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월)

이런 연예기획사 보셨나요?

시각장애인 아티스트 기획사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지난 6월 29일 저녁 6시 반, 서울 동대문구 두산타워 앞을 지나던 사람들의 발길이 멈췄다. 금세 모여든 사람들은 무대를 에워쌌다. 외국인 관광객도, 쇼핑백을 든 시민들도 눈길은 한 곳을 향했다. 즉흥환상곡을 재즈로 편곡해 화려하게 연주하는 한 남자. 그는 시각장애인 정명수(31)씨였다. 한 곡이 끝나자, 무대 위로 두 명의 아티스트가 올라왔다. 시각장애인 아티스트 그룹 ‘더블라인드(The Blind)’의 멤버 김국환(32), 이현학(31)씨였다. 선글라스를 쓴 이들은 해리포터 주문으로 유명한 곡 ‘타란탈레그라(주문에 걸리면 춤을 추게 된다는 내용)’에 맞춰 신나는 안무와 노래를 선보였다. 관객들이 하나 둘 머리 위로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준비된 공연이 끝나자 보컬 이현학씨가 무대 앞으로 나왔다.
“여러분 즐거우셨나요? 위 아 더 블라인드(We are the Blind)! 저희는 모두 시각장애인입니다.”

 
'더블라인드'의 콘서트 현장_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제공
‘더블라인드’의 콘서트 현장_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제공

◇재능 많은 6인이 뭉쳤다···시각장애인의 ‘좋은 이웃’으로 

 

소속 아티스트들이 전부 시각장애인들로 구성된 기획사가 있다. 바로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이곳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은 총 6. 그룹 더블라인드의 멤버 3명과 자매 듀오 ‘좋은이웃’, 최초의 시각장애인 앵커(KBS) 이창훈씨 등이다. 인원은 적지만 경력은 화려하다. ‘좋은이웃’의 자매 듀오는 KBS ‘인간극장’과 SBS ‘스타킹’에 출연해 유명인이 됐고, 이현학씨는 JTBC ‘히든싱어’의 왕중왕전까지 진출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아 현재 KBS 3라디오(장애전문 채널)에 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더블라인드의 재즈 피아니스트 정명수씨 역시 ‘스타킹’과 Mnet ‘슈퍼스타K’ 시즌3 등에 출연해 뛰어난 연주 실력으로 매스컴의 이목을 끌었고, 김국환 대표 또한 2009년 ‘슈퍼스타K’ 시즌1에서 ‘이효리를 울린 목소리’로 보도되는 등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이창훈 전 앵커의 경우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에서 방송촬영, 홍보, 스케쥴 관리를 지원한다.

이들이 한자리에 뭉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룹 더블라인드의 보컬이자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의 대표를 맡고 있는 김국환씨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시각장애를 이해하고 지원해줄 수 있는 회사는 드물어요.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들끼리 서로 챙겨주는 회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이 자신의 재능에 맞는 직업을 가지고 자립하는 것이 우리 기획사의 비전입니다.”

김 대표는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사업 등 다른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도 노래만은 계속했다. 단순한 취미였지만 다수의 가요제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슈퍼스타K 시즌 1에선 실력과 감성을 겸비한 가수로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를 정도였다. 김 대표는 “하루 아침에 유명인이 되면서 얼떨떨했다”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반도 내고 음악활동을 시작했고, 그때의 경험이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의 기반이 됐다”고 덧붙였다.

김국환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대표/장석현 작가 제공
김국환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대표/장석현 작가 제공

◇특수교육의 비전 품은 청년의 꿈, 실현되다

좋은이웃의 시작은 2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특수교육에 비전을 품고 있던 대학생 김요(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설립자)씨는 봉사자들을 모집, 시각장애 아동들과 캠프를 떠났다. 캠프 참가자 중엔 김국환 대표를 포함한 현재 더블라인드 멤버, 듀오 ‘좋은이웃’의 시각장애인 자매 손혜림(31)씨와 손혜선(28)씨도 포함돼있었다. 자매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청년은 “10년 뒤 너희들의 목소리가 담긴 앨범을 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5년 자매 듀오 ‘좋은이웃’의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시각장애인이면서 실력 있는 아티스트들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공연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자매의 활약에 힘입어 2012년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가 회사로 설립됐다. 현재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가 올리는 공연은 매년 40여회. 자체적으로 올리는 공연을 제외한 외부 요청 공연만 따졌을 때의 횟수다. 설립자 김요씨는 김국환씨에게 대표직을 맡기고 교회 사역을 위해 라오스로 떠났다. 지난 5년 간 대표로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를 이끌어온 김대표는 “(김요씨가) 라오스에서도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밴드 ‘라오블라인드’를 결성하셨단 소식을 들었다”면서 “그 분의 비전을 이어가기 위해 아티스트들도 똘똘 뭉쳐 실력을 키워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명수는 서울예대에 수석 입학한 친구에요. 저는 명수가 우리 세대 중에 가장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현학이도 라디오 프로그램을 안정감 있게 끌어갈 만큼 재능이 있어요. 연예인 진행자들도 인정할 정도였으니까요(웃음).”

◇시각장애인이 여는 장애 이해 캠프···편견을 깨다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는 설립 이래로 특별한 캠프를 진행하고 있다. 바로 ‘장애 이해 캠프’다. 시각장애인이 스태프가 되고, 비장애인이 캠프 수혜자가 된다. 학교를 방문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장애 이해 콘서트’를 열어, 공연은 물론 개개인의 스토리를 담은 강연도 진행한다. 반응은 폭발적이다. 공연이나 캠프가 끝나면 아티스트들에게 몰려와 “멋진 공연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 시각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소통해야할 지 깨달았다” 등 피드백이 이어졌다.

“우리가 받은 배려와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었어요. 20년 전, 비장애인인 김요 대표가 시각장애인인 우릴 위해 캠프를 열어줬다면, 이젠 우리가 직접 비장애인을 위한 캠프와 공연을 열어주자며 의기투합했죠.”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도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가 가진 비전이다. 이를 위해 지난 3월엔 배우 구혜선과 더블라인드가 함께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 곡명은 ‘썼다 지웠다’로, 시각장애인 남성이 비장애인 여성에게 고백하기 위해 점자 편지를 쓰는 장면을 담았다. 실제 점자를 타이핑하는 소리를 악기로 활용했고, 싱글 앨범 자켓에도 점자를 배우고 싶어하는 비장애인들을 위해 점자 표기법을 함께 수록했다. 김 대표는 “평소 선행을 많이 하는 배우 구혜선씨를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화 행사에서 만났다”면서 “혹시 곡 작업을 함께 할 수 있느냐는 제안에 선뜻 응해주셨다”고 설명했다. 배우 구혜선과 더블라인드가 함께 작업한 곡 ‘썼다 지웠다’는 음원 앱 ‘멜론’에서 감상할 수 있다. 그는 “가수 스티비원더가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의 스티비 원더가 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하며 시각장애인을 향한 장벽과 편견에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시각장애인에게 주어진 직업의 선택지는 매우 좁습니다. 대부분 안마사가 되죠. 자신의 재능과 적성과 상관없이 시각장애인에게 허락된 몇 개의 직업군을 선택해야만 하는 현실과 편견을 깨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가 해야 할 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들에게 길거리 공연은 아직 어색하다. 관객이 누구이고 얼마나 반응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청중의 무관심 속에서 치러지는 공연이 가장 힘들다고 했다. “공연은 즐겨야 하는 거잖아요. 저희는 청중과 소통할 수 있는 공연이 가장 좋습니다.”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가 진행하는 장애이해체험 캠프의 현장 사진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제공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가 진행하는 장애이해체험 캠프의 현장 사진 /좋은이웃엔터테인먼트 제공

김 대표는 복지관뿐만 아니라 공연장에서도 얼마든지 시각장애인을 볼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청중과 친밀하게 소통하는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는 것. 그의 꿈처럼 시각장애인 아티스트들의 활약은 앞으로 더 많은 ‘좋은 이웃’들을 불러오지 않을까.

오다인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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