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화)

“한 해 쌀값·생산량, 함께 회의해 정하고 책임집니다”

한살림 쌀 생산회의

“떡이나 과자 같은 가공 영역에서 분발하면 내년 쌀 생산량을 더 늘릴 수 있지 않을까요?”

“농부들 8㎏짜리 쌀 하나 팔면 560원 법니다. 쌀값 조금 올려야 되는 거 아닙니까?”

여기저기서 쌀 생산량을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가격에 대한 성토(聲討)도 이어졌다. 농사꾼들의 주장 같지만, 이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다. 농민들은 오히려 소비자들을 달랜다. 경남 고성에서 온 쌀 생산자 우동완(51·논두렁공동체) 대표는 “쌀 시장도 개방되고, 경기도 안 좋아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산량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소비자들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안성에서 열린 ‘한살림소비자생활협동조합연합회'(이하 한살림)의 ‘2015년산 쌀 생산 관련 회의’ 풍경이다.

지난해 말 개최되었던 ‘한살림’의 2015년산 쌀 생산 관련 회의 현장. /한살림 제공
지난해 말 개최되었던 ‘한살림’의 2015년산 쌀 생산 관련 회의 현장. /한살림 제공

한살림은 지난 1986년 설립한 생활협동조합이다. 소비자 조합원 수만 48만여 세대로, 국내 생협 중 가장 많다. 이곳에 납품하는 생산자 농민이 2100여 세대로, 이들이 직거래하는 농산물은 연간 3100억원에 달한다. 25년 전통을 가진 쌀 생산 회의는 한살림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보통 시중 쌀값은 도정(곡식을 찧는 작업)하는 시설에서 정해요. 주로 지역의 농협이죠. 그해 벼 생산량, 물가상승률 등에 따라 값이 결정되는데, 농민들과의 협의는 없어요. 농민들이 ‘현실성 없는 가격’이라며 집회에 나서는 이유죠.” 국내 1호 농촌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박종범(35) ‘우리가총각네’ 팀장의 말이다.

한살림의 쌀 회의는 다르다. 직거래 구조 덕분에 ‘흥정’이 가능하다. 소속 농민들이 수확하는 쌀을 50만 세대에 이르는 소비자들이 모두 사주기 때문에 생산량도 산정할 수 있다. 한살림의 철학인 ‘책임 생산·책임 소비’가 지켜질 수 있는 이유다. 어떻게 농사를 짓기도 전에 쌀값과 생산량을 결정할 수 있을까. 한살림 측은 “(쌀 생산회의) 한 달 전부터 생산자·소비자·실무진 등 모든 이해관계자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데, 시중 쌀 가격, 생산 비용, 생협 조합원 수 증가 예측 등을 고려해 기본 가격이 책정된다”고 설명했다.

생산자 130명, 소비자 조합원 60여명 등 190여명이 모인 회의장, ‘한 해 농사’를 미리 결정짓는 중요한 자리지만, 요구와 조건이 난무하는 협상의 자리라기보단 감사와 격려의 장이다. 이날 회의를 주도했던 조완형 한살림 전무이사는 “쌀 생산 회의를 하면 항상 아쉬움과 미안함, 고마움이 장내를 가득 채운다”고 말했다. 회의 끝에 정해진 2015년 쌀 생산량은 7만4000가마(유기농 80㎏ 기준, 수매가는 동결)로, 이는 작년보다 10%가량 늘어난 수치다. 이용건 한살림 농산팀장은 “지난해에 배추값이 폭락했을 땐 소비자들이 (약정대로) 2배 가격으로 배추를 사줬고, 3년 전 배추값 폭등 땐 생산자들이 3분의 1 가격을 감수해줬다”며 “시장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뢰가 우리 농가와 한살림을 지켜왔던 힘”이라고 말했다.

새해가 밝았지만 농민들의 고난은 지금부터다. 올해부터 쌀 시장이 전면 개방됐기 때문이다. 충남 당진에서 농사를 짓는 정광영(70·매산리공동체)씨는 “시중 쌀 시세가 18년 전과 비슷한 수준인데, 퇴비·농기계 등 자재 값은 배 이상 올랐다”며 “농산물 수입이 늘며 우리 것은 점점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했다. 고집과 소신으로 버텨온 친환경·유기재배 농민들의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박종범 팀장은 “해외 쌀은 대부분 큰 업체에 의해 브랜드와 판로를 확보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마트의 매대를 잠식할 우려가 있다”며 “그동안 국내 ‘관행농(농약 재배 쌀)’과 힘들게 경쟁하던 유기 재배 농민들이 더 힘든 경쟁에 내몰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농민들의 불안감을 어루만지려는 소비자와, 그들을 믿고 풍작을 다짐하는 생산자의 소통으로 채워진 ‘2015 쌀 생산 관련 회의’가 더 값져 보였던 이유다.

안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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