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목)

“해외 아동 위해 달려온 27년… 이젠 국내 아동 위해 힘쓸 것”

박동은 한국아동단체협의회 회장 “아동복지단체 직원의 처우 개선 필요해”

다른 분야도 그렇듯, NGO 영역에서도 리더들은 대부분 남성이다. NPO 리더 모임에서 여성이라곤 박동은 전 유니세프 부회장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지난 4월, 27년을 몸담았던 유니세프를 떠난 박 전 부회장은 최근 아동단체협의회 회장이 됐다. 동아일보 공채 1기 여기자 출신으로, 대한가족계획협회 홍보부장을 거쳐, NGO인 유니세프의 사무총장까지 55년의 활동 경력을 밑바탕 삼아, “열악한 재정상황을 가진 아동단체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하겠다는 심정”이라는 게 취임 소감이다. 부임한 지 2개월, 박 전 부회장을 만나 국내 대표 모금단체를 이끌어왔던 역사와 국내 아동단체들의 현황 등을 물었다.

(좌측 사진) 박동은 한국아동단체협의회 회장이 2007년 4월 유니세프 사무총장으로 근무할 당시 안성기 친선대사와 우간다 카멩키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 안성기씨는박 회장의 권유로 유니세프 친선대사직을 수락했다. /박동은 회장 제공 (우측 사진) 우간다 글루지역 여성 직업 교육장을 방문한 박동은 회장. /박동은 회장 제공
(좌측 사진) 박동은 한국아동단체협의회 회장이 2007년 4월 유니세프 사무총장으로 근무할 당시 안성기 친선대사와 우간다 카멩키 마을을 방문했을 때의 사진. 안성기씨는박 회장의 권유로 유니세프 친선대사직을 수락했다. /박동은 회장 제공 (우측 사진) 우간다 글루지역 여성 직업 교육장을 방문한 박동은 회장. /박동은 회장 제공

―27년을 몸담았던 유니세프를 완전히 떠났다. ‘유니세프의 산증인’으로 불릴 만큼 오랜 기간 함께해 왔는데,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1988년 7월 초 서울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주한 유니세프 대표부에 공채를 통해 대외담당관으로 입사했는데, 이후 한국 유니세프를 ‘선진국형 민간 기구’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5년 반이 지난 1993년, 주한 유니세프대표부가 철수하고 한국인을 지도 체제로 하는 유니세프 한국위원회가 탄생했다. 1994년 초대 사무총장에 임명된 후 18년간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36개국 유니세프 국가위원회 중 우리나라가 지원금 규모 4위를 기록한 게 가장 뿌듯하다. 어버이날인 지난 5월 8일, 송상현 회장님이 사비를 털어 성대한 고별 만찬을 열어줬다.”

―출범 첫해 지원금이 350만달러(41억원)였고 후원자가 5000명이었다. 2014년엔 지원금이 9000만달러(1000억원)이고, 후원자가 38만명이 되었다. 초창기 시작할 때, 이렇게 기부가 폭증할 줄 예상했었나.

“처음 유니세프에 발을 내디뎠을 때, 정말 막막했다. 학자 출신의 외국인 대표가 던진 첫마디는 ‘한국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울창한 숲이다. 당신이 할 일은 나무를 베어내고 길을 만드는 것이다’였다. 6·25 이후 40여 년 동안 UN과 선진국들의 원조에 의존해 도움을 받는 데만 익숙해온 한국에서 ‘과연 기금을 모아 해외 어린이를 돕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고민이었다. 주위에선 ‘한국에도 어려운 아이들이 많은데 왜 외국 아이들을 도우려고 하느냐’ ‘모금을 하려면 군 장성이나 재벌 총수를 끌어들여야 한다’ ‘정치권의 실력자를 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의견들이 무성했다. 이런 와중에 독일, 스위스, 캐나다, 일본 등 선진국을 방문한 후 많은 것을 배웠다. 새로 탄생시킬 유니세프 한국위원회는 재벌도, 정치권력자도 아닌, 자원봉사를 기반으로 설립되어야 하고, 시민사회와 개인에게 호소하는 순수 민간 기구여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

―기부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던 시기에 어떻게 유니세프 후원자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나.

“3, 4년간 정말 열심히 찾아다녔다(웃음).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유니세프문화예술인클럽, 언론인클럽, 사립초등학교 교장클럽, 아동권리를 위한 법률가클럽, 어머니클럽 등 5개 후원 클럽이었다. 초창기에 실시한 현지 방문 프로그램도 큰 몫을 했다. 문화예술인클럽에서 활동하던 안성기, 고(故) 박완서씨를 모시고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 난민촌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두 분은 친선대사직을 수락하고 열심히 활동하셨다. 고(故) 앙드레김은 1994년 자선패션쇼를 시작으로 유니세프를 돕는 연말 디너쇼를 14회나 열어주었고, 그 후 앙드레김이 이영애, 원빈, 이보영, 김래원씨 등을 유니세프 활동에 참여하게 이끌어줬다.”

―유니세프 재직 기간 중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이나 성과는 무엇이었나.

“창립 한 달 후인 1994년 2월 아시아나항공과 협약을 맺고 시작한 기내 모금사업인 ‘체인지 포 굿(Change for Good·좋은 일에 잔돈을)’ 사업이다.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고(故) 권오기 선배님이 미국 여행을 할 때 탑승한 ‘아메리칸 에어라인’에서 기내 식판에 여행하다 남은 동전을 넣는 봉투를 놓고 음식을 서브하더라는 정보를 주었다. 한국 항공사하고도 한번 시도해 보라고 권유해서 아시아나항공사와 4~5개월의 협의를 거쳐 성사시킨 쾌거였다. 여행객으로부터 남은 잔돈을 모아 어린이를 돕자는 취지로 시작한 사업은 2014년 총모금액이 100억원을 넘을 정도로 커졌다.”

―수많은 기부자들을 만났을 텐데, 가장 기억에 남는 기부자가 있는가.

“2010년 10월, 100억원이라는 큰 기금을 기부한 박양숙 여사다. 교사 출신인 박 여사는 젊었을 때 교구 개발로 특허권을 얻어 재산을 모으신 분으로, 드러내지 않고 많은 기부를 해오셨다. 유니세프에 100억원을 기부하면서 이 기금을 꼭 개발도상국 아동 교육에 써 달라고 당부하셨다. 그 뜻에 따라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시아 10개국의 초등교육을 지원하는 ‘스쿨 포 아시아(Schools for Asia)’ 기금을 설립해 운영 중이다.”

―한국 NGO들의 개인 모금액이 전 세계적으로 톱 5위권 안에 속하지만, 대부분 해외 아동 결연에 몰려있는 등 기부 영역이 불균형하다는 지적도 있다.

“기금 모금사업은 브랜드와 그 사회의 분위기, 유행을 쫓아간다. 유니세프에서 절대빈곤 속에서 고통받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고 계속 캠페인을 벌여왔는데, 이 같은 모금이 해외 아동에게만 몰리는 이유는 2000년 9월 세계 정상들이 UN에 모여 공표한 새천년개발목표(MDG)의 영향도 크다고 생각한다. MDG는 ‘지구상의 절대빈곤을 타파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범세계적인 8개 목표의 성취를 2015년까지 하도록 되어있다. NGO들이 연합해 국내 아동 구호의 가치를 창출하고 후원자들이 국내 아동을 위한 나눔사업에도 관심을 가지도록 자체적인 캠페인과 많은 노력이 더해져야 할 것 같다.”

―한국아동단체협의회는 어떤 곳이며, 이곳의 회장을 맡은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아동단체협의회는 1991년 10월 우리 정부의 유엔아동권리협약 가입을 계기로 국내 아동권리를 보다 체계적으로 강화시키기 위해 설립됐다. 2004년 아동의 참여권을 높이기 위해 시작한 대한민국아동총회는 10여년의 역사를 쌓았다. 44개 아동 관련 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회원단체 중엔 유니세프, 월드비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엔젤스헤이븐, 서울YMCA 같은 한국 굴지의 NGO 등도 있지만 재정이 열악한 단체들도 상당수 있다. 추진해야 할 일은 많지만 사무국의 재원이 충분하지 않아 소수의 직원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자원봉사 정신으로 일하고 있다.”

―앞으로 어떤 활동에 주력할 계획인가.

“회원단체인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와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와 함께 아동복지단체 종사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을 9월 1일부터 한 달간 전개한다. 오는 10월에는 최근 저조한 국내 입양의 활로를 찾기 위해 국내 입양 장려 캠페인도 계획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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