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경제적 고통·외로움에 극단적 생각도 했지만… “이젠 완치도 꿈꿔 봅니다”

16개 생명보험사 공동출연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희귀난치성질환 의료비지원사업
뮤코다당증 앓고 있는 주호·주완 형제 가족
언제 죽냐고 묻는 친구들 전염병이라 피하는 이웃들 치료비에 가세 기울어
1인당 연간 최대 300만원 재단의 의료비 지원으로 새로운 삶의 길 찾아

“엄마, 연필을 못 잡겠어.”

판영(52·경남 사천시)씨가 주호(19)의 이상 징후를 처음 발견한 것은 아이가 5살이 되던 무렵. 글자 배우던 재미에 빠져 있던 아이가 쓰고 싶은 글자를 쓰지 못해 칭얼댔는데, 그 칭얼거림의 이유를 아는 데에만 3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별일 아니라 여겼지만, 혹시 몰라 병원에 한 번 가봤어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잘 모르겠다는 거예요. 그러는 사이에 아이 무릎이 갈수록 굽어가는 게 보였죠.”

정형외과에서 종합병원으로, 인근 지역에서 전라도·충청도까지 넓혀갔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려주는 곳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호가 7살이 되던 해에 판영씨는 의학 관련 TV프로그램을 통해 주호의 증상과 생김새가 비슷한 아이를 보고 그 길로 그 아이가 입원해 있다는 서울의 병원으로 향했다. 오랜 체증 끝에 밝혀진 아이의 병명은 ‘I형 점액다당류증(Mucopolysaccharidosis type I)’. 일명 ‘뮤코다당증’이라 불리는 병이다. 특정 효소의 결핍과 상염색체 열성 유전 등으로 발병하는 이 질환은 특이한 얼굴 모양과 성장 지연, 골격 이상 등의 증상을 보이는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자식이 희귀병에 걸렸지만, 판영씨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께 검사를 받았던 동생 주완(17)군마저 같은 병의 질환자라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앞이 보이지 않더라고요. 당시 시고모님의 암 수발을 들고 있던 터였는데 정작 내 자식들 중병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해서 목이 메었어요.”

이후 판영씨 가족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렵사리 원인은 알아냈지만 약이 없었다. 약이 개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병원 측의 말에 판영씨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 산과 들을 뒤졌다. 아이들 치료에 매달리는 사이 집안 살림이 기울어져 갔다. 판영씨가 운영하던 조그만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고 회사에 소홀해진 아빠도 이내 회사에서 쫓겨났다. 형제와 친지들은 등을 돌렸고, 이웃은 전염병자 취급을 하며 기피했다. 무엇보다 힘들었을 사람은 역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이다. 초기에는 몸도 몸이지만 마음의 고통이 더 컸단다.

주호는 “초등학교 때 애들이 ‘니 언제 죽노? 내일 죽노?’ 하면서 놀리고 왕따를 시켰어요”라고 털어놨다. 기댈 곳 없는 가족은 극단적인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자포자기한 아버지가 일가족이 탄 차를 몰고 삼천포 앞바다에 빠지려고 했던 것. 하지만 차는 가드레일에 걸린 채로 대롱대롱 매달렸다. 운명의 장난인지, 바로 그때부터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뮤코다당증을 앓고 있는 주호, 주완이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뮤코다당증을 앓고 있는 주호, 주완이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현재 주호 형제는 부족한 리소좀 효소 보충을 위해 ‘알두라자임(Aldurazyme Injection)’을 주 1회 투여받고 있다. 이는 지난 2004년 국내 임상실험에서 동생 주완이가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약품. 고가의 약품이지만, 판영씨가 내민 진료비 영수증의 환자 부담 총액은 3000원 정도다. ‘뮤코다당증’이 지난 2005년 보건복지부 희귀난치성질환센터가 분류하는 지원 대상 질환에 속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주호 형제의 치료가 효소 주사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효소 투입으로 인해 억제되는 발육을 위해 성장 호르몬 주사도 맞아야 한다. 한참 키가 커야 할 나이의 아이들에게 민감한 부분이다. 판영씨가 집에서 직접 놔주는 호르몬 주사약값은 한 달에 130만원 정도다. 공칠 때가 빈번한 아빠의 수입으로는 부담스러운 수준이지만 여기에도 도움의 손길이 존재했다. 바로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의 지원이다. 주호 형제는 작년과 올해 각각 300만원씩, 600만원을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으로부터 지원받아 호르몬제 구입비를 충당하고 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2011년부터 전국 60여개 전문병원과 함께 희귀난치성 질환자를 위한 의료비 지원사업을 펼쳐왔다. 대상은 최저생계비 기준 250% 이하의 가구로 1인당 연간 최대 300만원까지 지원한다. 특히 정부 지원 대상인 134종의 질환은 물론 미지원 질환 541개까지 지원 범위에 포함하고 있어 정부 지원의 복지 사각을 메우고 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관계자는 “대상자가 의료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신청 기준은 현재 희귀질환 의료비 지원기관 중 가장 넓으며, 지원이 어려웠던 성인환자까지 가능하다”면서 “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시 필수적인 선택진료비와 특수검사비 같은 비급여 부분까지 지원하는 것도 큰 강점”이라고 덧붙였다.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은 정서적 외로움과 신체적 아픔, 그리고 경제적 위기 등 겹겹의 고통과 함께한다. 정부 지원의 대상 질환을 확대하고, 희귀 약품의 연구·개발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호는 가장 힘든 것이 뭐냐는 질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병원 때문에, 수업 진도를 못 따라가는 것”이라고 씩씩하게 말했다. 평범한 고3의 답변이다. 완치를 자신하느냐는 질문에는 “당연하죠. 효소가 부족해서 생긴 병인데, 효소를 보충하고 있으니까”라고 대답했다. 주호에게 투여되고 있는 것은 단지 효소만이 아니었다.

“10년 이상 희귀질환을 간병하며 배운 게 있어요.”

판영씨는 말한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1% 확률이라도 있으면 끝까지 가야죠. 그럼 언젠가는 밝은 희망이 보일 거예요. 우리처럼요.”

희귀병을 앓는 왕따 아이도, 절망의 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던 엄마의 모습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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