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토)

“우리 딸 영화감독 다 됐네”

청소년들이 직접 만드는 영화
현대자동차·아르콘이 함께하는 아트드림 영화 제작소

6개월간 영화 인문학·제작 실습 등 배워
영화감독이 멘토로 지원… 총 6작품 상영

시나리오 작성부터 배우 섭외, 촬영까지
영화 제작 전 과정에 학생들이 직접 참여

“소년은 칠판 앞에서 수학 문제를 풀다 말고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본다. 반 친구들과 선생님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자막과 함께 음성이 흘러나왔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 250명이 작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는 장면이 나오자 ‘문 열리는 소리’, 남자 주인공이 기타를 건드려보는 장면에선 ‘기타 치는 소리’란 자막이 스크린 아래 떴다. 이에 관객의 일부는 눈을 감고, 일부는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영화 관람을 계속했다. 시·청각 장애인도 즐길 수 있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영화였다.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한 소년의 하루를 그린 단편영화 ‘어게인(Again)’의 상영이 끝나자, 학생 6명이 무대 위에 올랐다. 영화 관람 후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스트 비지트(Guest Visit)’ 시간을 가진 이들은 진지하게 제작 의도를 털어놓았다.

‘아트드림 영화제작소’ 청소년 영화제가 지난 14일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렸다. 시각 및 청각 장애인도 관람이 가능한 배리어프리 영화 2편을 포함, 단편영화 6편이 상영됐다.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제공
‘아트드림 영화제작소’ 청소년 영화제가 지난 14일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렸다. 시각 및 청각 장애인도 관람이 가능한 배리어프리 영화 2편을 포함, 단편영화 6편이 상영됐다.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제공

“배리어프리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장애인 세 분을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도 계셨어요.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인터뷰 녹음본을 다시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김수연(가명·17)

지난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진행된 ‘아트드림 영화제작소’ 청소년 영화제 현장이다. 아트드림 영화제작소는 영화 제작에 관심이 많은 저소득·한부모 가정 등 취약 계층 청소년 49명(만 14~18세)에게 영화 교육 및 제작 기회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로, 현대자동차그룹과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가 진행하는 사회공헌 사업이다. 지난해 8월부터 집중 단편영화 제작 워크숍, 영화 인문학 강의, 배리어프리 영화 제작 실습 등 다양한 커리큘럼이 진행됐다. 이날은 학생들이 6개월간 배운 노하우를 바탕으로 최종 작품 6편을 상영하는 날로, 이 가운데 청소년 영화 인재로 선발되면 대학 전까지 영화 제작비·교육비 지원이 이어진다.

인재 발굴 프로젝트답게 유명 영화인들이 멘토로 활약, 6개월간 학생들과 함께했다. 영화 ‘수상한 그녀’의 황동혁 감독, ‘방황하는 칼날’의 이정호 감독, ‘도둑들’의 김철수 PD 등이 선뜻 아이들의 멘토를 자청하고 나선 것. 멘토의 열정만큼 학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김찬재(가명·17)군은 매주 경기도 연천에서 서울까지 왕복 6시간을 반납하며, 아트드림 영화제작소에 참여했다.

영화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시간.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제공
영화 상영 후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시간.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제공

“자고 일어났더니 단체 카톡방에 메시지가 수백 통 와 있더라고요. 멘토 선생님이 밤새도록 저희 팀원들에게 조언을 해주신 거죠. ‘이 장면은 왜 이렇게 구성했을까’라며 깊이 고민하게 만드는 과제를 내주시기도 하고요. 그럴 때면 연천에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오게 돼요(웃음). 덕분에 6개월간 단 하루도 결석한 적이 없어요.”

지역아동센터 추천으로 참여하게 됐다는 남혜선(가명·15)양은 “내가 직접 만든 시나리오가 벌써 4편이지만, 매번 어떻게 써야 잘 쓴 시나리오인지 고민이 많았다”면서 “어제도 멘토 교수님이 이메일로 조언해주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고 귀띔했다.

영화 제작 방법뿐만 아니라 콘텐츠 구성을 위한 교육을 진행하는 점이 아트드림 영화제작소의 특징이다. 강민혜진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예술키움본부 파트장은 “영화를 만드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콘텐츠를 키우려면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하다”면서 “영화 인문학 강의를 5차례 구성해 깊이를 더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날 상연된 영화 6편은 학생들이 시나리오 작성부터 배우 섭외, 연출, 음향, 조명, 편집 등 시작부터 끝까지 도맡아 만들어 낸 작품이다. 그만큼 영화 제작 과정에서 에피소드도 많았다. 배리어프리 단편영화 ‘간장도둑’을 제작한 팀원들은 배우 섭외 과정의 어려움을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단역배우로 출연해줄 아저씨를 구하기 위해 촬영 30분 전까지 서울 마포구 아현동 가구거리를 뛰어다니기도 했어요. ‘저희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주실 수 있으세요?’ 무턱대고 물어보니 퇴짜 맞기 일쑤였죠. 다행히 섭외에 성공했지만, 그 일 생각하면 등에 식은땀이 흘러요.”

이날 청소년 영화제에는 아트드림 영화제작소에서 활동한 학생들의 가족 및 지인, 영화 관계인 등 총 170여명이 관객으로 참여했다. 영화 상영회가 시작하기 전, 방문객들이 방명록 및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제공
이날 청소년 영화제에는 아트드림 영화제작소에서 활동한 학생들의 가족 및 지인, 영화 관계인 등 총 170여명이 관객으로 참여했다. 영화 상영회가 시작하기 전, 방문객들이 방명록 및 응원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제공

아트드림 영화제작소 학생들이 제작한 영화가 한 편씩 상영될 때마다 객석에선 박수가 쏟아졌다. 윤재선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집행위원장은 “1~2분 정도 눈을 감고 배리어프리 영화를 느껴봤는데, 내레이션이 묘사를 참 잘하더라”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면 영화가 산으로 갈 수 있는데, 참 잘 만들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소감도 남달랐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김혜린(가명·17)양은 “부모님이 치과의사나 한의사가 되라고 하실 때마다 속상했는데, 오늘 아빠가 내 영화를 보시곤 ‘내 딸 영화감독 다 됐네’라며 기뻐하셨다”고 말했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내성적이라 친구들이 자기 이름조차 몰랐다던 박은성(가명·16)군은 “예전엔 다른 사람의 말을 듣기만 했는데, ‘이 장면에서 이런 조명을 써보자’라며 제 생각을 말해보니, 협동도 잘되고 작품도 잘 만들어졌다”면서 “꼭 조명 기술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이병훈 현대차그룹 사회문화팀 이사는 “영상은 요즘 청소년들에게 ‘1인 매체’일 정도로 친숙하고 인기가 많은데, 아트드림 영화제작소는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영화인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라며 “더 많은 청소년 영화 인재를 발굴·지원하기 위해 아트드림 영화제작소 2기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아트드림 영화제작소 학생 49명이 제작한 영화는 오는 10월까지 각종 영화제 등에 출품될 예정이다.

정유진 기자

정수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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