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Cover Story] 선착순 달리기에 내몰린 아이들… 지금 필요한 건 성찰과 쉼

덴마크 국제시민대학 쇠렌 교장에게 덴마크식 교육을 묻다

나이도 국적도 다른 학생 62명이 모여
공동체 생활하기·다른 문화 이해하기 등
정해진 커리큘럼 없이 배우고 싶은 것 공부

한국선 아이들이 꿈꿀 수 있는 ‘여백’ 너무 적어
경쟁보다 관계 맺기… 성적보다 ‘나’를 배워
다양한 삶의 기회 마련해줘야

퀴즈 하나. 2년 연속 UN 발행 ‘세계행복보고서’ 국가별 행복지수 1위, 나치 독일 치하 유럽에서 유일하게 유대인을 내치지 않은 나라, 평균 투표율 80%에 달하는 나라는? 정답은 ‘덴마크’다. 이 나라를 이끄는 가장 큰 힘은 바로 교육이다. 덴마크에는 170년 역사를 지닌, 생각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시민학교가 65곳이나 된다. 93년의 역사를 지닌 ‘국제시민대학'(IPC·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은 가장 대표적인 시민학교 중 하나다. 1921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망가진 세계에 다른 나라와 문화를 가진 사람이 모여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탄생한 곳이다. 지난달 26일,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센터’에서 기획한 ‘제6회 서울청소년창의서밋’ 참가를 위해 방한한 쇠렌 라우비에르(Soren Launbjerg) 교장을 만났다. 편집자 주


1. 제6회 서울청소년창의서밋 개막식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쇠렌 라우비에르 국제시민대학 교장의 모습. 덴마크에서 전문 가수로도 활동했었던 영국 록그룹 슈퍼트램프의 '로지컬 송(Logical Song)'을 열창하기도 했다. 노래는 지혜와 감성이 빠진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 /하자센터 제공 2. 덴마크에 위치한 '국제시민대학'의 모습.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제공
1. 제6회 서울청소년창의서밋 개막식에서 발표를 하고 있는 쇠렌 라우비에르 국제시민대학 교장의 모습. 덴마크에서 전문 가수로도 활동했었던 영국 록그룹 슈퍼트램프의 ‘로지컬 송(Logical Song)’을 열창하기도 했다. 노래는 지혜와 감성이 빠진 교육을 비판하는 내용. /하자센터 제공 2. 덴마크에 위치한 ‘국제시민대학’의 모습.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제공

“한마디로 자유로운 배움의 공간입니다.”

‘학교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해달라’는 질문에 쇠렌 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는 현재 30개국, 62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아홉 청춘도, 영국에서 날아온 76세 노부인도 여기선 모두가 학생이다. 무용과 사진, 드라마, 음악, 세계 정치와 종교, 지역별 문화와 철학 등 30여 개의 커리큘럼이 있는데, 자신이 원하는 과목을 시간표를 짜서 들으면 된다. 반드시 이수해야 하는 커리큘럼도 없고, 시험을 치거나 성적을 매기는 일도 없다. 모든 것이 ‘자율’이다.

“4~6개월간 머물면서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공부하면 됩니다.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온전히 ‘나’를 탐구하고 발견하는 의미에서 여러 시도와 도전을 하는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에서부터,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건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건 무엇이고, 또 못하는 건 무엇인지,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은 어디에 가치를 두고 내려야 하는지,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을 하며 늙고 싶은지…. 사실 이런 것들이 다 어릴 때 답을 찾을수록 좋을 질문이에요. 하지만 많은 사람이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라든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다’고도 하죠. 아니면 너무 늦게 깨달아요. 짜인 틀에 따라 목적지만 바라보고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보니, 정작 그 길을 달리는 나 자신이나 고속도로 바깥의 다른 세상에는 제대로 눈길을 줄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아이들이 스스로 가치를 깨닫고 주체적으로 삶을 설계해나가도록, 삶의 작은 ‘여백’을 마련해주려는 겁니다.”

◇자유로운 배움의 공간, 인생에 ‘여백’을 던지다

관계 맺기, 공동체 생활하기, 다른 문화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국제시민대학에서의 여백은 ‘나를 아는 것’ 외에 책에서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담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도 남다르다.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교사들도 평일엔 캠퍼스에 남아 있어요. 교사와 학생들이 어우러져 친구처럼 지냅니다. 자유로운 토론도 많고 함께 공유하는 순간이 많아요. 몇 년이 지나서 정확한 이름을 잊더라도, 몇 가지 꼭지만 주면 어떤 친구고 무슨 고민을 했었는지 금세 기억이 납니다.”

사실 덴마크에서 국제시민대학만이 유별난 학교인 건 아니다. 이곳은 덴마크에 있는 65개의 ‘시민학교(Folk High School)’ 중 하나다. ‘시민학교’란 고등학교를 졸업한 만 17세 이상이면 누구나 다닐 수 있는, 성인을 위한 ‘대안 교육과정’이다. 나이 상한선도 없어 누구라도 언제든 4~6개월의 쉼과 배움의 시간을 갖는 게 가능하다. 이런 시민학교가 처음 만들어진 건 어떤 배경에서였을까.

“170년 전인 1844년,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정치가였던 ‘그룬트비(Grundtvig)’에 의해서 시민학교가 처음 만들어졌어요. 당시 덴마크는 프러시아 전쟁에서 패해 영토까지 빼앗긴 상황이었고, 국민의 대부분은 농민이었죠. 그룬트비는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국민을 계몽하는 게 중요하다고 봤어요. 시민학교는 국민 계몽 교육 기관이었던 셈이죠.”

투표하는 법에서부터 토론하는 법, 사회 전반에 대한 교육에 이르기까지, 농민을 ‘민주 시민’으로 키워내기 위한 교육이 이어졌다. 결과는 상당했다. 시민학교가 만들어진 지 5년 만인 1849년, 덴마크에선 절대왕정 통치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덴마크 민주주의와 시민학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쇠렌 교장은 “시민이 스스로에게 가치를 부여하고 자신의 행복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시민학교는 덴마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서의 대안교육이란 공교육에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교육 제도를 거부하는 학생이 찾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에, 막상 졸업 이후 사회에 진입할 때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는 경우가 많다. 덴마크에선 이런 부정적 선입견은 없을까. 쇠렌 교장은 “오히려 그 반대”라고 했다.

“기업에 입사지원서를 낼 때 시민학교에 다닌 이력이 있으면 되레 플러스 요소로 작용해요. 본인 스스로에 대해 많이 생각해본 경험이 있다는 걸 뜻하니까요. 굳은 결심을 내린, 동기부여된 지원자일 것이란 생각에서죠. 덴마크에서는 대안교육과 공교육이 서로 상충하는 게 아니라 굉장히 밀접하게 연계돼 있어요. 여러 가지 옵션 중에 원하는 걸 선택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고요.”

실제로 덴마크에는 시민학교 외에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안교육 ‘옵션’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다. 중학교 졸업 시기 아이들을 위해선 시민학교의 중학교 버전인 ‘애프터스쿨(After school)’도 마련돼 있다. 어린 나이부터 마음만 먹으면 꽉 짜인 공교육 경로에서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는 셈이다.

“덴마크에서는 대안학교를 세우는 것도 굉장히 자유롭습니다. 어떤 단체에서 대안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해 덴마크 교육부의 승인을 받으면, 이후 80%의 정부 지원이 바로 이뤄져요. 그만큼 교육 영역이 자유롭기도 하고, 공교육 체계만큼이나 대안교육 체계가 인정받고 지원받는 형태입니다.”

쇠렌 교장의 눈에는 과연 한국의 교육 체계가 어떻게 비쳤을까.

“교육엔 숨통이 틔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경쟁 대신 관계 맺기를 배워야 하고요. 성적을 잘 받기 위한 공부보다는 나를 알아가는 수업이 훨씬 더 귀중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아이들이 숨 쉴 공간도, 다른 꿈을 꿀 여백도, 관계 맺고 어울리는 법도 배울 기회가 너무 적은 듯 보여요.”

그는 “아이들에게서 생각할 기회나 시간을 앗아가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제 생각에는 많은 부모님이 지금의 교육 체계에 아주 만족한다기보다는 시스템의 문제이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요.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한다면, 혹은 주변을 둘러본다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다른 길’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부모님들이 이러한 시스템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막아주지 않으면, 누가 보호해줄 수 있겠습니까.”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