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Cover Story] 행복은 지역순이 아니잖아요

아동 복지의 지역별 부익부 빈익빈
어디서 태어났는지가 복지를 결정하는 세상
서울지역 보육원 아동은 매달 간식비 1500원 받는데 경기·충북·전남 등 ‘0원’
보육원 퇴소 자립정착금도 지역 따라 200만원 이상 차이

지난해 가을, 강원도의 A보육원은 아동 보호 전문기관으로부터 ‘도움이 필요한 아이가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지적장애 아버지로부터 방치됐던 김민환(가명·11)군은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때문에 학교에 적응을 못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A보육원은 “부모처럼 잘 돌보겠다”고 약속했지만, 해당 지자체는 “왜 다른 지역 아동을 받느냐”며 반려 처분을 내렸다. 아동복지시설에 아동 숫자가 늘어나면, 그만큼 해당 지자체에서 부담해야 할 비용이 늘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 동안 민환군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A보육원 원장은 “보육원, 가정 위탁, 친·인척 등을 수소문해도 돌봐줄 곳이 없는 아동들은 불가피하게 일시 아동보호시설에서 1년 넘게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가정에서 버려진 아이들이 이젠 사회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다”고 꼬집었다.

같은 사건이 외국에서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미국은 주정부가 수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아동보호서비스 기준(내셔널 미니멈·National Minimum)과 책임을 연방법에 규정해, 주정부가 임의로 서비스를 감축하지 못하도록 연방정부가 철저히 감독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1909년부터 100년 넘게 대통령과 각 부처 전문가들이 모여 ‘백악관 아동 회의’를 열고 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엔 아동 보호를 위한 내셔널 미니멈 없이 각 지역 재정에 맡겨지다 보니, 어느 지역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아동의 인권과 복지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라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선 대통령 주재로 아동 정책 회의를 지속한 경우가 없을 정도로, 선진국에 비해 아동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말했다.

미국은 100년 넘게 백악관 아동 회의를 여는 등 아동 권리를 정책 우선순위로 두지만, 우리나라의 아동복지 예산은 GDP 대비 0.01%로 지난 20년간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아동의 학대·방임이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아동복지 수준은 OECD 최하위권이다. /위키피디아·조선일보 DB
미국은 100년 넘게 백악관 아동 회의를 여는 등 아동 권리를 정책 우선순위로 두지만, 우리나라의 아동복지 예산은 GDP 대비 0.01%로 지난 20년간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아동의 학대·방임이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아동복지 수준은 OECD 최하위권이다. /위키피디아·조선일보 DB

◇거주 지역에 따라 먹는 것, 입는 것 달라져

지난 9월 24일, 현오석 기획재정부 장관, 유정복 안전행정부 장관, 이영찬 보건복지부 차관이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중앙·지방 간 기능 및 재원 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2004년 지방으로 이양됐던 사회복지 사업 중에서 장애인·노인 양로·정신요양시설은 2015년부터 중앙정부로 이관하기로 했지만, 아동복지시설만 제외됐다. 중앙정부 사업은 70~80%를 국고에서 지원하지만, 지방 이양 사업은 예산의 70% 이상을 지자체가 부담해야 한다. OECD 34개 국가 중 우리나라의 아동복지 지출 수준은 32위. 아동복지 예산이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0.01%로 지난 20년간 변화가 없었다(2012 보건사회연구원). 전문가들은 “힘없고 투표권 없는 아동들이 지자체의 재정 상황에 떠밀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데, 앞으로 이런 상황이 더 심해질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전국 아동복지시설 281곳에 머무르고 있는 아동 수는 총 1만5916명에 달한다(2012년). 그러나 지자체 사정에 따라 각 지역 보육원 아동들이 먹고, 입고, 생활하는 수준은 다르다. 서울 지역 보육원 아이들은 매달 간식비로 1500원을 지원받지만, 인천은 1000원, 대전은 300원을 받는다. 경기도·강원도·충북·전남·전북(전주시 제외) 지역 보육원 아이들에겐 간식비가 아예 없다. 서울은 보육원 퇴소 시 자립정착금으로 500만원을 지원하고, 직업 훈련비 60만원(1년에 4번), 대학 입학 시엔 300만원까지 장학금을 준다. 반면 전남(신안군 제외), 등에 지원되는 자립정착금과 대학입학금은 0원이다. 이혜경 한국아동복지협회 부장은 “경북 지역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가 대학 입학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는데, 해당 지자체에서 재정 문제로 보육원 문을 열어주지 않는 바람에, 경북 지역 보육원이 아동의 간식비·정착금 등을 계속 지원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지방으로 갈수록 기업 후원이나 자원봉사 수급도 어렵다. 김광빈 한국아동복지협회 부회장(동명아동복지센터 원장)은 “수도권 지역은 대학생들이 매주 찾아와 무료 과외를 해주고, 기업들이 주말 프로그램을 후원해줘서 운영 비용이 굉장히 절감된다”면서 “반면 지방으로 갈수록 후원 기업도 없고 봉사자도 부족해, 보육사들이 사비를 모아 아이들 간식비나 자립정착금 등을 마련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미상_사진_아동복지_외국아이들_2013 미상_사진_아동복지_외국모자_2013

◇’표’따라 움직이는 지자체 예산… 아동은 뒷전?

경북의 B보육원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노인시설과 마주 보고 있다. 두 건물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B보육원은 20년 동안 수리를 못 해 건물에 비가 새고, 냉·난방이 되지 않는다. 이에 B보육원 원장은 올해 초, 정부로부터 4억원의 국고 보조금을 받아 리모델링을 하려 했지만, 지자체에서 매칭 예산이 없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국고 보조금마저 환수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맞은편 노인시설의 건물 전체가 리모델링됐다. 지자체 지원 덕분이었다. B보육원 원장은 “아이들을 도와달라 하면 ‘예산 없다’면서 항상 거절하더니, 노인시설 개·보수 비용은 억 단위로 바로 나오더라”면서 “선거철이 되면 노인시설엔 하루에도 수십 명씩 다녀가는데, 우리 보육원엔 찾아오는 지역구 의원이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의 상황도 비슷하다. 최근 강원도 C보육원 인근에는 대규모 종합사회복지관이 들어섰다. 10억여원을 들여 지은 복지관은 결혼식, 세미나, 회의 등이 열릴 때를 빼곤 평소 텅 비어 있다. 그로부터 1㎞ 떨어진 곳엔 1000평 규모의 운동장과 체육관이 건립됐고, 언덕을 넘으면 지자체가 75억원을 들여 조성한 문학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C보육원 원장은 “지자체 나름의 우선순위가 있겠지만, 보육원이 도와달라고 할 땐 매몰차게 거절하면서 저렇게 계속 건물이 들어서는 걸 보면 야속하다”고 말했다.

2012년 기준 정부의 아동복지(영유아 제외) 예산은 총 2085억원으로, 전체 사회복지 예산의 0.0025%에 불과하다. 아동 1명당(0-17세) 총 3만원가량 지원되는 수준이다. 반면, 노인복지 예산은 3.8조원으로 1인당 68만원이 지원되며, 장애인복지 예산은 9000억원으로 1인당 지원금이 36만원이다. 전국 시·도별 통계를 봐도 복지 예산 비중이 가장 많은 대상은 노인(30%)이며, 장애인은 7.3%, 아동은 3.7%다(2012 보건사회연구원). 이혜경 한국아동복지협회 부장은 “가장 열악한 아동복지시설만 남겨두고, 오히려 예산 비중이 많은 노인·장애인복지시설을 중앙 정부로 이관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지적했다.

한국아동복지협회_그래픽_아동복지_각시군구별주요아동복지예산_2013

◇치료가 필요한 아동 늘어… 전담 치료사·보육사 인력 시급

허술한 지원이 계속되다 보니, 아이들에 대한 질적인 케어(care)는 꿈도 꾸지 못한다. 예전엔 고아나 의식주 해결이 시급한 아이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 보육원을 찾는 아동은 아동학대나 학교 폭력 문제로 정서적 문제를 가진 경우가 급증했다. 진영호 강원도아동복지협회 회장은 “보육원마다 정서 치료가 필요한 아이가 거의 80%에 달한다”면서 “이전보다 인력도, 노력도 많이 든다”고 설명했다. 이에 보육원의 고민도 깊어졌다. 김광빈 부회장은 “간식비, 자립정착금도 못 주는 지자체가 많다 보니 한 아동당 30만원에 달하는 아동 심리 치료 검사비를 도저히 조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서 치료를 요하는 아이는 많아지고 있는데, 지자체는 ‘거꾸로 행정’을 하고 있다. 최근 경남의 D보육원에서는 지자체로부터 “보육원 지원 예산이 부족하니, 호봉이 높은 복지사를 자르라”는 압박을 받았다. 보육사 인력이 한 명 없어지니, 남은 이들의 밤샘 근무가 이어졌다. D보육원 원장은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ADHD 등 정서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충분히 지켜보지 못해, 사건 사고가 좀처럼 줄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돌보기 어려운 아이들이 많아지고, 열악한 근무 조건이 계속되자 아동복지시설 종사자들의 이탈률도 늘고 있다. 경북의 B보육원 원장은 “새로운 선생님이 오면 아이들이 ‘언제 가실 거냐’고 묻는다”면서 “채용 공고를 내도 몇 달이 지나도록 이력서가 안 들어와서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복지부 아동복지정책과 관계자는 “개선이 필요한 지자체가 있다면 모니터링을 할 계획”이라면서 “다만 중앙정부 이관에 대해서는 이미 기획재정부·안전행정부, 복지부 등이 합의해 결정한 문제이기 때문에, 아동복지시설 사업은 지금처럼 지자체 소관으로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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