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토)

공사로 없어진 점자블록… 관계 기관은 책임 떠넘기기

지난 13일 서울 중구 덕수궁 정문 앞. 공사가 한창인 정문 바닥에 시각장애인 보행을 돕는 점자블록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청테이프로 고정해둔 점자블록이 행인들 발에 채이면서, 미관을 해치고 통행을 방해하는 애물단지가 됐다.

13일 서울 중구 덕수궁 정문에 설치된 가림막 앞에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이 망가진 채 나뒹굴고 있다. /최지은 기자
13일 서울 중구 덕수궁 정문에 설치된 가림막 앞에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이 망가진 채 나뒹굴고 있다. /최지은 기자

덕수궁 정문 공사가 시작된 건 2021년 5월이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에서 발주, 감독하는 공사로 조선시대에 존재했던 월대를 다시 설치하는 작업이다. 공사 부지를 둘러싼 가림막도 이때 세웠다. 이로 인해 보도를 가로지르는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 일부가 가림막 안쪽에 놓이게 됐다. 시각장애인이 점자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가벽에 부딪히는 구조가 됐다.

공사 부지를 우회하는 점자블록은 올해 초 마련됐다. 이마저도 청테이프로 고정한 미봉책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자블록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이 상태로 한 달 넘게 방치되던 점자블록은 지난 14일에야 복구됐다.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9개월 만에 바닥에 고정된 점자블록이 마련된 것이다.

점자블록 관리 부실 논란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점자블록이 중간에 뚝 끊기거나 깨진 경우, 아예 설치되지 않은 장소가 여전히 많아 시각장애인들은 불편을 호소한다. 이번과 같이 보도 상황에 변경이 발생한 경우에는 관리 공백이 더욱 커진다. 공사를 시작하거나, 불법 천막이라도 설치된 경우에는 기관 간에 ‘책임 떠넘기기’가 일어난다. 책임 공방 속에서 시각장애인들은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현행법상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공사를 진행하는 경우 보조 보행로를 반드시 설치해야 한다.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제25조 제1항에는 ‘인공구조물이나 물건, 그 밖의 시설을 신설·개축·변경 또는 제거하거나 그 밖의 목적으로 보행자 길을 점용하는 자는 보행자에 대한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보행안전통로와 안전시설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번 공사에서 점자블록 관리 의무 주체가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관련 기관 모두 말이 달랐다. 국토교통부에서는 “보조 보행로 설치를 어떤 기관이 담당할지는 주로 공사 계약을 맺을 때 결정한다”면서 “덕수궁 공사는 서울시 내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서울시 관계 부처가 알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울시에서는 “점자블록 관리는 모두 자치구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중구청 관계자는 “공사로 인해 점자블록 경로가 수정되는 것까지 구청에서 일일이 모니터링 하지 않는다”며 “공사 감독을 맡은 덕수궁관리소 측에 문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덕수궁관리소에서는 “점자블록 관리는 중구청 소관”이라고 답변했다. 다만 “이번에는 점자블록이 너무 오래 망가진 채로 방치돼 있어 덕수궁사무소에서 조치한 것”이라고 했다.

일반 도로나 횡단보도에 설치된 점자블록 관리 주체는 자치구다. 점자블록 설치와 유지·보수를 각 지역 구청 보도관리팀이 맡는다. 하지만 공사, 불법 건축물이 설치된 경우 등 예외 상황에서의 관리 규정은 없다. 자치구 내에서도 책임 소재 구분이 확실하지 않다. 한 자치구 보도 담당자는 “불법 건축물 등으로 점자블록 경로가 막힌 경우는 도로 점용을 관리하는 팀에서 불법 시설에 대한 감시의 일환으로 처리한다”고 답했다.

코로나·백신희생자 합동분향소 천막이 점자블록 위에 설치돼 있다. /최지은 기자
서울 중구 덕수궁 앞 보행로에 설치된 코로나·백신희생자 합동분향소 천막이 점자블록 이용을 방해하고 있다. /최지은 기자

지난해 7월 공포된 ‘보행안전 및 편의증진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에는 ‘보행자가 주의해야 할 시설이 존재하는 경우 시각장애인이 해당 시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점자블록을 설치할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법안에 따르면 주의가 필요한 시설이 있을 때도 점자블록 설치는 의무가 아닌 권장 사항이다. 지난 2021년 5월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점자블록 훼손 또는 이용 방해 시 과태료를 부과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국회에 계류 중이다.

책임 소재가 모호한 가운데 제 구실을 못하는 점자블록은 서울 시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14일 조선일보 업무동 입구에서 덕수궁까지 가는 길을 살펴본 결과, 400m 남짓한 이 구간에도 점자블록이 끊어지는 지점이 두 군데 더 있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인근에 설치된 코로나·백신희생자 합동분향소 천막이 점자블록 위에 서 있었다. 서울도시건축전시관 앞에 설치된 서울 공공자전거 ‘따릉이’ 보관소는 점자블록과 너무 가까이 설치된 탓에 주차된 자전거들이 점자블록을 덮고 있었다.

민원을 넣어도 개선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홍서준 시각장애인편의시설지원센터 연구원은 “점자블록이 망가졌다고 구청에 민원을 넣어도 고쳐지기까지 보통 1년은 걸린다”면서 “시각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고, 법 제도도 미비해 점자블록 관리는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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