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금)

얘들아, 네 멋대로 해라… 꿈이 보일 때까지

대안학교 양업고 초대교장 윤병훈 신부

강요 대신 기다리는 학교
처음 세운 교칙은 ‘자유’… 담배 피우는 아이들에게 아예 흡연터 만들어주니 잘못 깨닫고 스스로 없애

교과서 밖으로 세상 공부
학생들이 직접 기획해 자신만의 여행 떠나… 선택할 기회 주어지자 하나둘씩 인성 나아져

인간쓰레기 학교가 들어선다고 소문이 났다. ‘우리 지역 결사 반대’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렸다. 퇴짜 맞기도 여러 번. 터를 찾아 학교를 짓고 첫 신입생을 받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1998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시골 산자락에 들어선 정규 인증 대안학교 ‘양업고등학교’ 이야기다. 올해로 양업고가 만들어진 지도 17년, 학교 밖 아이들만을 위한 ‘꼴통 학교’로 소문났던 학교에, 이제는 들어가려는 학생들이 줄을 섰다. 한 학년에 40명, 전교생 120명 남짓 되는 작은 학교의 지난해 경쟁률은 6대 1. 전국 각지에서 교사 연수 문의도 쏟아진다. 국내 인기를 넘어, 세계적으로 훌륭한 ‘교육 롤모델’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 전 세계에서 22번째로 WGI(William Glasser International)의 ‘좋은 학교(Quality School)’ 인증을 받은 것이다. 세계적 교육심리학자 윌리엄 글라서(William Glasser)의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WGI 평가는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관계’, ‘교사·학생·학부모 등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학교’ 등 다섯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만 주어진다. 입시 위주의 교육열이 뜨겁기로 유명한 아시아 국가 중에 ‘좋은 학교’ 인증은 양업고가 유일하다.

양업고등학교 제공윤병훈 신부는 "만나는 부모마다 '겨울, 여름방학 때 애들 학원 보내지 마시라'고 강조한다"며 "아이들은 여러 체험을 통해 세상 보기를 할 때 상상력과 자발성, 자기 주도성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사진은 윤 신부와 양업고 아이들의 모습 /양업고등학교 제공
양업고등학교 제공윤병훈 신부는 “만나는 부모마다 ‘겨울, 여름방학 때 애들 학원 보내지 마시라’고 강조한다”며 “아이들은 여러 체험을 통해 세상 보기를 할 때 상상력과 자발성, 자기 주도성을 기를 수 있다”고 했다. 사진은 윤 신부와 양업고 아이들의 모습 /양업고등학교 제공

지난 세월의 굴곡엔 윤병훈 양업고 초대 교장신부(현 청주교구 산남동 성당 주임신부)가 있었다. 2013년 정년퇴임하기까지 양업고와 함께 호흡해온 그는 포스코 청암교육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학교 밖 청소년 10만명’이라고 사회적으로 시끌시끌했어요. 학교에서도 내몰린 아이들이니까, 얘네들이야말로 교회에서 품어야 하겠더라고요. 무턱대고 주교님, 교육감 찾아가서 설득했더니, 흔쾌히 지지해주시더라고요. 사실 난 어디 폐교(廢校) 자리 하나 주면, 수리해서 아이들 받으면 되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문제아, 중도 탈락자 위한 학교 생긴다’고 기사 나가면서, 부지 찾는 것부터 고생 좀 했어요.”

사실 윤 신부에겐 ‘신부’란 호칭만큼 ‘선생’이란 칭호도 익숙하다. 대학 졸업 후 4년간 윤리 교사로 교직 생활을 하다 느지막이 신부가 됐고 이후에도 계속 가톨릭계 학교 현장에 있었다. 20여년 동안 “학생들이라면 만나볼 만큼 만나왔다”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꼴통 학교, 첫걸음을 딛다

“첫해 43명이 지원해서 37명이 입학했어요. 초기엔 학교 밖 중퇴 학생들만 받았거든. 그런데 상상 이상이더라고. ‘뭐 이런 자식들이 다 있나’ 싶어 욕이 튀어나올 때도 있었지.”

자그마한 학교는 순식간에 담배꽁초로 뒤덮였다. 낮시간 내내 자던 아이들은 밤만 되면 밖으로 돌았다. 일진회·조폭 문화가 그대로 학교로 옮겨와 여기저기서 힘겨루기 싸움질이 벌어졌다.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아이도 많았다.

학교에도 원칙이 필요했다. 그래서 세워진 원칙이 바로 ‘자유’다. 규칙을 강제로 들이미는 대신 기다리기로 했다.

“아이들이 자랄 때 부모나 학교가 든든하게 지지해줬어야 했는데, 그 기반이 약했던 아이들인 거지. 담배나 술이 유일한 기쁨이고 그걸로 응어리진 뭔가를 계속 달래는데, 그걸 비난하고 뺏고 강제하면 또다시 학교 밖으로 나가겠더라고. 애들한테도 ‘나는 담배 뺏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너희가 지금까지 비난받고 간섭받으면서 상처받았을 텐데, 우린 너희를 존중하는 학교를 만들겠다. 단, 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너희 인생의 악습을 버리고 진짜로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되면 좋겠다’고 했죠.”

학교 운동장 입구에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 놓고 ‘흡연터’라 이름붙였다. “애들은 더 나빠지고 성적은 더 바닥이 됐다”며 멱살 부여잡는 부모도 여럿이었다. 장학사와 주변 사람들도 “아무리 신부님이라지만 저건 진짜 아니지 않으냐”며 한마디씩 던졌다. 하지만 고집 센 윤 신부는 “스스로 없애지 않으면 빼앗을 수 없고, 대통령이 와도 못 한다”며 무조건 버텼다.

미상_사진_교육_네팔안나푸르나해외이동수업_2015

◇아이들의 세상 보기, 시작되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불어넣는 일이 뒤를 이었다. 미국 교육심리학자 윌리엄 글라서가 개발한 ‘선택 이론’이 원칙이 됐다.

“개인이 어떤 상황에서 하는 행동과 말은 결국 본인의 머릿속 그림 중에서 꺼내온다는 거예요. 아이들 머리에 있는 작고 부정적인 그림들을 훨씬 더 넓고 다양한 그림들로 바꿔주고 채워줘야 한다고 봤어요. ‘세상은 넓고, 너희는 아름다운 나이고, 앞으로 삶은 길다. 너희가 지금껏 어떤 상처를 받았고 누구를 탓하고 있든, 결국 네 삶을 선택해가는 건 너다. 이제는 더 넓은 세상을 보며, 더 좋은 선택들을 쌓아갈 차례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죠.”

전교생이 3박 4일 지리산 종주를 시작했다. “다시 내려올 걸 왜 올라가야 하느냐”며 내내 불만에 차서 헐떡거리던 아이들이, 정상에 올라선 후 말을 잊었다. 학교 옆 부지엔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 씨를 뿌렸다. 싹이 나고 모종이 자랐다. 아이들을 데리고 중국에도 갔다. 너른 만주 평야에서 감자도 캐보고, 만리장성·자금성·베이징대 등 유명하다는 곳도 다녔다. 충북 시골 학교를 발판 삼아 아이들의 ‘세상 보기’가 시작된 셈. 윤 신부는 “학교 밖에 몰려나가 시시덕거리던 아이들이, 비행기 타고 세상에 나가보고 산 정상에 세워보니 한둘씩 변해갔다”고 했다.

“지리산 다녀온 후에 한 학생이 자기가 지난 밤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해봤다고 해요. 그런데 이해가 안 돼서 한 장을 못 넘겼다는 거예요. 왜 3시까지 버텼느냐고 했더니, ‘관두고 싶은 마음과 밤새 싸웠다’며 ‘그래도 노력하면 못 오를 곳이 없겠죠’ 하더라고요.”

믿어주는 교사와 원하는 걸 선택할 기회가 주어지자,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졸업식장에 한 명도 없을까 두려웠다”는 윤 신부. 3년 후 첫 졸업생 15명이 나왔다.

◇자유롭고 작은 학교, 단단한 공동체

올해로 17년. 해가 쌓일수록 아이들도, 교사도, 학교도, 교장도 함께 성장했다. 아이들이 직접 만든 원두막이 운동장 한편에 놓이고, 중국에 이어 네팔, 인도, 동유럽 등으로 세상 보기를 떠나는 곳도 다양해졌다. 학생들이 여행을 떠나기 수개월 전부터 지역과 문화, 역사를 공부해 경로를 기획하고, 다녀와선 ‘책자 한 권’을 완성해야 한다.

학교의 중요한 일들은 전체 회의를 통해 결정해나가고, 학생과 교사, 교장까지 모두가 1인 1표로 의견을 나눴다. 기숙사 취침 시간, 이성 교제, 수업 내 스마트폰 사용, 담배와 술…. 일반 학교에선 ‘안 돼’라는 말 한마디로 끝났을 이야기가 양업고에서는 며칠에 걸친 토론거리가 됐다. 어느 레벨의 영어 수업을 들을지, 현장 학습은 몇 명이 함께 어디로 갈지 정하는 것도 학생이다. 학생 서넛이 한 팀이 되어, 탐구하고 싶은 주제에 맞는 동선을 짜고, 예산서를 짠다. 함께 가고 싶은 교사를 선택하는 것도 학생들이다. 식사 시간 이후에 교사부터 학생까지 모두가 자기 식판을 닦는 것도 함께 쌓아온 양업고의 문화다.

“학교가 생긴 지 7년쯤 됐을 때, 한 학생이 전체 회의에서 ‘여러분, 이 학교가 놀이터입니까. 우리는 이 학교가 좋고, 이런 학교가 진정한 학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학생이 학생다우려면 이제는 우리가 흡연터를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더라고요. 애들은 막 손뼉을 치고. 그날 만장일치로 흡연터를 없애기로 확정했는데, 제가 참 감동했어요. 다음 날, 흡연터 만든 지 7년 만에 지게차가 와서 컨테이너 박스를 들어다 옮겼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제멋대로 하는 게 아니라, 앞을 내다보면서 자기 의지대로 만들어가는 것인데, 그 사이 아이들도 성장했구나 싶었죠.”

윤 신부는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작은 학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생 120명, 20명 남짓 되는 교사는 작은 공동체를 함께 이뤘고, ‘학부모 공동체’도 학교를 지탱해온 큰 축이다. 면접을 볼 때도, 3차엔 가족 모두가 와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부모님의 가치관과 생각이 학교 방향성과 일치하는지를 중요하게 봐요. 양업고에서 좋은 대학 가거나 해외 가는 아이가 많다니까 오는 건지, 아이들의 자율성을 정말 존중하시는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금방 알거든요. 학교와 가정이 통합적인 교육이 가능할 때, 아이들이 제대로 설 수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전국 각지에서 학부모들이 양업고로 모여든다. 자녀들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교육도 받고, 교사와 깊이 있는 대화도 이어진다. 일 년에 한 번은 학년별로 가족 모두가 참여하는 ‘가족 캠프’도 이뤄진다. 아이를 중심으로, 커다란 공동체가 다져지는 셈이다. 신뢰하는 교사, 인정하는 부모들 사이에서 아이들은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지난 2013년, 정년을 다하고 교장 자리를 넘긴 윤 신부. “학교를 떠나 허전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제는 성당 어린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그간의 ‘교육론’을 퍼뜨리고 있다”며 웃었다.

“교육의 목적은 행복한 인간, 인간다운 인간 만들기예요. ‘대학’이 아닌 ‘삶’을 생각해야 하고, ‘경쟁’이 아닌 ‘관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양업고 한 친구는 졸업하고 키르기스스탄 국립대 러시아어학과에 진학했어요. 동유럽에 다녀온 뒤 러시아 문화권에 관심을 갖게 됐는데, 본인 수능 성적으로 한국외대는 들어갈 수도 없고 가봐야 언어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니 직접 그 나라로 가겠다고 찾아보더라고요. 러시아어-한국어 통역하면서 스스로 학비도 벌어요. 어릴수록 세상 보기가 풍요로워야 합니다. 세상 보기가 빈약하면, 빈약한 인생을 살게 돼요. 부모님들도 입시와 대학이 전부가 아니라는데 눈을 떠야 해요. 든든한 관계망 안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아이들 스스로 설계해나가는 힘을 길러줘야죠. 사람이 바로 서고, 자기 동력이 생기면 이후 공부는 평생을 갑니다. 스스로 행복한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되물으면서요.”

청주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