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1일(금)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잘하는 유럽 CSV(공유가치 창출) 관심도 없어 한국만 유독 열광”

마틴 노이라이트 교수 인터뷰

CSV 좋은 사례 언급되는 네슬레
코코아 생산 과정 아동 문제 모른 척
‘공유가치’ 내세우며 ‘책임’ 흐리는 셈
막스앤스펜서, 全 제품을 유기농으로 아동 노동·최저 임금도 꼼꼼히 따져
다수 韓 기업, 책임보다 수익 중시…
환경·노동 외면하면 언젠간 무너져

주선영 기자
주선영 기자

마틴 노이라이트(Martin Neureiter·사진) 오스트리아 빈 교수는 사회적 책임의 국제표준인 ISO 26000 제정 당시, 기업파트 좌장 역할을 맡은 CSR(기업의 사회적책임) 전문가다.

현재 전 세계 42개국에 사무실을 두고, 기업과 정부 등에 CSR 컨설팅을 진행하는 CSR 컴퍼니(CSR Company) 대표이기도 하다. 지난 14일, 국회CSR정책연구포럼과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공동으로 주최한 ‘CSR vs. CSV 대토론회: 사회책임과 공유가치창출의 혼동, 기업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참여하기 위해 방한한 마틴 교수를 만났다.

―우리나라에선 CSV(Creating Shared Value·공유가치창출)가 마치 CSR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처럼 회자되고 있다. 많은 기업이 기존의 CSR 부서를 CSV로 변경하기도 했다. CSV와 관련해서 세계적으로는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나.

“CSV에 관한 노이즈가 한국만큼 심한 곳은 없다. 유럽에선 CSV와 관련한 아무런 논의가 없다. 오히려 CSR 법제화 논의가 심화되고 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기업들이 ‘CSV’라는 이름을 앞세워놓고, 생산 과정은 나 몰라라 하기도 한다.

CSV의 좋은 사례로 매번 언급되는 네슬레는, 코코아 생산 과정에서 아동 노동 문제에 대해 아직도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환경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던 코카콜라는 인도 공장에 ‘코카콜라 생산에 사용한 물과 같은 양을 지역사회로 환원하겠다’며 빗물 정수 시스템 등을 설치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하지만 내 학생 중 한 명이 인도 공장에 직접 방문했을 때 관련 시설은 쓰이지 않아 잡초가 자란 지 오래였고 코카콜라 측은 답변을 거부했다.

CSV의 주장을 단순화하면,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가 사회에도 좋고 기업에도 돈벌이가 되면 제일 이상적이라는 거다. 공유 가치라고 말하지만, 기업의 가치란 결국 ‘돈’이기 때문이다. CSV는 기업이 마땅히 고민해야 할 ‘책임’ 부분은 흐리면서, ‘돈 버는 것’을 강조하는 마케팅 측면이 강한 용어다.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게 장기적으로 기업에도 이익이 된다는 건 CSR에도 이미 포함되어 있는 개념이다.”

―많은 기업이 경기가 좋지 않아 CSR을 이행하는 게 어렵다고도 이야기한다.

“CSR을 사회공헌이나 자선 행위로 착각하고 ‘비용’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CSR과 사회공헌은 분명히 다르다. 지역사회 보육원 등에 우르르 몰려가 사진을 찍어 대대적으로 홍보하거나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는 등, 소비자에게 ‘좋은 기업’ 이미지를 심으려는 기업들이 많다.

앞에선 좋은 기업 이미지를 만들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환경을 파괴하거나 임직원들을 기준 미달 환경에서 일하도록 한다면 기업을 둘러싼 사회·환경도 결국은 무너져내린다. 그 속에서 기업만 잘 생존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제는 소비자들도 어떤 기업이 눈속임하는지 안다. CSR을 적용해야 한다는 건, 기업이 자신이 사회·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해야만 기업도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하다는 거다. CSR은 단기적인 경기 흐름에 좌지우지돼선 안 된다.”

―CSR이 기업 활동에 도움이 되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CSR을 잘 이행하는 게 기업에 어떻게 도움이 되나.

“나는 90년대에 6년간 오스트리아 국회에서 일했다. 당시 우리는 이산화탄소 배출, 화학제품 등 환경과 관련 법과 규제들을 제정했다. 당시 많은 기업이 법이 통과된다면 기존 직원들을 다 해고하고 다른 나라로 옮겨갈 것이라고 압박했다.

결과적으로 옮겨간 기업은 두 곳 정도였다. 다른 나라에서도 규제들이 만들어지는 추세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기업들은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조직을 개편하고 기술을 개발했다.

그 결과, 오늘날 많은 오스트리아 기업은 환경공학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환경공학 분야의 일자리가 자동차 제조업 일자리보다도 많다. 제대로 한다면, CSR은 비용이라기보단 장기적인 ‘투자’다.”

―CSR을 잘 이행하는 기업 사례를 소개해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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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70여 개국에 체인이 있는, 130년 역사의 영국 의류·식품 유통 기업 막스앤스펜서(Marks & Spencer)가 좋은 예다. 막스앤스펜서는 90년대 들어 ‘할머니들만 입는 브랜드’라고 여겨져, 거의 파산 위기까지 갔다. 1997년 새로운 경영진은 CSR 원칙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전략 ‘플랜 A(Plan A)’를 세웠다.

옷과 음식 모든 라인을 오가닉으로 바꿨다. 하도급 공장과의 관계도 바꿨다. 싼 가격으로 승부를 보는 많은 의류 업체는 하도급업체와 계약할 때 가격 흥정을 먼저 하는 데 반해, 막스앤스펜서는 내부적으로 윤리적 구매(Ethical Sourcing) 부서를 만들고, 가격 협상 이전에 ‘아동 노동’ ‘최소 임금’ ‘건물 최소 안전 규격’ 등을 우선 확인하도록 했다. 적정한 기준을 통과한 업체와만 거래하기 시작했다.

안정 궤도에 오르자, 지난해부터는 공급망(supply chain) 내의 상위 100개 하도급업체가 ISO 26000을 도입하도록 했다. 특정 감사 시기에만 잘하는 것처럼 눈속임하고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최근 인도에 있는 오리엔탈 크래프트(Oriental Craft)라는 공급업체에 다녀왔는데, 직원만도 3만2000명에 달하는 규모였다. 하도급업체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돕는 게, 장기적으로 막스앤스펜서의 매출과 기업 이미지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CSR 관련, 국내 기업들에 조언 부탁한다.

“독일 국제개발협력단(GIZ)의 요청으로, 현재 독일·유럽 시장에 진출하려 하는 아시아 기업들이 CSR을 적용하는 걸 돕고 있다. 중국, 말레이시아, 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온 기업들인데, 전자·의약품·의류·자동차 부품·광물 등 분야도 다양하다.

거의 모든 기업이 ‘가부장적’으로 운영된다. 오너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식이다. 처음엔 CSR을 단순히 사회공헌이나 마케팅으로 이해하지만, 운영 방식이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하면 못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러한 방식으로는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의사결정 과정은 투명해야 하고, 주주·소비자 등 다양한 이해 관계자가 포함돼야 한다. 환경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도 예민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ISO 26000 지표가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기업뿐 아니라 국가도, 비영리단체들도 사회적 책임을 인지해야 한다. 두바이 정부는 2008년부터 모든 부처에서 ISO 26000에 기반을 둬 CSR을 도입했다. 현재 부처 산하 공공기관들과 공기업에 CSR 적용 과정에 있다. 기업에만 잣대를 들이대는 게 아니라, 솔선수범해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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