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에 일생 바친 90세 과학자… “과거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

[인터뷰] 한상기 식물유전육종학 박사

국내 1세대 식물유전유종학자
아프리카 주식 ‘카사바’ 개량

식량난·기근 해결 노력에
‘농민의 왕’ 칭호까지 얻어

은퇴한 아흔 살 과학자의 집에 들어서자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방에는 서류철과 도서가 빽빽하게 쌓여있었다. 거실 중앙 소파와 책상에는 수십년은 된 듯한 문서와 여권이 놓여 있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마중 나온 한상기(90) 박사는 “오랜만에 손님이 왔다”며 웃었다.

한 박사는 국내 식물유전육종학자 1세대다. 서울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조교수로 있던 1971년 농과대학 교수직과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연구소 초빙 제안을 뿌리치고 돌연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있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로 향했다. 아프리카 전역이 기근에 허덕인다는 소식을 듣고 ‘식량난을 해결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꼈다고 한다. 당시 나이 38세였다.

그는 23년간 아프리카에 머물며 IITA에서 아프리카인의 주식인 카사바·얌·고구마 등 구근작물과 식용바나나 등을 개량했다. 그가 개량한 카사바는 아프리카 41국에 보급됐고, 고구마 품종은 66국, 얌은 21국, 바나나는 8국에서 재배되고 있다. 특히 카사바 신품종은 지난 50년간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대한 저항성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10일 만난 한상기 박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아프리카행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호 C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0일 경기 수원에 있는 자택에서 만난 한상기 박사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아프리카행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김정호 C영상미디어 기자

지난달 20일 출간된 자서전 ‘작물보다 귀한 유산이 어디 있겠는가’에는 아프리카 식량난 해결을 위해 일생을 바친 우여곡절이 담겼다. 한 박사는 나이지리아 이키레읍의 왕으로부터 ‘세리키 아그베’(농민의 왕)라는 칭호와 함께 추장으로 추대됐다. 1982년에는 영국 기네스 과학공로상과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영국 왕실은 그를 생물학술원 명예회원으로 모셨고,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고문으로 임명했다. 작년에는 농촌진흥청에서 주관하는 ‘제2회 농업기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도 했다. 국내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성과가 실렸다.

지난 10일 경기 수원에 있는 자택에서 은퇴한 과학자를 만났다. 그는 양쪽 귀에 보청기를 걸고 자리에 앉자마자 신문을 집어들었다. 나이지리아 국영지 데일리타임즈(Dailt Times)의 1976년 11월 1일자 1면 기사였다. 기사의 제목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가리(카사바 가공 음식)가 더 많아졌다’였다. 병충해와 바이러스에 강한 내병성 카사바를 IITA의 한상기 박사가 개량해냈다는 내용이었다.

교수직 제안 뿌리치고 선택한 나이지리아행

-한국인에게 ‘카사바’라는 작물은 익숙치 않습니다.

“요즘은 카사바가 한국 소주나 라면의 원료로 많이 쓰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 당시 카사바는 아프리카인의 주식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에게 익숙한 작물이 아니었어요.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 쓰이는지도 몰랐죠. 그런데 IITA 부소장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아프리카 식량난이 심각하니 나이지리아로 와서 카사바 품종 개량 연구를 해달라는 요청이었죠.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 제가 이 외침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서울대 교수직과 케임브리지대 초빙 기회를 포기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나요?

“없습니다. 당시에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IITA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식물육종연구소에 갈 수 있는 두 가지 기회가 한꺼번에 찾아왔기 때문이죠. 저명한 교수들이 모인 케임브리지냐, 식량난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냐. 우선 나이지리아에 갓 설립된 IITA에 먼저 가보고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영국에 가려고 했지요. 나이지리아를 경유하는 런던행 비행기표를 구해 서울 김포에서 홍콩-태국 방콕-인도 뭄바이-예멘 아덴-에티오피아 아디스바바-케냐 나이로비-우간다 엔테베를 거쳐 나흘 만에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어요. 다음날 자동차로 1000km를 달려 IITA에 도착했죠. 당시 연구소가 완공된 건 아니었지만, 미국 포드재단과 록펠러재단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런지 서울대보다 시설이 좋았어요.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가 치솟더라고요. 그래서 영국행을 포기하고 나이지리아에 머물게 됐죠.”

-병충해와 바이러스에 강한 품종을 어떻게 개량했나요?

“우선 나이지리아 전역을 돌면서 재래종 카사바 종자를 수집했어요. 그리고 브라질에서 카사바 야생 근연종을 들여왔죠. 브라질은 카사바의 원산지라 바이러스와 병충해에 강한 야생종도 재배하고 있었어요. 그 후에 나이지리아 재배종과 브라질 야생종을 교배하고 내병성을 검정했죠. 여러 환경 조건하에서 수천 개의 계통을 시험 재배해봤더니 내병성이 지속되고 수량이 2~3배 많은 계통을 선발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계통을 더 많이 증식해서 농민들에게 보급했죠.”

한상기 박사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23년간 근무하는 동안 여권을 8번 재발급했다. 당시 여권 재발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종이를 여러장 덧대어 사용하기도 했다. /김정호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한상기 박사는 국제열대농학연구소(IITA)에서 23년간 근무하는 동안 여권을 8번 재발급했다. 당시 여권 재발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종이를 여러장 덧대어 사용하기도 했다. /수원=김정호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카사바 신품종은 현지에 잘 적응했나요?

“1974년 어느날 콩고에 있는 조수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카사바가 다 말라죽고 있으니 어서 와달라는 얘기였죠. 너무 놀라서 가방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현장으로 갔어요. ‘나이지리아에서는 잘 자라고 있는 카사바가 어째서?’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현장이 생생하게 떠올라요. 카사바 밭은 초토화된 상태였죠. 잎은 모두 오그라들었고, 줄기는 누렇게 떠있었답니다. 병든 카사바 잎을 천천히 살펴보니 이상한 벌레가 기어다니고 있더라고요. ‘면충’이라는 벌레였습니다. 면충의 천적을 찾기 위해 곤충학자를 급히 채용해서 멕시코에서 남미까지 파견을 보냈어요. 그리고 파라과이에서 카사바 면충에 기생하는 기생봉을 발견했죠. 면충의 천적을 찾았다는 기쁨도 잠시, 다시 연구에 돌입했어요. 기생봉을 대대적으로 증식하는 연구였죠. 증식에 성공한 기생봉을 비행기로 살포해 2년 만에 카사바 면충을 해치웠습니다. 이 사례는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생물학 방제로 알려지기도 했죠.”

-광활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농민들에게 종자를 보급하기엔 한계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카사바를 트럭에 싣고 다니면서 농민들에게 나눠줬어요. 길을 다니다 병든 카사바 밭이 보이면 개량종을 꽂아두기도 했지요. 카사바는 씨앗이 아니라 대(줄기)를 심는 방식이거든요. 당시 산유국인 나이지리아에 진출해있던 석유회사 셸과 BP의 도움도 한몫 했습니다. 석유를 채굴하는 과정에서 토양이 악화하면서 카사바가 죽어나갔어요. 당시 석유 회사들은 지역 주민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했어요. 그래서 저를 찾아왔더라고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석유회사들이 앞장서서 카사바를 농민들에게 보급하기 시작한 거예요.”

한상기 박사는 국제기구와 NGO로부터 지원금을 끌어와 아프리카 농학도들이 석·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 아프리카 각국에서 온 700여 명의 농업인들을 훈련시켰다. 한 박사의 훈련을 받은 이들은 고국에서 1만명 넘는 현지 지도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한 박사는 카사바 개량종이 아프리카 전역에 증식·보급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으러 온 이들 손에 병충해에 강하고 소출이 많은 신품종을 들려 보내기도 했다.

한상기 박사는 아프리카 각국에서 온 700여명의 농업인들을 훈련시켰다. 한 박사가 들고 있는 건 700여명의 이름과 소속 등 정보가 담긴 카드집. /김정호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한상기 박사는 아프리카 각국에서 온 700여 명의 농업인들을 훈련시켰다. 한 박사가 들고 있는 건 당시 훈련생의 이름과 소속 등 정보가 담긴 카드집이다. /수원=김정호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좋은 아빠·남편이지 못했다는 미안함

한 박사의 집 거실 한쪽 벽면에는 고인이 된 아내 김정자씨의 영정 사진과 위패가 놓여있었다. 아내는 지난 2020년 9월 하늘로 먼저 떠났다. 한 박사는 집안 곳곳에 묻은 아내의 흔적을 지우지 않은 듯 했다.

-요즘은 뭐하면서 지내세요?

소탈하게 살고 있죠. 주로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냅니다. 전 세계 농업과 작물의 역사를 기록한 책을 펴내거나 페이스북을 통해 근황을 전하죠. 최근 자서전 작업을 마치고는 운동에 취미를 들이고 있어요. 매일 아침 집 안에서 1만보 이상 걷죠. 요즘 부쩍 체력과 소화능력이 떨어지면서 간단한 유산소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집 곳곳에서 아내에 대한 애정이 묻어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고맙고 미안한 사람입니다. 처음 아프리카에 가자고 했을 때 별 말 없이 따라와줬어요. 첫째는 중학교에 다닐 때라 한국에 두고 왔지만, 그 아래 아이 셋을 데리고 같이 와 준 거예요. 언어부터 음식, 애들 교육까지 참 어려운 부분이 많았는데…. 아내가 고생 많이 했죠. 그러다가 2009년 6월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어요.”

-많이 놀랐겠습니다.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고 일기를 썼는데 어느 날부터 기도를, 글 쓰는 걸 멈추더라고요. 그때 알았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하루는 성당에 가서 새벽 미사 참례를 하고 있을 때 아내가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서 요양보호사를 두고 아내를 돌보기로 했습니다.”

한 박사 뒤에 있는 빨간색 책은 그의 아내 김정자 필로메나가 생전에 작성한 일기장. 김 여사는 11번째 일기장을 작성하던 중 치매에 걸렸다. /김정호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한 박사 뒤에 있는 빨간색 책은 그의 아내 김정자씨가 생전에 작성한 일기장이다. 아내는 열한 번째 일기장을 작성하던 중 치매에 걸렸다. /수원=김정호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자식들은 아버지를 원망 않던가요.

“속으로는 할지 모르죠. 그래도 겉으로는 내색도 안하는 착한 아이들이에요. 첫째랑 둘째, 셋째는 모두 미국에 살고 있고 막내는 한국에서 지내면서 매주 우리 집을 찾아와 말동무가 돼 준답니다.”

-당시 아이들이 지내기에 아프리카가 위험하지 않았나요?

“IITA가 있던 나이지리아는 치안이 나빴기 때문에 늘 불안했어요. 온갖 질병도 조심해야 했죠. 어느날 애들이 정원에서 놀다가 나이지리아 흡혈 파리(sand fly)에 물린 거예요. 나이지리아 사람들이야 흔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우리 애들은 매우 놀란 기색이었죠. 한 번도 물린 적 없었기에 면역력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미치도록 발을 긁어댔는데 둘째 아이가 그 일로 다리에 종기까지 생겼습니다. 셋째는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에 기달리기도 했어요. 우리 가족은 나이지리아에서 매일 말라리아 약을 복용하는 등 아프리카 풍토병과 싸우며 살았습니다.”

-아프리카에 가보고 싶지는 않으세요?

“다시 가고 싶죠. 그런데 제가 너무 늙지 않았습니까. 소화도 잘 안 되고, 걷는 것도 시원치 않은데…. 곧 (세상을) 떠날 준비하는 사람이니 집착도, 미련도 없네요.”

한 박사는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고개를 돌린 그는 아내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수원=김수연 기자 ye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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