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Cover Story] 변화를 꿈꾸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받아들여라

세계 최대 비영리 벤처캐피털 ‘어큐먼’ 재클린 노보그라츠 개인·기업 기부금 사회적기업에 재투자 800만달러 종잣돈에서 9000만달러 성장 투자한 82곳서 만든 일자리만 6만개 인도 구급차·아프리카 모기장 등 투자 “사회적 영향력·기업가 보고 투자한다”

1987년, 일등석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 곳곳을 돌던 스물다섯 살의 국제은행가는 잘나가던 뉴욕 월스트리트 직장을 뒤로한 채 아프리카로 향했다. ‘세상을 바꾸겠노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서. 첫발을 내디딘 지 20여년이 흐른 2011년,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Forbes)는 그녀의 이야기로 표지를 메웠다. ‘세상을 바꾸는 혁신가’라는 이름으로. 세계 곳곳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기업들에 투자하는, 비영리 임팩트 투자기관 ‘어큐먼(Acumen)’의 설립자이자 베스트셀러 ‘블루스웨터’의 저자, 재클린 노보그라츠(Jacqueline Novogratz) 이야기다.

어큐먼 제공
어큐먼 제공

어큐먼은 2001년 창립 이후 지금까지 개인·기업·재단 등으로부터 돈을 기부받아 사회적기업에 재투자해오며, “자선 대신 투자야말로 개발도상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글로벌 펠로 프로그램(Global Fellows Program)’을 통해 전 세계 곳곳의 사회적기업가를 선발·교육해온 어큐먼은 최근 우리나라와도 협력을 시작했다. 아산나눔재단을 통해 선발된 한국인 참가자는 어큐먼의 ‘글로벌 펠로 프로그램’ 선발을 위한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된다. 아직 글로벌 펠로로 선발된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다. ‘더나은미래’는 국내 언론과 좀체 인터뷰를 한 적이 없는, 재클린 노보그라츠를 이메일 인터뷰했다.

―자선단체가 아닌, 사회적기업에 투자하는 기관을 생각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는가.

“현지에 가보니, 전통적인 자선이나 원조로는 빈곤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게 분명했다. 돈이나 물건을 주고 마는 건 자생력을 키울 수도 없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았다. 기존 자선단체 방식과 영리적인 투자, 그 둘이 결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회성 기부금을 주고 마는 대신, 사회적 영향력을 만들어내는 기업에 투자하고, 기업가를 키우고, 좋은 아이디어를 다듬고 퍼뜨리는 데 투자해, 궁극적으로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을 바꾸는 게 어큐먼의 미션이다.”

쉬운 시작은 아니었다. 체이스맨해튼은행을 떠난 재클린이 르완다에서 맨 처음 시작한 건, 가난하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은행 대출은 생각할 수도 없던 이들을 위한 소액대출은행 ‘두테림베레(Duterimbere)’ 설립이었다. 자선단체 기부금에 의존해 살아가던 20여명의 미혼모를 한데 모아 ‘블루 베이커리’ 사업체를 만들기도 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일방적인 원조와 기부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소득을 늘려가고, 환경을 변화시켜 나갔다. 그녀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비즈니스’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선례가 없어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기도 쉽지 않았다”는 그녀의 회고처럼, 자선단체들은 ‘가난한 이들을 이용해 돈 벌겠다는 거냐’며 비판했고, 영리 투자자들은 ‘그런 모델이 어떻게 비즈니스가 된다는 거냐’며 비웃었다. 그럼에도, 가능성을 알아본 초기 투자자들이 있었다. 록펠러재단에서 기부한 500만달러, 시스코 재단의 200만달러 지원금에 3명의 개인 투자자가 의기투합해 모인 800만달러(88억원)가 초기 종잣돈이 됐다. 올해로 어큐먼이 설립된 지도 13년, 5명 파트너의 투자로 시작한 어큐먼은 이제 250여곳의 파트너로부터 기부받은 9000만달러(1000억원)를 운용하는 명실상부 세계 최대 비영리 벤처 캐피털이다. 지금까지 투자한 사회적기업만도 82곳, 투자받은 기업이 만들어 낸 일자리만도 6만개에 달하고, 혜택을 본 이들은 전 세계에 걸쳐 1억2500만여명에 이른다.

①2008년 '어큐먼 펠로'인 트리시아의 모습. 트리시아가 파견된 인도의 라이프스프링 병원. ②③인도에 있는 워터헬스인터네셔널 (Water Health International)와 아이들. /어큐먼 제공
①2008년 ‘어큐먼 펠로’인 트리시아의 모습. 트리시아가 파견된 인도의 라이프스프링 병원. ②③인도에 있는 워터헬스인터네셔널 (Water Health International)와 아이들. /어큐먼 제공

―어큐먼의 투자를 받은 사회적기업들은 세상 곳곳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왔는가.

“인도에서 투자한 곳 중 ‘지키타 헬스케어 리미티드(Ziqita Healthcare Limited)’라는 사회적기업이 있다. 인도엔 믿을 만한 앰뷸런스나 응급 의료 시스템이 전무해 가난한 사람들은 오토릭샤를 이용하는데, 이동 중에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마저도 여력이 안 되는 사람들은 응급상황에서 병원에 갈 방법도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일념으로 2005년 기업이 만들어졌다. 미국 심장재단에서 훈련·인증받은 가이드라인에 따라 구급차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좋은 병원을 선택하는 환자는 좀 더 비싼 요금을 내고, 가난하거나 사고 희생자·동행인이 없는 아동 등은 무료 혹은 저렴한 요금을 내는 방식이었다. 어큐먼에서는 2007년부터 총 260만달러(28억원)를 투자했는데, 처음 투자할 때만 해도 3개 지역 9대 구급차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17개 주에서 1250대의 구급차가 운영 중이다. 320만명의 목숨을 살려냈다.”

지난 9월, 인도의 그라민재단과 어큐먼은 이 기업이 실제로 저소득층에게 사회적 임팩트를 만들어냈는지를 측정하기 위해, 구급차 이용자들의 소득과 연령 등을 분석했다. 조사 결과, 이용자의 80%가량이 하루 2.5달러 미만을 버는 저소득층이었고, 전체 이용자의 절반 정도가 임신한 여성이나 아동인 것으로 나타났다. 재클린 노보그라츠는 또 다른 사례도 소개했다. 빛을 선물한 기업이다.

“샘 골드만이라는 친구가 2007년에 만든 ‘딜라이트(d.light)’라는 사회적기업 이야기다. 이 친구가 아프리카에 살 때 이웃집 아이가 밤에 등유 불을 엎어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이걸 계기로 안전하고, 싸고, 지속될 수 있는 ‘빛’을 가난한 이들에게 제공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전기가 없는 마을에선 가난한 이들이 소득의 15%가량을 등유 사는 데 써야 했다. 그을음, 유독가스, 화상이나 화재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이 사회적기업은 태양광으로 충전 가능한 손전등을 만들었다. 10달러를 내면 8시간까지 쓸 수 있고, 30달러 정도로 최대 5만 시간 동안 쓸 수 있는 모델도 있다. 등유보다도 10배 이상 밝다.”

딜라이트의 제품은 4100만명에게 보급됐다. 이들이 등유 대신 손전등을 사게 되면서 절약한 비용은 14억 달러(1조5600억원)에 이른다. 이 밖에도 아프리카 현지인들을 고용해 싼 가격에 모기장을 생산·판매해 말라리아를 예방하는 ‘에이투제트(AtoZ)’나, 자외선으로 물을 정수·여과해서 싼 가격으로 안전한 물을 공급해온 ‘워터헬스인터내셔널(Water Health International)’ 역시 어큐먼펀드가 힘을 보탠 곳이다.

―어큐먼이 하는 투자와 일반 투자는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여러 사회적기업 중 어느 곳에 투자할지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영리 투자기관들이 ‘수익’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한다. 어떤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하는지, 측정이 가능한지, 지속 가능할지, 가난한 이들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가게 할 수 있을지를 본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기업가’다. 이해관계나 관습이 얽혀 있는 기존의 체계를 뒤흔들 새로운 시스템을 만든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이기 때문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 투자를 할 땐 그가 얼마나 문제 해결에 강한 신념이 있고,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진정성이 있고, 부패나 기존 관습을 답습하지 않을 힘이 있는지 관찰한다. 한번 투자하기로 결정하면 오랜 기간에 걸쳐 자금을 제공한다. 자금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함께 모델이나 혁신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머리를 맞댄다. 그 사람을 믿고, 그가 해낼 수 있도록 여러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고 기다려주는 ‘인내 자본(Patient Capital)’이다.”

재클린은 “‘차세대 리더 양성’은 어큐먼의 또 다른 중심축”이라며 “어큐먼이 미래 세대에 남겨야 할 ‘유산이자 몫’이라 생각해 투자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했다.

―‘글로벌 펠로 프로그램’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다. 어떤 프로그램인가.

“매년 한 차례씩 글로벌 펠로 프로그램을 통해 전 세계 차세대 리더들을 발굴해 1년간 트레이닝 기회를 제공한다. 선발되면 2개월간 어큐먼 뉴욕 본부에서 리더십, 경영전략 등에 대한 훈련을, 이후 9개월 동안 동남아나 아프리카에서 어큐먼 투자를 받는 사회적기업에 실제 파견돼서 일하게 된다. 내년도 펠로 모집이 지난 10일부터 시작됐다. 이 펠로 프로그램 외에도 어큐먼의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인 ‘어큐먼 공동체’에 여러 가지 루트로 함께할 수 있다. 플러스어큐먼 웹사이트(plusacumen.org)에 들어가면 모든 커리큘럼 과정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서울 어큐먼플러스 챕터’는 어큐먼의 미션을 지지하는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인 모임인데, 빈곤해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여러 가지 행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재클린은 한국의 사회적기업가들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을까.

“13년 전 어큐먼을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비슷한 곳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와 비슷한 벤처 캐피털이 미국에만 400여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재단, 투자자, 정부기관, 학술기관, 거대 기업 등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이 분야로 들어오고 있다. ‘변화’와 ‘임팩트’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나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변화’를 꿈꾸는 많은 젊은이를 만난다. 만약 당신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현실에 굴하지 말고 계속해서 꿈꾸길 바란다. 틀이나 프레임에 갇히지 말고, 사람 자체를 사랑하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대담하게 행동하기를 바란다. 더 나은 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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