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CSR 담당자의 절규

[명함 이면에 숨겨진 애환] “기업 사회적 책임 다하려 만든 조직인데…우리의 다른 이름은 파견직·계약직입니다”

봉사참여 요청에도 직원들 반응 없고
“2년 내 성과 내라” 압박… 역량 충분히 발휘 어려워
사회공헌 활발해졌지만 정작 담당자 처우는 홀대

4년 전 삼성의 한 계열사 사회공헌팀에 입사한 A씨는 비정규직으로 일했다. 비영리단체에서 5년 동안 국내외 현장 경험을 쌓았지만, 해당 경력을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연봉도 신입 직원보다 낮았다.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던 그는 2년 뒤 “그만두라”는 일방적 통보를 받았다. 1년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하던 A씨는 이듬해 금융권 CSR팀에 입사했다. 역시 2년 계약직이다.

서울의 한 명문대에서 사회복지학과 석사과정을 마친 B씨는 S기업 CSR팀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임직원 자원봉사단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2년 동안 월급 110만원을 받고 일하던 그는 계약 만료로 실직당했다. 이듬해 한 시중은행 사회공헌팀 경력직으로 채용됐지만 “일단 계약직으로 시작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전 회사에서 쌓은 2년 경력도 인정받지 못했다. 가장 낮은 직급의 연봉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들은 “대기업 사회공헌 담당자 상당수가 1~2년 단위 계약직으로 기업을 옮기는 신세”라면서 “겉으로는 지속 가능 경영을 내세워도 실제로 내부에 CSR 전담자 없이 비정규직으로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이 많다”고 입을 모았다.

조선일보 DB
조선일보 DB

◇사회책임경영 외치던 대기업, 비정규직 양성소 되나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이 활발해졌지만 정작 사회공헌 담당자에 대한 기업 내 처우와 인식은 낮은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직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경영 핵심 영역이 아닌 부수 업무로 여기는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대기업들은 “더 전문적인 사회공헌 활동을 위해 사회복지사 및 비영리단체 경력자를 채용한다”고 홍보하기 시작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비정규직 채용이 대부분이었고 비영리 실무 경력을 그대로 인정받은 이는 손에 꼽혔다. 이러한 분위기는 2008년 이후 가속화됐다. S기업 재단이 사회공헌 담당자 채용 공고를 내면서, ‘계약직, 연봉 2400만원’이란 문구를 삽입했다. 일주일 만에 지원자 1200명이 몰렸다. 석사 학위 소지자를 비롯해 경력 5년 이상인 비영리 현장 실무자가 대부분이었다. 전문가들은 “CSR 직군에는 계약직이라도 인재가 몰린다는 걸 알게 된 기업들이 이를 악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직원들에게 봉사 의무 시간을 규정한 기업에서 비정규직 채용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난다. 계열사별, 전국 사업장별로 임직원 자원봉사가 진행되려면 관리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 기업들은 ‘코디네이터’라는 직급을 만들어 이들에게 임직원 자원봉사단 관리 및 단기 CSR 프로그램 운영을 맡기고 있다. ‘코디네이터’의 월급은 월 100~120만원 수준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의 귀띔이다.

◇고용 부담 줄이려 CSR 인력 파견 업체 활용하기도

“대기업 사회공헌팀에는 서열이 네 개 존재합니다. ‘코디네이터’, ‘파견직’, ‘계약직’, ‘정규직’으로 나뉘어 있죠.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고 만든 조직인데 그 이면에는 차별과 편견이 숨어 있습니다.”

재단 및 기업에서 8년간 CSR 경력을 쌓은 한 담당자가 불합리한 현실을 토로했다.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 CSR 담당자에게 기업의 지속 가능한 CSR 전략을 만들라고 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는 것. 최근 대기업들은 경비 절감을 위해 사회공헌 업무를 아웃소싱(외주)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파견직’이란 직급이 생겨났다. 파견직은 인력대행사 소속 직원이기 때문에 기업은 이들의 인사, 노무 등 관리 책임이 없다. 급여도 인력대행사가 지급한다. 채용 사이트에도 해당 기업의 명칭이 공개되는 대신, ‘국내 최고 상위 대기업 CSR 계약직 채용’ 등 대략적인 정보만 제공된다. 이에 기업들은 한번 채용하면 감원이 어려운 정규직 대신, 임시 파견직 채용을 늘리고 있다. CSR팀 내의 정규직은 마케팅, 홍보, 인사팀에서 부서 이동으로 온 직원들로 구성된다. 대부분이 1~3년 후 원래 부서로 이동하기 때문에, CSR 전략 기획은 결국 계약직 직원의 몫이 된다.

금융권에서 7년 동안 CSR 업무를 담당한 한 실무자는 “계약직으로 일하던 5년 동안 혼자서 회사의 CSR 비전은 물론 사내 복지, 윤리 경영, 사회공헌 영역 전체 로드맵을 기획하고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CSR 조직을 꾸린 대기업에 계약직으로 입사한 한 관계자는 “과장급 상사 한 명이 CSR팀에 있는데 아무런 도움 없이 1년 반 동안 혼자 CSR 전략을 짰다”고 했다. 그는 “CSR은 사회공헌뿐만 아니라 회사의 인사·복지·총무·윤리 경영 전반을 이해해야 구상할 수 있는 전문 영역임에도 기업들은 CSR을 사회공헌 영역으로 좁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전담자를 계약직이나 파견직으로 채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CSR 담당자 전문성 인정해야 지속 가능한 CSR 전략 나온다

사회공헌 담당자가 1~2년 주기로 교체되자 조직원들이 사회공헌 업무를 하찮게 여기는 풍조도 생겨났다. 4년째 기업 및 재단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한 사회공헌 담당자는 “업무 특성상 타부서 직원들과 커뮤니케이션 하고 협조를 구할 일이 많은데 그때마다 벽에 부딪혔다”면서 “직원들에게 자원봉사 참여를 요청해도 반응이 없고, 프로젝트를 제안해도 ‘곧 나갈 직원’의 아이디어로 받아들이더라”고 설명했다. “언제 잘릴지 모르니, 2년 이상 장기 프로젝트를 세우기 어려웠다”는 이도 많았다. CSR 담당자가 바뀌면 프로젝트 자체를 변경하는 기업 분위기 때문이다. 최근 기업 재단으로 자리를 옮긴 CSR 실무자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성과가 나타나려면 최소 3~5년이 걸리는데, 2년씩 비정규직 담당자를 채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업이 이슈가 될 만한 단기 성과에 집중한다는 증거”라고 했다. ‘2년 내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나타내지 않으면 정규직 전환이 안 된다’는 압박 때문에 자신의 역량과 비전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이도 많다. H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지난해 CSR팀 전 직원의 요청으로 계약직 동료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됐다”면서 “CSR 담당자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진정성과 지속성을 갖춘 기업의 사회적 책임 경영이 가능해진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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