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프랜차이즈 카페에 점자 메뉴판 도입을… 여고생 4인방의 빛나는 도전

인화여고 학생들, 점자 메뉴판 프랜차이즈 카페 도입안 청원

 

 

고3의 여름. 대입 준비로 하루 꼬박 책과 씨름하는 이 때, 책 대신 피켓을 들고 거리를 나선 고3 수험생들이 있다.

“시각장애인에게도 선택권이 있습니다.” “점자 메뉴판은 필요합니다!”

지난 5월 16일과 17일, 이들은 동인천역과 부평역, 인천 인화여고 인근에서 서명운동을 벌였다. 프랜차이즈 카페에 점자 메뉴판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단 이틀만에 592명이 서명에 동참했다. 지난달 4일부터 2주 동안 온라인 서명운동도 벌여, 1000명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얼마 뒤 국회로부터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다음달 프랜차이즈 카페 브랜드들과 함께 점자메뉴판 도입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겠다는 것. 지난 3월 시작해 장장 4개월에 걸친 프로젝트의 대단원이 화려하게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국민신문고에 ‘점자 메뉴판 의무 도입’을 청원한
(왼쪽부터) 채현아, 신승은, 이예진, 신현서 양. ⓒ박민영

이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인화여고 3학년에 재학 중인 채현아, 신승은, 이예진, 신현서 양. 어른도 해내기 힘든 일을 19살 여고생들이 해냈다. 이들을 지난 11일 서울 무교동 카페에서 만났다. 

 

◇떡볶이 먹다가 떠오른 궁금증에서 시작…“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게 주문을?”

 

지난 3월 말, 인화여고 4인방은 수업을 마친 뒤 학교 앞 분식집에 모였다. 사회문화 수업 수행평가 과제인 ‘사회에 필요한 정책 찾아 제안하기’를 논의하기 위해서다. 같은 조인 네 학생들은 어떤 정책을 제안할지 이리저리 고민했다. 하지만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자 “일단 먹고 시작하자”며 메뉴판을 보았다.

지난 11일 인터뷰 장소였던 카페베네 동교사거리점에 비치돼 있던 점자 메뉴판. ⓒ박민영

그 순간 채현아(19)양의 머리에서 한 질문이 떠올랐다. ‘시각장애인들은 메뉴판을 못 보는데 어떻게 주문하지?’. 채양의 궁금증은 공감으로 이어졌고 이내 분식집은 활발한 토론장이 되었다.

인화여고 4인방의 ‘시각장애인용 점자 메뉴판 도입’ 프로젝트의 첫 단추가 꿰어지는 순간이다.

“3월 말 분식집에서 주제를 정하고 4월부터는 쉬는 시간과 방과 후 시간 틈틈이 인터넷 검색을 하며 자료를 모았어요. 그 결과 ‘카페베네’와 ‘피자헛’에서 시각장애인용 점자 메뉴판을 도입했다는 기사 외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식당 등을 이용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러나 두 업체의 점자 메뉴판 사업도 이미 사라졌거나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채현아)

신승은(19)양은 “피자헛은 이미 90년대 후반에 점자 메뉴판 사업을 철수했고 카페베네가 국내 프랜차이즈 카페로는 유일하게 점자 메뉴판을 보유하고 있었다”면서 “그런데 서울 인천 지역의 카페베네 174곳에 직접 전화해 조사해 보니 점자 메뉴판을 보유하지 않은 곳이 98곳, 보유한 곳이 39곳이었고 나머지 37곳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카페베네 점자 메뉴판을 펼쳐본 모습. 글자 대신 점자가 인쇄돼 있다. ⓒ박민영

“카페베네 본사 고객센터에 연락해 보니, 2014년 시각장애인용 점자 메뉴판을 전 지점에 도입했는데 인쇄 비용과 시간이 많이 걸려 메뉴판 업데이트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장애인 차별 금지법 조항에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같이 동등하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동등한 선택권을 보장 받기 위하여 필요한 서비스의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대요.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시각장애인들도 비장애인처럼 스스로 무엇인가를 선택, 주문할 수 있나요? 아니잖아요. 이건 명백한 차별이죠.”(신승은)

실제 기자가 카페베네 본사에 문의한 결과, 점자 메뉴판 제작 및 교체가 중단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관계자는 “일부 메뉴를 갱신할 때마다 점자 인쇄를 고쳐야 하는데, 점자 인쇄는 상대적으로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발생해 바로 적용하기가 어려웠다”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점자 메뉴판과 실제 메뉴 내용이 달라 점원이 직접 안내하고 있으며, 앞으로 정기적인 점자 메뉴판 업데이트를 검토해보겠다”고 밝혔다.

 

◇‘현실적 대안’이어야 변화 이룰 수 있어

 

좋은 취지와는 달리 모든 상점, 식당 등에 점자 메뉴판을 의무적으로 도입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국민 신문고에 모든 가게에 점자 메뉴판 보급을 의무화하자는 청원을 낸 상태였지만, 정부는 영세 사업주에 대한 부담을 증가시킨다며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 것.

인화여고 4인방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민영

현실적으로 가능한 청원이어야 했다. 이에 인화여고 4인방은 실행 범위를 ‘프랜차이즈 카페’로 좁히기로 결정했다.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충분히 점자 메뉴판을 실행할 수 있는 자본력과 행동력이 있다고 판단, 정부에서 어느 정도의 보조금을 지원해 준다면 이 법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책의 구체적 범위를 정한 뒤 이들은 인천 시각장애인 복지관을 찾아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다. 신현서(19)양은 “복지관 직원들은 시각장애인들은 식당, 카페 등을 이용하려면 주변의 도움을 받거나 사전에 인터넷 및 배달 관련 앱을 통해 메뉴를 알아 가야 한다는 고충을 털어 놓으면서도 법 제정에 대해서는 ‘비장애인들의 시선’과 ‘비용문제’를 지적했다”고 했다.

이에 우선 학생들은 지난 5월 사람들이 점자 메뉴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퇴근시간 유동인구가 많은 동인천역과 부평역, 등교시간 인화여고 앞에서 시각장애인 점자 메뉴판 보급에 대한 의견을 조사했다. 투표에 참여한 시민 593명 중 560명이 찬성했으며 세금낭비, 실용성 등의 문제로 총 투표수의 5.5%에 해당하는 33명만이 반대했다. 또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해 1036명의 찬성 서명도 받았다. 법 필요성에 대해서 다수의 시민들이 공감하는 셈이었다.

지난 5월 인화여고 4인방은 부평역에서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채현아

다만, 비용이 문제였다.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도입 비용이 크면 정부가 정책 시행에 부담은 느낄 것은 물론 반대 여론도 조성될 수 있기 때문. 이들은 비용 문제를 초기 비용과 유지비용으로 나눠서 해결책을 생각해보고, ‘서울점자도서관’에 구체적 대안을 문의했다.

“결과는 긍정적이었어요. 서울점자도서관 측은 점자 메뉴판 생산을 담당해줄 수 있고, 전국의 100개 이상 매장을 보유한 프랜차이즈 카페 등에서 대량 주문을 하게 되면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고 했어요. 또 메뉴를 변경 및 추가해야 할 때는 서울점자도서관 등에 점자 스티커 제작을 의뢰해 메뉴판에 붙이는 형식을 취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고요. 즉 초기 제작 비용을 어느 정도 정부가 지원해주면 점자 메뉴판 도입이 아주 먼 얘기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예진·19)

정책 도입 필요성에 대한 현장과 대중 의견을 모은 학생들은 지난 5월 29일 이런 내용을 종합적으로 담은 입법 청원서를 국민 신문고에 제출했다. 마침내 지난달 12일 국회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전해 왔다.

 

◇“더불어 사는 사회 만드는 어른이 될 거예요”

 

인화여고 학생들이 국민신문고에 청원한 내용. ⓒ채현아

 

“프랜차이즈 카페 점자 메뉴판 도입 청원을 한 학생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지난달 12일 배효빈 인화여고 사회문화 담당 교사는 김준헌 국회의장 비서실 비서관으로부터 인화여고 4인방을 만나고 싶다는 전화를 받았다. 일주일 뒤인 19일 김 비서관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 청원에 대한 결과를 설명했다.

“김 비서관님이 도입 비용 등 여러가지 문제로 점자 메뉴판 도입을 의무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국회가 적극 노력하겠다고 하셨어요. 이미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기업 몇 곳에게는 점자 메뉴판 도입을 제안했으며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고 합니다.”(채현아)

다음달 중순에는 국회에서 프랜차이즈 카페 기업과 국회, 시각장애인들이 모여 점자 메뉴판 도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도 개최될 예정이다. 4인방은 수행평가 과제에서 시작한 프로젝트가 실제 사회 변화로 나타났다며 기뻐하면서도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는 4인방 스스로의 변화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사회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힘을 모아 목소리를 내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이 생긴 것. 삶의 태도도 많이 변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수능 준비로 학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자원봉사나 사회공헌 활동에도 많은 관심이 생겼단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꿈꾼다는 인화여고 4인방들. 수능이 끝난 뒤 함께 사회 공헌 활동을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박민영

신승은양은 “동인천역에서 서명운동을 할 때 한 시각장애인이 다가와 우리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그 때 느꼈던 떨림 덕분에 힘든 수험생활에도 이 프로젝트를 이어갈 수 있었다”면서 “예전엔 시각장애인의 고충을 잘 모르고 관심도 없었는데 이번 과제를 계기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을 계속 해나가고 싶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신현서양은 이번 프로젝트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고 말한다. 사회적기업가가 되고 싶은 현서양은 이번 기회에 시각장애인 문제를 공부해봤으니 다양한 사회 문제와 시민사회 영역을 경험해 볼 계획이다.

“승무원, 연극배우, 사회적기업가, 공연연출가 등 우리의 꿈은 다 다르지만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바로 장애인이라고 차별받지 않고 돈이 없다고 불행하지 않은, 더 나은 세상이요. 시간이 흘러 모두 각자의 자리에 서게 될 때 다시 한 번 힘을 뭉칠 거예요. 그게 봉사가 되었든 정책 청원이 되었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계획할 겁니다. 그 때 다시 한번 우리를 인터뷰해 주세요.”(신현서)

해맑은 미소로 기자를 맞이하던 소녀들. 인터뷰 후 한 뼘 더 커 보였다. 19살,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지만 여느 어른보다 더 성숙한 고민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몇 년 후 이들을 다시 인터뷰할 날이 기대된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