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7일(토)

[Cover Story] 난민에게 희망 전하는 ‘김종철·박진숙’ 부부

법률 지원으로 소송 돕고, 재능 지원으로 자립 기틀 마련

움켜쥔 인연보다 나누는 인연으로, 각박한 인연보다 넉넉한 인연으로 살았다. ‘왜’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돌이켜보니, 모든 순간이 마치 예정된 일처럼 소중하게 느껴진다. 머물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난민(refugee,難民)’들에게 희망을 전한 지 벌써 7년. 만남은 용기를, 나눔은 행복을 가져다줬다. 김종철(42), 박진숙(39)씨 부부는 맘속에 차곡차곡 담아온 인연의 끈을 한 올 한 올 풀어내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남편이 낯선 손님들을 집으로 계속 데려오기 시작했어요. 몸집도 크고, 피부색도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들이었죠. 알고 보니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탈출한 난민들이었어요. 식구가 자꾸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해 어디론가 다시 떠나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입양을 고민할 정도였으니까요.”

난민에게 희망을 전하는 김종철, 박진숙씨 부부의 모습 뒤로, 에코팜므 난민 여성들을 위해 멘토를 자청한 미술가의 재능기부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난민에게 희망을 전하는 김종철, 박진숙씨 부부의 모습 뒤로, 에코팜므 난민 여성들을 위해 멘토를 자청한 미술가의 재능기부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전 세계 난민 수는 총 1050만 명(2009년 UN난민기구 통계)으로, 그 중 박해를 피해 우리나라로 들어온 난민신청자는 3300명(2010년 6월 말 기준)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중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이들은 250명에 불과하다. 난민 인정 기준이 까다롭고, 법에 명시된 처리 기간이 없어 절차가 장기화됐기 때문이다. ‘공익 변호사’ 김종철씨가 이들에게 눈을 돌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탈북자·결혼이주여성 등 이주민의 권리옹호와 소송 절차를 돕는 중에 우리 사회의 절대적 약자는 바로 난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대부분의 난민 신청자들이 그 지위를 인정받기까지 2~3년 걸리고, 소송까지 갈 경우 5년 이상 소요됩니다.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한국에 체류할 수 있는 권리 외에 생계를 위한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합니다. 당장 먹고 자는 것이 문제인데, 일자리는 꿈도 못 꾸죠. 취업허가는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받을 수 있거든요.”

머물 집도, 일할 곳도, 함께할 가족도 없는 난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차가웠다. 인종·종교·정치·사상 등의 박해를 피해 목숨 걸고 탈출했지만, 또 다른 종류의 차별과 편견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렵게 난민 지위를 획득해놓고, 상처를 안고 떠나는 이들이 생겨났다. 난민들의 한국 사회 적응을 위한 도움의 손길이 절실했다. 이에 김씨는 ‘한글 교실’을 개설해 난민들과 소통의 장을 열었고, 아내 박진숙씨는 한글 교사를 맡았다.

“한글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어요. 난민으로 생활하며 느낀 설움과 아픔이 소통을 막진 않을까 염려도 됐고요. 하지만 첫 수업 날, 교실에 앉아있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고 제 생각이 틀렸단 걸 깨달았어요.”

한 시간 수업을 듣기 위해 왕복 네 시간을 달려왔다. 그런데도 결석은 물론 지각도 없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숙제도 빠짐없이 해왔다. 한국 사회를 이해하고 배우려는 열정과 노력에 박씨는 감동을 받았다.

“소통이 되기 시작하면서, 이분들의 드라마틱한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정부를 위해 일하다가 스파이로 몰려 탈출한 이야기, 밀림 속에서 7년을 숨어 지내다가 극적으로 한국에 입국한 이야기 등 그 과정에서 겪은 인종적, 성적 차별과 고통이 말도 못했어요.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분들의 용기 있는 삶을 존경하게 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력자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옹호자로 제 역할이 바뀌었죠.”

난민 중에는 자국에서 중요한 업무를 담당했거나, 다양한 기술을 배우고 온 전문 인력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에겐 저임금 단순 노동 외의 일은 주어지지 않았다. 한글 교실을 진행하면서 난민들이 가진 재능과 열정을 본 박씨는 이들의 자기계발과 전문성 향상을 돕고 싶었다.

“2007년 말, 캐나다 이주민 월례회의에서 본 그림과 엽서가 모티브가 됐어요. 아프리카 특유의 색감이 돋보이는 유화를 보고, ‘바로 이거다’ 싶었죠. 돌아오자마자 난민 여성분들에게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그림 위에 기름종이를 올려놓고 베끼는 수준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림 속에 풍부한 감성과 색채가 드러나기 시작했고,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에코팜므 난민 여성들이 만든 핸드메이드 도예 접시.
에코팜므 난민 여성들이 만든 핸드메이드 도예 접시.

여성가족부의 다문화공방사업 지원금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한 해에 40번 이상 전시회를 열면서 전문성을 더해갔다. 그리고 2009년 5월, 박씨는 이주 여성의 치유와 성장, 자립을 목표로 내건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를 설립했다. 지금은 그림·엽서뿐 아니라 문화 콘텐츠 제작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난민 여성이 직접 읽어주는 아프리카 동화, 젬베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주 여성 작가 양성 프로젝트’도 있다. 경력 단절 여성들이 이주 여성들에게 미술 강의를 재능 기부해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아내의 적극적인 모습에 김씨 역시 용기를 냈다. 그동안 법무법인과 난민 지원 NGO에서 활동하던 그는 지난 2011년 1월, 이주자의 권리 옹호·소송·법률교육·입법운동을 위한 공익법센터 ‘어필’을 설립했다. 1년 동안 보인 성과도 놀랍다. 콩고·케냐·에티오피아 등 4건의 난민 사건에서 승소를 했고, UN 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한 ‘이주아동구금에 대한 NGO리포트’ 내용이 권고에 직접 반영되기도 했다. 지난 2011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난민법 역시 ‘어필’에서 초안 작성과 입법 활동에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난민 인정의 가장 중요한 증거가 진술인데, 전문 통역인 없이 절차가 진행되고 있고, 난민신청자를 기간의 제한 없이 구금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있거든요. 하지만 난민의 삶을 공감하고 옹호하는 분들이 늘고 있어 많은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콩고 난민 여성 한 분이 급성 폐렴으로 입원했는데, SNS기부에 참여한 분들 덕분에 수술비 전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김씨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았다.

“에코팜므가 있어 든든합니다. 에코 팜므가 소송 이후 난민들의 케어와 전문 인력 양성을 책임지니, 저는 난민 소송과 권리 옹호 활동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에 박씨가 “우리는 경쟁관계”라며 말을 이었다. “서로 잘하는 부분이 있으면 몰래 따라하거나, 상대방이 실패한 방법은 실행 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시행착오를 줄이고 있어요. 난민이 차별받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응원해주세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서로의 비전을 보완하는 두 사람. 한 발 한 발, 이들이 함께 만들어갈 희망의 발자국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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