날까지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최태욱 기자

김경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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