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협력업체서 준 명절 선물 어려운 이웃에게 보내요

‘청렴’을 기부하는 기업들
승진축하 난·외부 강의료 자발적으로 사내경매 내놔 난치병 아동 치료비로 써
윤리경영과 기부 결합한 ‘청렴기부’ 기업 늘어나

지난 2011년 2월, 현대건설 사옥 1층 로비에는 300여개의 화분이 진열됐다. 도자기에 담긴 작은 난(蘭)부터 분홍색 띠를 두른 1m짜리 소나무 분재까지, 크기와 종류도 다양했다. 모두 연초 인사에서 승진한 사람들에게 들어온 화분들이다.

한 점에 보통 5만~10만원 정도 하는 고급 난이 평균 2만원대의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현대건설 임직원들이 외부 용역업체나 지인들로부터 받은 승진 축하용 난을 자발적으로 기증한 덕분이다. 이날 나눔 장터가 열린 현대건설 로비는 사원 1000여명의 발길로 북적거렸다. 총 500만원의 수익금 전액이 희귀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동들의 치료비로 쓰였다.

지난해 12월,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내 인트라넷에는 와인·골프백·지갑·화장품 등 68종의 다양한 물건이 경매에 올라왔다. 인기가 많은 상품은 경쟁이 치열해 가격이 치솟았고, 마감 시간에는 눈치작전까지 벌어졌다.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사은품, 명절 선물 등을 임직원들에게 기증받아 온라인 자선 경매를 연 것.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컴플라이언스(Compliance, 준법·윤리경영)팀과 사회공헌팀이 협력업체와 거래 투명성을 위해 고안한 ‘해피옥션(Happy Auction)’ 캠페인이다. 현대카드 이석호 CSR콘텐트팀장은 “거래 투명성을 지키기 위해 협력업체로부터 받는 선물 등을 엄중히 다루는데, 어쩔 수 없이 수령한 사은품이나 선물은 컴플라이언스팀에 신고하고 해당 물품을 사회공헌부서로 전달한다”며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신고한 물품이 사회공헌에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윤리경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2011년부터 진행된 3번의 온라인 경매를 통해, 약 1400만원이 모였다. 수익금 전액은 한빛 맹아원, 지역아동센터, 미혼모자(母子) 시설에 기부했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①포스코는 승진 축하용 난을 기증받아, 판매 수익금을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고 있다. ②현대카드·현대캐피탈은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선물을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경매한 뒤, 미혼모자시설 등 소외된 이웃에 기부하고 있다. ③현대건설은 승진 축하용 난이나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선물을 기증받아 사내 경매를 통해 장애인 수술 등 소외계층을 돕고 있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 ①포스코는 승진 축하용 난을 기증받아, 판매 수익금을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하고 있다. ②현대카드·현대캐피탈은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선물을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경매한 뒤, 미혼모자시설 등 소외된 이웃에 기부하고 있다. ③현대건설은 승진 축하용 난이나 협력업체로부터 받은 선물을 기증받아 사내 경매를 통해 장애인 수술 등 소외계층을 돕고 있다.

◇’윤리경영’과 ‘기부’ 결합… 임직원 나눔 확산

승진 축하용 난을 기부하고, 명절 선물을 신고받아 사내 경매로 활용하는 등 ‘윤리경영’과 ‘기부’를 결합한 CSR 사례가 늘고 있다. 기업 내에 사회공헌 전담 부서가 생겨나고 전문성이 강화되면서, 기업 윤리와 임직원 나눔을 동시에 확산시킬 수 있는 캠페인이 확산되는 것이다. 기업윤리실 담당자들도 “선물 반송센터와 기부 행사를 결합하니, 임직원 참여율이 훨씬 높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감시하는 문화가 아닌 나누는 문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은 2011년부터 임직원들이 외부 강연료를 기부하도록 행동 강령을 개편했다. 50만원 초과 부분을 기부하도록 의무화한 것. 그런데 50만원 초과 금액은 물론이고, 자발적으로 강의료 전액을 기부하는 직원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렇게 2년 동안 모인 강연료 기부금만 2100만원(총 85건)이다.

포스코는 8년 전부터 외부 강사료 전액을 기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신 외부 강의가 있을 경우에는 출장비를 회사에서 따로 지급하고, 직원 본인 명의로 기부금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매년 설과 추석 때 포항과 광양, 서울 지역 문서수발센터에 ‘선물반송센터’를 설치·운영한다. ‘마음만 받고 선물은 되돌려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를 보내 선물을 되돌려 보낸다. 집으로 배달된 선물도 선물반송센터에 연락하면, 택배회사 직원이 집을 방문해 반송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발송인이 불분명하거나 부패하기 쉬운 음식 등 반송이 곤란한 물품은 외부에 기부하거나 사내 경매를 한다. 사외강의료 3억3300만원, 선물반송센터 총 1285건 접수, 온라인 경매 4600만원, 난 경매 2700만원 등이 기탁됐다. 포스코 사회공헌실 나영훈 차장은 “사내 경매의 경우 좋은 물건을 저렴한 가격으로 살 수 있고, 수익금이 불우이웃돕기로 사용되기 때문에 임직원으로부터 높은 호응을 받고 있다”며 “불가피하게 받은 승진 축하용 화훼를 경매할 때는 내부 임직원뿐 아니라 지역 주민과 일반 방문객도 참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의무 규정 폐지돼도, 자발적 기부 이어져

의무 규정은 아니지만,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청렴 기부’를 실천하는 곳도 있다. SK텔레콤의 ‘해피 챌린지 펀드’는 직원들이 스스로 설정한 영어실력 향상, 금연, 다이어트의 미션 달성에 실패한 경우 기부하기로 한 금액이 모태가 되어 2007년 2월 처음 만들어진 기금이다. 펀드 규모는 5000만원 정도. 이 기금은 전국 청소년전용 지역아동센터 1318 해피존 학생들의 영어 학습·해외연수 지원 프로그램인 ‘도전 잉글리시 업’에 기부된다. 서진석 SKT CSR팀장은 “처음에는 1000여 명 직원 중 절반이 미션에 실패해 그 벌금으로 펀드 기금을 모았는데, 건물 전체가 금연건물이 되는 등 벌금 펀드 운영이 어려워졌다”며 “어려운 청소년을 돕는다는 취지에 공감한 직원들이 외부 강연료나 승진 축하 화분 판매 수익금, 대내외 포상금 등을 자발적으로 기부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회사에서 충당해 펀드 운영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연말 포상과 관련해 기부 의무 규정을 둔 적이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매년 말, 봉사나 기부를 많이 한 부서 또는 개인에게 사회공헌 시상을 하고 있다. 2년 전에는 사회공헌 관련 상을 받은 이들에게 상금의 반액을 기부하도록 의무화했었다. ‘기부를 강요하지 말자’는 취지에서 해당 규정은 이듬해 폐지됐지만, 직원들의 나눔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자산관리공사 장지현 과장은 “지난해 업무 우수 대상을 받은 직원분이 100만원 상당의 온누리 상품권을 기부해,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면서 “해당 상품권으로 신입 직원들이 독거노인 가정에 음식을 지원하는 봉사 활동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청렴을 기부하는 ‘촌지 없는 병원’

위에서부터 ①삼성서울병원은 환자나 보호자가 선물한 현금 및 물품을 기증받아 인근 복지관 또는 구청에 전달하고 있다. ②삼성서울병원원장은 직원들에게 선물을 보낸 환자 및 보호자에게 ‘촌지 없는 병원’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직접 보내고 있다.
위에서부터 ①삼성서울병원은 환자나 보호자가 선물한 현금 및 물품을 기증받아 인근 복지관 또는 구청에 전달하고 있다. ②삼성서울병원원장은 직원들에게 선물을 보낸 환자 및 보호자에게 ‘촌지 없는 병원’에 대해 설명하는 편지를 직접 보내고 있다.

삼성서울병원은 94년 개원 때부터, ‘촌지 없는 병원’을 지향해왔다. 당시 환자들 사이에선 진료나 수술 날짜를 앞당기기 위해 촌지를 주는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의사들에게 돈을 줘야만 수술을 잘 받을 수 있다’는 인식도 깊었다. 삼성서울병원은 모든 직원에게 환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불가피하게 받은 물품들은 사회복지팀에 보내달라는 ‘청렴 교육’을 실시했다. 사회복지팀은 전달받은 물품 중 부패하기 쉬운 음식품은 독거노인 무료 급식소나 지역아동센터에 전달했다. 복지관에 전달하기 어려운 와인·양주 등은 바자회를 열어 수익금을 구청에 전달했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접수된 기금이나 물품들이 어떤 기관에 전달됐는지, 100원 단위까지도 자세히 공지했다. 내규를 만들지 않았는데도 직원들의 자발적인 기부가 이어졌다. 의사·간호사들에게 별도로 감사의 표시를 한 환자들에겐 병원장이 직접 편지를 보냈다. “치료비 외에는 별도로 성의 표시를 하지 않으셔도, 환자분들을 최대한 정성껏 모시는 병원이 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의료진에게 성의를 표시하고 싶다면, 소외계층 환자들을 후원하는 ‘희망사과나무 성금’에 사랑을 표시해주시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주식 삼성서울병원 사회복지팀 팀장은 “직원들이 음료수 한 캔마저 사양할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다 보니, 오히려 환자들에게 민원이 들어올 정도”라면서 “감시 기능을 강화하기보다는, ‘환자분들이 전해준 감사의 마음을 더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하자’는 좋은 문화로 만들어가려 한다”고 했다. 그는 “‘촌지 없는 병원’을 위해, 이러한 기금은 앞으로 줄여나가는 것이 목표”라고도 덧붙였다.

정유진 기자

최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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