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토)

[미리 보는 사회문제… 2015년 新사각지대를 살피다]④ Ⅳ 시니어 – ‘일자리’만 찾다가 오히려 ‘설자리’ 잃는 노인들

불행한 노년의 삶, 행복해지게 만드는 방법
시니어 동아리 ‘희망나눔세상’의 재능기부처럼
사회 참여 활동으로 우울·고독 해결해야

“어느 날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어요. 그때부터 우울증이 오기 시작했죠.”

대기업 회계 파트에서 근무했던 양태석(60)씨는 2010년 회사를 나왔다. 33년을 일했던 회사였다. 처음엔 나름 ‘자유로움’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몇 개월 만에 무기력증에 빠졌다. 아내도 일을 하고, 애들도 바쁜데 양씨만 허송세월한다는 생각에 심한 우울증까지 앓았다. ‘뭐든 닥치는 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역 복지관의 인생 설계 강의부터, 요리 강좌까지 섭렵했다. 한국방송통신대학에도 편입했다. 기업 인사 파트에서 34년을 일했던 최종영(59)씨도 재작년 퇴직의 칼날을 맞았다. 최씨는 건강부터 문제가 생겼다. “시간이 많아지니까 오히려 게을러져서 건강관리가 잘 안 되더라”며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가족들과 전에 없던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사회와의 단절에 힘겨워하던 양씨와 최씨는 최근 은퇴 후 가장 활력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 작년 8월 은퇴한 시니어들로 이뤄진 재능기부 동아리에 참여하면서부터 생긴 변화다. 사회적기업이나 영세 자영업자들에게 경영 진단이나 컨설팅을 해주는 모임이다. 최종영씨는 “일주일에 3일 이상 현장에 나가다 보니, 우울증 걸릴 시간도 없다”며 “덕분에 가족과의 시간이나 여가도 훨씬 소중해졌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노인의 자살 및 우울증 문제가 심화되는 건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라며 "고령자들이 활발한 사회참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선일보 DB
전문가들은 “노인의 자살 및 우울증 문제가 심화되는 건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라며 “고령자들이 활발한 사회참여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선일보 DB

◇노인 빈곤 문제, 재취업이 유일한 대안인가?

지난달 31일, 서울대 행정대학원 ‘고령사회와 사회자본연구센터’가 65세 이상 노인 106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노인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경제적 문제’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에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잇는 노인이 180만명이 넘고, 서울의 택시 운전기사 5명 중 1명(21.6%)이 65세 이상(총 1만8934명)이라는 통계는 이 같은 결과를 뒷받침한다. 정부나 민간의 노인 정책 방향이 ‘일자리’ 쪽으로 치우쳐 있는 이유다. 하지만 ‘재취업’만으로 노인 빈곤 문제를 타개하려다 보니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직장인의 절반가량이 마땅한 노후 대비를 못 하는 상황에서, 은퇴 후 바로 재취업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고 일자리의 질도 떨어지기 때문. 전기보 행복한은퇴연구소 소장은 “은퇴자들에게 과연 어떤 일자리를 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은퇴 후 재취업 시장을 경험했다는 박현철(56)씨는 “은퇴자들이 많은 경험과 노하우를 가졌다지만, 실무 현장에선 더 이상 쓸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라며 “인생 2막의 시작을 경제적 가치에 맞춰 놓으면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노인들의 사회 참여, 신체·정신적 건강에 재교육 효과까지

지난해 말 ‘대한민국 농촌마을 대상’ 시상식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수미마을’은 마을 전체가 하나의 사회적기업이다. 재작년까지 방향성을 잃고 고민하던 이 마을은 1년여 만에 재정이나 조직 면에서 전에 없던 탄탄함을 갖췄다. 그 이면에는 시니어 재능기부 동아리 ‘희망나눔세상’의 도움이 있었다. 최성준 수미마을 기획이사는 “어르신들이 매달 몇 번씩 방문해 전사적자원관리(ERP)부터, 회의하는 요령까지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며 “조직 개편과 업무 분장에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이 동아리의 손홍택(59) 간사는 “경제적인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은퇴자들의 위축된 마음가짐인데 사회와 소통하고, 젊은 사람들을 꾸준히 만나면 위축감이 자존감으로 바뀐다”면서 “시니어들에게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문화와 기술을 접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고 했다. 노무 파트를 담당하는 최종영(59)씨는 “이 나이에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며 “요즘 식구 이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재능기부 동아리와 우리가 돕고 있는 사회적기업가들”이라고 했다.

◇’빈곤은 일자리로, 봉사는 무료로?’ 이분법적 접근 넘어서야

지은정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연구원은 “모든 초점이 일자리와 경제적 활동에 맞춰져 있다 보니, 노인들의 자아실현 욕구나 삶의 의미는 놓치고 있다”며 “돈보다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는 걸 원하는 고령자들도 많은데, 이들이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체계와 기반은 미비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고령자들의 사회참여율(경제활동 제외)은 9.8%, 자원봉사율은 6.2%(통계청, 2013)다. 노인 자원봉사 비율이 51%나 되는 스웨덴이나 44%의 영국은 물론, 일본(18%)보다도 낮다. 물론 자발적 사회 참여가 ‘배부른’ 소리로 여겨지는 계층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비경제적 사회 참여 활동이 경제활동의 발판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재능기부 동아리로 시작한 희망나눔세상이 좋은 예다. 이 모임은 올해 말 협동조합 형태 단체로 변신을 시도할 예정. 손홍택 간사는 “봉사로 시작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보면, 적더라도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회가 열린다”며 “향후 재능기부자와 재능기부가 필요한 단체를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로 조직을 성장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지은정 연구원은 “자원봉사 참여율이 높은 해외에선 노인들에게 20만~30만원가량의 활동비를 지급한다”며 “빈곤은 무조건 취업으로 연결시키고, 봉사는 무보수로 해야 그 정신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날 수 있다면, 사회 참여를 통해 은퇴 노인들의 심리적·정신적·경제적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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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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