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저시력 아동지원 실태_장애등급 낮아 ‘지원 사각지대’… “보조기구로 편하게 책 봤으면”

‘전맹’ ‘실명’ 아니지만 일상생활 불편
저시력人 약 50만명… 지원 턱없이 부족
독서확대기 지원은 5년간 1700대뿐

미상_그래픽_저시력_눈물_2011“왜 필기를 안 하냐느고 수업 도중에 선생님께 막 혼난 적도 있어요. 저는 선생님이 칠판에 다 쓰시고 설명을 해주셔야 그 목소리를 듣고 필기를 할 수 있거든요. 칠판 바로 앞 맨 첫째 줄에 앉아도 글씨가 안 보여요.”

지난 12일, 경기도 군포시의 한 중학교에서 만난 은희(가명·15)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흔히들 쓰는 안경을 썼다는 것 이외에 겉모습만 봐서는 은희의 눈이 불편하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은희는 ‘선천적 시신경 위축’으로 인한 4급 시각장애인이다. 은희는 “나중에 크면 라식 수술을 해서 눈이 좋아질 수도 있다”며 웃었지만 은희의 눈은 교정이 어렵다. 안경을 써도 마찬가지다. 은희는 특히 글자나 숫자를 읽기 어렵다. 책을 읽으려면 7cm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코를 박고’ 들여다봐야 하고, 흔히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물건의 사용설명서 같은 것은 아예 읽을 수가 없다. 은희는 “음식점에서 메뉴판이 벽에 붙어 있으면 주문을 하기가 어려워 늘 먹던 것을 먹는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차를 보면 피할 수 있다”는 은희는 커다랗게 쓰여있는 길가 아파트 이름은 읽지 못했다. 은희는 시력이 남아 있어 완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전맹’이나 ‘실명’만큼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이 불편한 ‘저시력’인이다. ‘저시력’이란 최대로 교정한 시력이 0.3 이하이고 시야가 30도 이내로 좁아져 특별한 기구의 도움이 없으면 일상생활이 불편한 상태를 말한다. 저시력은 백내장, 녹내장, 망막색소변성증 등 다양한 선천적, 후천적 질환 때문에 시력장애를 겪는 상태로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하다.

책에 코를 바짝 붙여야 글을 읽을 수 있는 은희는 책상에 받침대를 기울여 설치했다. 저시력 아동들은 학습과 독서를 할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
책에 코를 바짝 붙여야 글을 읽을 수 있는 은희는 책상에 받침대를 기울여 설치했다. 저시력 아동들은 학습과 독서를 할 때 가장 어려움을 겪는다.

은희의 꿈은 공무원이나 사회복지사가 되는 것이다. 은희의 어머니 김미영(가명·38)씨가 꿈을 정해주었다. 김씨는 “눈이 나쁜 은희는 하다못해 편의점 알바도 하기 힘들기 때문에 공부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희가 어머니의 일방적인 충고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김씨 역시 선천적 시신경 위축으로 인한 저시력인이기 때문이다. 저시력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유전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은희의 외할아버지, 외삼촌과 세 명의 이모 중 한 명이 모두 저시력인이다. “은희가 7살 때 저시력 판정을 받았을 때 나랑 똑같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는 김씨는 버스번호가 보이지 않아 은희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에 한 시간씩 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눈이 붉어졌다.

김씨는 저시력인으로서 살면서 가장 힘든 점으로 ‘비장애인처럼 보이고, 보여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공부하면서도 자신이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그냥 눈이 조금 나쁠 뿐’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이다. 시력검사표를 외워 어린이집에 취직을 한 김씨는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학부모들이 “아이 얼굴에 왜 상처가 났느냐”라고 물어오면 답하기가 어려웠다. 1년 전 어린이집을 그만두고 한국 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일하게 된 김씨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일하게 돼 마음이 한결 편하지만, 이곳에서도 일부 비장애인 직원은 겉모습이 멀쩡한 나를 깜박하고 자료를 빨리 넘기거나 설명을 지나쳐버린다”며 아쉬워했다 김씨는 “은희도 아예 특수반이면 보조기구도 활용하고 공부하기가 나을 텐데, 일반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다 보니 ‘은희의 사정만 봐줄 수 없다’고 말하는 선생님을 만난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은희와 은희 어머니처럼 국내에 등록된 시각장애인 중 저시력 장애인은 5만7000명 정도다. 그러나 장애등급을 받지 않은 저시력인을 포함하면 국내 저시력 인구는 약 5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김안과 병원 김응수 교수는 “장애등급을 받으려면 0.2 이하여야 하는데 보통 저시력의 범주에 드는 최대 교정시력 0.3 이하는 등급을 받을 수가 없다”며 “많은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장애표시를 심어주기 싫고, 전맹이 아니면 낮은 장애등급을 받기 때문에 실질적인 혜택이 없어 장애인 등록을 꺼리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저시력인들은 일상생활에는 상당한 제약이 있지만 사회적 관심과 지원에는 배제된 복지 사각지대에 있다. 실제로 은희의 가족이 저시력인이라서 받는 지원은 거의 없다. 매달 받는 은희의 장애아동수당 10만원과 은희 어머니의 3만원은 경증장애인이면서 형편이 어려운 ‘차상위계층’이라 받는 것이다. 저시력인에게는 인쇄물의 글씨를 확대하거나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보조기구 지원이 절실하지만, 보건복지부가 시각장애인용 보조기구 4종을 포함해, 청각·지체·뇌병변 장애인을 위한 12종의 보조기구에 대해 올해 책정한 예산은 17억6000만원에 불과하다. 시각장애인용 독서확대기 하나의 가격이 100만~400만원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다. 이마저도 장애등급을 고려해 지급하기 때문에 장애등급이 낮은 저시력인들은 지원을 받기 어렵다. 장애인 보조기기 보급사업의 90%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저시력인에 지원한 독서확대기수도 5년간 1700대뿐이다.

전국저시력인연합회 미영순 회장은 “한국장애인 복지제도는 장애인이 경증일 때 미리 예방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수급자가 되어 넘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원금만 약간 준다”며 “저시력인에게 필요한 보조기구와 재활치료를 지원하면 장애인 복지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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