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기부 바통터치·한 평 공간체험… 모금 마케팅이 변한다

나눔·감동 두 마리 토끼 잡는 기부 캠페인

라이스 버킷 챌린지
쌀 30㎏ 못 들면 기부 후 참가자 지목… 릴레이 형식이라 확산 효과 커

“아유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무거운 걸….”

폐질환으로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아 생활하는 이정자(69·경기 수원시) 할머니가 한가득 쌀을 지고 온 동사무소 관계자를 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김종호(64) 할아버지는 “얼마 전 옆방에 살던 양반이 쓰러졌는데, 이 쌀 한 포대(10㎏)면 우리 둘이서 보름은 먹을 수 있겠다”며 “겨울에는 난방비 부담 때문에 특히 더 힘든데, 봉사자들이 이렇게 찾아와 쌀까지 주니 참 고맙다”고 했다.

지난 15일 종로 쪽방촌을 찾은 정세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라이스 버킷 챌린지’로 모인 쌀을 나눠주고 있다. /나눔스토어 제공
지난 15일 종로 쪽방촌을 찾은 정세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라이스 버킷 챌린지’로 모인 쌀을 나눠주고 있다. /나눔스토어 제공

칼바람이 매서웠던 지난 12일 오후. 경기도 수원의 평동주민센터로 낯선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사회적기업 ‘나눔스토어’의 기부 캠페인 ‘라이스 버킷 챌린지’를 통해 모인 쌀 2000㎏을 인근 쪽방 주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라이스 버킷 챌린지는 루게릭 환자를 돕기 위해 얼음물을 뒤집어쓰는 릴레이 캠페인 ‘아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착안한 것으로, 참가자가 쌀 3포대(30㎏)를 들지 못하면 쪽방촌에 쌀을 기부한 뒤 다음 참가자 두 명을 지목하는 방식이다. 지난해 12월 3일 시작돼 현재(2월 13일 기준)까지 230여명이 참가해 1만360㎏을 기부했다. 이렇게 모인 쌀은 수원을 시작으로 부산(3360㎏)과 인천(2000㎏), 서울(3000㎏) 등에 전달됐다.

릴레이로 진행되는 라이스 버킷 챌린지에서 캠페인 참가자는 기부자이자 펀드레이저(fund raiser·모금가)다. 쌀가마 5포대를 짊어졌던 이재준 수원제2부시장은 손혁재 수원시정연구원장과 이내응 수원시체육회 사무국장을 다음 도전자로 지목하고, 전달식에도 직접 참여해 일손을 보탰다. 자발성이 높은 만큼 확산 효과도 크다. 라이스 버킷 챌린지 물결을 본 김병기 경기신용보증재단 이사장은 나눔스토어에 직접 전화를 걸어 지게 도전에 참가하고 쌀 100㎏을 기부하면서 다음 타자로 최금식 경기도시공사 사장과 곽재원 경기과학기술진흥원장을 지목했다. 서윤성 나눔스토어 대표는 “거리에 부스를 설치해서 호객하듯 기부자를 모으던 옛날 방식으로는 진정성 있는 기부를 끌어내는 데 한계가 있는데, 이렇게 선뜻 나서줄 기부자를 릴레이식으로 추천하면 성공률도 높고 확산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기부자를 펀드레이저(모금담당자)로… 나눔스토어의 ‘라이스 버킷 챌린지’, 월드비전의 ‘오렌지액트’

지난해 국내 모금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던 아이스 버킷 챌린지 캠페인 영향일까. NGO 모금 캠페인에서 기부자가 직접 펀드레이저로 나서는 활동이 확산되고 있다. 월드비전이 지난해 11월부터 시범 운영 중인 ‘오렌지액트(orangeact.worldvision.or.kr)’도 비슷하다. 후원자가 자신만의 모금 페이지인 ‘액트 페이지’를 개설, 목표액과 기간을 정하고 SNS를 통해 홍보에 나서는 형식이다. 액트페이지는 월드비전이 선정한 프로젝트 안에서 자유롭게 개설할 수 있는데, 후원자가 직접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것도 가능하다. 실제로 후원자 성박현(24·백석대 4년)씨는 지난달 28일, 후원 아동의 수술비를 마련하고자 액트 페이지를 개설해, 만 하루 만에 수술비 160만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참가자 502명이 액트 페이지를 572개 개설해 1800여만원을 모았다. 오는 4월 결제 과정을 더 간소화한 정식 버전이 출시되면 참여자와 모금액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김수희 월드비전 홍보팀 과장은 “20~30대 후원자가 증가하면서 단순히 돈만 내는 수동적인 활동을 넘어, 더 극적으로 나눔 활동에 참여하길 원하는 후원자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컴패션 체험전’은 필리핀 세부 쓰레기 마을에 사는 후원 어린이 알조가 현지에서 겪는 가난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현지 쓰레기 언덕과 각종 물품을 그대로 재현했다. /한국 컴패션 제공
‘컴패션 체험전’은 필리핀 세부 쓰레기 마을에 사는 후원 어린이 알조가 현지에서 겪는 가난의 현장을 체험할 수 있도록 현지 쓰레기 언덕과 각종 물품을 그대로 재현했다. /한국 컴패션 제공
단원고-시리아 청소년 공동 사진전 ‘서울, 자타리를 만나다’가 2월 6일부터 18일까지 안국역 인근 57가 갤러리에서 열렸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단원고-시리아 청소년 공동 사진전 ‘서울, 자타리를 만나다’가 2월 6일부터 18일까지 안국역 인근 57가 갤러리에서 열렸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후원자를 열성팬(fan)으로… 컴패션의 ‘후원 아동 체험전’, 유니세프의 ‘부모 교육’ 강좌

지난 3일, 서울 시민청 지하 1층 한편에 10평 남짓한 집 한 채가 들어섰다. 허름하고 악취마저 나는 이곳은, 한국 컴패션이 후원 중인 알조(12)군의 집을 그대로 재현한 것. 알조는 필리핀 세부의 쓰레기 마을에 사는 아이다. “1평짜리 방 한 칸에 친구 5명이 들어가 봤어요. 알조가 일곱 식구와 함께 사는 방이래요. 사진으로 봤을 때는 막연히 ‘어렵겠다’ 정도만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 울컥하더라고요. 이 정도로 열악할 줄은 몰랐거든요.” 학교 동아리 학생 4명과 함께 체험전을 방문한 구다니엘(18·송도 체드윅 국제고)군의 말이다. 구다니엘군은 작년부터 동아리 친구들과 컴패션을 통해 한 아동을 후원 중이다. 2년째 컴패션을 후원 중인 조유미(여·23·경기 포천시)씨는 체험을 마치고 눈물을 보였다. 조씨는 “아이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을 느껴보니, 편지 쓰고 후원금 보냈던 활동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고 했다. 함께 온 강재진(여·25·경기도 고양시)씨는 체험 후 한동안 중단했던 컴패션 후원을 재개하기로 했다. 지난 3일부터 10일간 진행된 체험전에는 총 1685명이 다녀갔는데, 대부분 기존의 컴패션 후원자다. 최형순 한국컴패션 마케팅팀 과장은 “현지에 직접 가지 못하는 후원자들이 자신의 후원금을 통한 변화를 직접 느끼게 하기 위해 마련했고, 후원자들에겐 개별적으로 초청장도 보냈다”며 “컴패션의 활동이 가난한 아이가 자립할 때까지 지원하는 장기 전략이기 때문에 기존 후원자를 대상으로 하는 소통 프로그램에 특히 공을 들이고 있다”고 했다. 컴패션 측은 최대한 실제와 비슷한 현장을 재현하기 위해 체험전에 쓰인 물품 대부분을 필리핀에서 직접 공수했다고 한다.

이처럼 기존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굳건한 관계를 형성, 장기 후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NGO들의 노력이 점차 늘고 있다. 유니세프가 후원자를 대상으로 지난해 12월부터 시작한 ‘부모 교육’ 강좌도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해 12월, 후원자 40여명이 참여했던 강좌는 올해부터 지방 순회 활동으로 확산될 예정. 한편 유니세프에서는 지난해부터 ‘후원자 토크콘서트’ 자리를 마련, 후원자들에게 기관이 하는 활동을 구체적으로 공유하며, 나눔에 대한 특강이나 공연 관람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후원자를 넘어 세계 시민으로… 세이브더칠드런의 ‘단원고-시리아 전시회’, 국경없는의사회 활동

비영리기관이 자체 사업 소개나 홍보에 주력하는 것을 넘어, 직면한 문제를 널리 알리고 이에 대한 개선 활동(일명 어드보커시(advocacy) 활동)에 주안점을 둔 움직임도 강화되고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지난 6일부터 12일간 진행했던 단원고-시리아 청소년 공동 사진전 ‘서울, 자타리를 만나다’가 대표적이다.

세이브더칠드런은 2013년부터 절망 속의 아이들이 예술을 배우면서 일상으로 회복하도록 돕는 ‘하트(H.E.A.R.T)’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내전을 피해 요르단 자타리 난민촌 캠프에서 살고 있는 시리아 청소년들에게 사진을 가르쳐왔다. 지난해 8월부터 세월호 사건으로 큰 상처를 경험한 안산 단원고 학생 17명도 이 프로그램에 동참했다. 지난 18일 막을 내린 전시회는 한국과 시리아 학생들의 작품 84점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했던 자리다.

김승진 세이브더칠드런 커뮤니케이션부 부장은 “관람객들이 아이들을 도와줘야 할 대상이 아닌,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주체적인 아이로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한 행사”라고 했다. 기관 홍보를 최대한 자제한 이유다. 이번 사진전엔 총 1500여명 이상 다녀간 것으로 집계됐다. 두 번이나 사진전을 찾았다는 박윤정(여·23·서울 노원구)씨는 “시리아·세월호 둘 다 어둡고 우울한 상황이라 사진이 무거울 줄 알았는데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 일상을 보면서 마음이 편해졌다”며 “그 아이들도 우리랑 똑같이 행복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국제 의료 구호 단체 ‘국경없는의사회’는 감성을 자극하는 일명 ‘눈물 마케팅’보다는 현장의 사례와 자료, 데이터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는 홍보 방법을 쓴다. 지난 1월, 현장 의사들의 활동을 바탕으로 ‘올바른 백신(The Right Shot)’ 개정판을 발표, 불합리한 백신 가격을 공개하며 후원자들의 동참을 촉구하기도 했다.

권보람 기자

강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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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