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Cover Story] 지속가능한 개발, 변화의 현장③ 일자리 생기고 소득 늘어… 활기 되찾은 마을에 주민들 ‘활짝’

지속가능한 개발, 변화의 현장③ 네팔 ‘푸드 포 뉴 빌리지’ 사업
네팔 도티지역 오지마을 1년 내내 농사 짓지만 기술도 물도 부족해 식량 겨우 3개월치 생산
한국 새마을운동 닮은 ‘FFNV’ 2011년 시작
주민 조직 참여시켜 공공근로사업 운영
마을 시설 개선으로 생산성 향상 도모하고 참여 주민에 수당 지급
부모가 여유 생기자 아이들 학교에서 공부 배움이 바꿀 미래 기대

“탕, 탕!”

도끼가 하늘로 솟구쳤다. 은색 날이 햇빛에 반짝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열 번 넘게 이어지자 바위가 ‘쩍’ 갈라졌다. 지난달 19일, 네팔에서 만난 산드르 바하드라(52)씨는 바위를 깨고 있었다. 이곳은 수도 카트만두에서 차로 36시간 걸리는, 해발 1500m 오지인 도티(Doti)지역 라다가다 마을. 그는 “계곡물을 끌어와 2㎞쯤 떨어진 우리 마을에서 쓸 관개수로를 만들고 있다”며 “비가 오면 길이 뒤엉켜 버리는데, 약한 지반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이런 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자들이 바위를 깨 돌을 만들면, 여자들은 20분 동안 산길을 오르내리며 7~8㎏ 무게의 돌을 옮긴다.

 라다가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굿네이버스 사무실 앞에서 만난 PMC 멤버들은 "'FFNV 사업'을 통해 마을 주민의 삶이 향상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헐커(31)씨, 랄바드르(35)씨, 락스미(30)씨, 딜리(32)씨, 키르(52)씨.(왼쪽부터)

라다가다 마을 중심에 위치한 굿네이버스 사무실 앞에서 만난 PMC 멤버들은 “‘FFNV 사업’을 통해 마을 주민의 삶이 향상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헐커(31)씨, 랄바드르(35)씨, 락스미(30)씨, 딜리(32)씨, 키르(52)씨.(왼쪽부터)

마을 입구에서 30여분 걸어들어가자, 돌을 쌓아 만든 정사각형 모양의 저수탱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건기(乾期)에 대비해 물을 저장해놓는 곳이다. 3400ℓ가 담길 만큼 큼지막했다. 식수원인 계곡에서 저수탱크까지 이어지는 1.5㎞짜리 파이프라인은 이미 완공돼 있었다. 여기에서 마을 식수대(우물)까지 이어지는 1개뿐이던 수로도 4개로 늘렸다. 11일 동안 92가구가 공사에 참여했다고 한다. “저장탱크가 완성되면 550명 정도가 먹고 씻을 물을 쓸 수 있어요. 가뭄이 극심한 시기에도, 저장된 물을 농업용수로 쓸 수도 있고요. 농사도 잘될 것 같은데, 공사에 참여해서 돈도 벌 수 있으니 더 좋아요.” 저수탱크 공사 현장을 감독하는 딜리(32)씨가 미소를 지었다.

◇’한국 새마을운동’ 네팔에 적용한 지역개발 사업

네팔 도티지역은 전체 75개 지역 중 소득 하위 70위인 곳이다.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지만, 물도 부족하고 기술도 부족해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봤자 3개월이면 바닥난다. 하루 세 끼를 먹기 어렵고, 건기(11월~5월) 말에는 ‘보릿고개’를 견뎌야 한다. 남자들은 돈을 벌러 인도로 떠나 야간 건물경비, 식당 접시닦이, 호텔 종업원 등으로 일한다. 노약자, 부녀자, 아이들만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다. ‘농촌 공동화 현상’과 ‘보릿고개’. 1970년대 우리나라 농촌과 판박이처럼 닮은 모습이다.

지난 2011년, 이 도티지역에 변화의 물결이 시작됐다. 변화를 이끄는 건 ‘푸드 포 뉴 빌리지(Food For New Village·이하 FFNV)’사업이다. 한국 정부(KOICA)와 세계식량계획(WFP), 한국 NGO인 굿네이버스가 함께 3개년 계획으로 진행하는 ‘네팔형 새마을운동’ 사업이다. 노경후 굿네이버스 네팔 도티 사무장은 “세계식량계획은 기존의 ‘일시구호성’ 식량지원보다 장기적으로 주민들의 자립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사업이 필요했고, 한국 정부는 ODA(공적원조) 규모가 커지면서 UN 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전파하는 게 필요했다”며 “2002년부터 이곳에서 사업을 진행해온 굿네이버스 네팔은 한국NGO 중 가장 크고 규모가 오래된 곳이어서, 이 세 단체가 2011년부터 의기투합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18일, 수나데비 초등학교 앞에서 열린 '캐시 포 애셋' 배분 사업 현장.
지난달 18일, 수나데비 초등학교 앞에서 열린 ‘캐시 포 애셋’ 배분 사업 현장.
지난달 19일, 라다가다 마을 관개수로 공사현장에서 여자들은 풀을 제거하고, 돌 나르는 작업을 맡았다.
지난달 19일, 라다가다 마을 관개수로 공사현장에서 여자들은 풀을 제거하고, 돌 나르는 작업을 맡았다.

◇일자리도 생기고, 돈도 벌고, 지역 숙원 사업도 풀어

“목록에서 자기 이름과 일한 날 수, 그리고 금액을 확인하시고 돈을 받아가면 됩니다.”

지난달 18일 오전, 수나데비 초등학교 앞 공터에 주민 100여명이 모였다. 마을 회관과 식수대를 짓는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한 이들에게 수당을 주는 날이다. 올해 두 번째 ‘캐시 포 애셋(Cash for Asset)’ 배분사업으로, 지역 인프라 구축을 위한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한 주민에게 수당을 준다. 하루당 현물로는 4㎏의 쌀과 1㎏의 달(국을 만드는 재료)을, 현금으로는 170루피(약 2550원)를 준다. 17일 동안 식수원과 식수대를 연결하는 공사에 참여했던 람(34)씨에게 “FFNV 사업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럼요. 우리 일(our own work)인걸요. 소득을 높일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데다 돈까지 받을 수 있으니 더 좋지요. 공개적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방식도 투명한 것 같아요.” 이어 “오늘 받은 돈으로 무엇을 할 거냐”는 질문에 람씨는 “건기라서 식량이 부족한데, 쌀이랑 향신료, 기름을 살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프라 구축 외에, 영농후계자를 선발해 농업기술 보급도 한다. 이곳은 종자 관리, 종자 개량, 토질 관리도 되지 않는 데다, 비료도 없고, 자재도 활용하지 않다 보니 생산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경후 사무장은 “5월쯤 쌀 농사가 시작되는데, 한창 벼들이 자라야 할 8월에 볏잎마름병이 유행해 노랗게 다 말라 죽어버렸으나 주민들이 이 병이 뭔지, 왜 유행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며 “종자에서부터 그 박테리아가 있었던 것인데, 종자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오신다고 고생하셨어요”라며 나무에서 갓 딴 오렌지를 건네는 마하(45)씨.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하얀 이가 유독 돋보였다. 농사를 해서 버는 한 달 수입은 평균 800~1000루피(1만2000~1만5000원)로, 네팔 6인 가족 기준 평균 소득(3500루피)의 절반도 안 된다. 3년 전만 해도 네 명의 딸과 떨어져 인도에서 야간 경비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야만 했다. 마하씨는 올해 ‘FFNV 사업’에서 영농후계자로 선발됐다. 그는 “망고랑 콜리플라워, 밀 종자를 새롭게 보급받았다”며 “농사가 잘돼서 더 많은 돈을 벌면 인도에 가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현지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마을 만들어

‘FFNV 사업’이 한국의 새마을운동과 다른 점은, 정부 주도가 아닌 ‘주민 주도’라는 점이다. 랄바드르(35)씨는 지난달 2일 열린 PMC(Project Management Committee·이하 PMC) 미팅 회의록을 보여줬다.

“마을회관 공사에 쓸 나무는 뭘로 할지 논의했어요. 학교에는 어떤 물품들이 필요하고, 아이들에게 학용품이 잘 전해지고 있는지도 물어봤고요. 마을 도서관을 어떻게 지을지도 이야기했습니다.”

굿네이버스 라다가다 현지 직원들도 매달 PMC미팅에 참여한다. 노경후 사무장은 “네팔에는 마을마다 인구 구성별로 주민대표자들을 모은 지역개발위원회(Community Development Committee·이하 CDC)라는 주민조직이 있는데, 이 CDC의 대표들이 PMC 멤버가 된다”며 “PMC 멤버들이 매달 회의에서 사업 계획을 직접 수립하고, 진행상황을 보고한다”고 말했다.

많은 NGO가 도티지역에서 구호 활동을 벌였지만 아예 사무실을 만들어 오지(奧地)로 들어온 것은 굿네이버스가 처음이다. 주민들과 매일 마주하니 신뢰도도 큰 편이다. 라다가다 마을 공무원인 랄바드르씨는 “정부나 NGO 주도의 톱다운(top-down) 방식이 당장 문제 해결은 빠르겠지만, 지속적인 사업 진행에는 단점을 가진다”며 “주민조직을 참여시켜 지역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이번 ‘FFNV 사업’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OLPC'프로젝트에서 지원받은 노트북으로 영어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마스테소르 초등학교 학생들.
‘OLPC’프로젝트에서 지원받은 노트북으로 영어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마스테소르 초등학교 학생들.

◇마을이 변하고, 학교가 변하고, 아이들이 변한다

“처음 학교에 갔는데,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에 책걸상도 없이 바닥에 앉은 아이들이 보이지도 않는 칠판을 보고 있더라고요.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잘 보내지도 않았어요. 당장 밭일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미래에 투자할 여유가 없는 거예요.”

노경후 사무장은 ‘FFNV 사업’을 진행하면서 “아이들이 학교에 가게 되었다”는 점이 큰 변화라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찾아간 마스테소르 초등학교에서 흥미로운 현장을 목격했다.

“자, 돌아가면서 따라합니다. I’m sorry, I forgot to put it on.”

엄바다타(28) 영어 교사의 말에 키마(11)양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작지만 분명한 발음으로 문장을 따라했다. 10평 남짓한 교실 안에 형광등은 없었지만, 14명 학생들의 책상에는 8인치 초록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에게 노트북을 지원하는 ‘원 랩톱 퍼 차일드'(One Laptop Per Child·이하 OLPC) 프로젝트를 통해 지급받은 것이다. 엄바다타씨는 “학생들이 공부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며 “영어는 말하기가 중요한데 적극적으로 스피킹 훈련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키마양에게 “노트북으로 수업하니 어떠냐” 묻자 “문제를 풀 때, 맞았는지 틀렸는지 바로 알려주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교복이랑 학용품도 주고, 기자재도 지원해줘서 더 많은 아이가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출석률도 높아졌습니다. 무선인터넷 시스템이 만들어져 다양한 교재를 활용한 수업이 가능해지면 아이들이 미래를 더 잘 준비할 수 있겠지요.” 암바다타씨의 말에서,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싹이 자라나고 있음을 목격했다.

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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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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