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일)

“세상에 문제있는 아이는 없다”… 느린 학습자들의 학교 이야기

‘사람사랑나눔학교’ 수업 현장을 가다

“자기 앞에 놓인 종이들을 같은 모양과 색으로 구분해보세요. 초록색 네모 종이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사람사랑나눔학교(이하 ‘나눔학교’) 초등반 교실. 조금은 특별한 ‘경제’ 수업이 시작됐다. 교사의 설명만 들어보면 ‘미술’ 수업 같지만, 학생들의 책상에 놓인 건 색종이가 아닌 다양한 색과 형태의 ‘지폐’들이다. 담임인 류호정 교사는 “외운 내용을 금방 잊어버리는 ‘느린 학습자’들을 위해 교과목 중심의 지식 전달 교육 대신 ‘감각’을 통해 만지고 느끼며 개념을 익히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사랑나눔학교의 ‘경제와 한걸음’ 시간. 학생들이 모조 지폐를 활용해 학습하고 있다. /사람사랑나눔학교
사람사랑나눔학교의 ‘경제와 한걸음’ 시간. 학생들이 모조 지폐를 활용해 학습하고 있다. /사람사랑나눔학교

느린 학습자란 지능지수(IQ) 71~84 사이의 ‘경계선 지능인’을 주로 가리킨다. 서울시경계선지능인평생교육센터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인구의 약 13.5%가 경계선 지능에 속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제도적 지원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지난 2020년 서울시가 ‘경계선 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를 제정한 데 이어, 지난 4월 국회에서 ‘경계선 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이 발의되는 등 비교적 최근에서야 사회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나눔학교에서는 20여 년 전부터 ‘느린 학습자’를 위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경계선 지능뿐 아니라 자폐스펙트럼, ADHD, 발달장애 등 다양한 유형의 느린 학습자 55명이 나눔학교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다. 강소영 나눔학교 교장은 “느린 학습자들에게 일반 학교는 배움이 없는, 그저 물리적 공간에 불과하다”면서 “사회성과 문제해결력이 부족해 왕따와 괴롭힘에 시달리기 쉽다”고 말했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는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외우지 않고 느껴요”… 감각 중심 교육

이날 경제 수업에서 학생들은 1000원, 5000원짜리 화폐의 가치와 계산법을 배우는 대신 화폐를 보고 만지며 감각적으로 돈의 개념을 익혔다. 이후 직접 가게를 운영해보거나 손님이 되는 등의 ‘경제 놀이’를 하며 돈을 활용하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경험한다. ‘감각-개념-활용’으로 이어지는 나눔학교만의 교육 철학이다.

1교시 ‘아침 열기’ 시간 모습. 학생들은 신체활동과 함께 서로 인사하고 칭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백민정 청년기자
1교시 ‘아침 열기’ 시간 모습. 학생들은 신체활동과 함께 서로 인사하고 칭찬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백민정 청년기자

‘생태’ 수업 시간에서도 이런 교육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이날 수업 주제는 ‘텃밭’이었다. 류 교사는 두 개의 영상을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여의도 빌딩숲과 농촌 전경이 나오는 영상이었다. 

“지금 본 도시와 농촌 영상은 무엇이 달랐나요?” 

“색깔이 달라요.“

“농촌 영상에서는 무엇이 보이나요?” 

“꽃이 진짜 많아요.“

학생들은 영상을 보며 도시와 농촌의 차이를 직접 비교했다. 밭을 가꾸는 장면을 보며 영상에 등장하는 사람과 물건을 큰 종이에 같이 적기 시작했다. 농부, 흙, 방울토마토 등 아이들이 적은 단어로 종이가 빼곡히 채워졌다. 

교사가 생태나 자연, 텃밭의 정의를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스스로 그 개념을 시각적으로 인지해 나갔다. 감각으로 개념을 익힌 아이들은 다음날 진행되는 ‘텃밭 가꾸기’ 수업을 통해 실제로 텃밭에 물을 주고 작물들을 만져 보는 경험을 하며 생태적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된다.

“농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말해볼 사람?” 

“밭에서 작물을 가꾸는 사람이요.” 

“밭에서만?”

가연(18)이의 대답에 선생님이 질문을 이어갔다. 대답하는 데 오래 걸려도 선생님이 재촉하거나 답을 알려주는 일은 없었다. 질문은 수업 내내 계속됐다.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고, 기다리는 것. 나눔학교 교육의 또 다른 철칙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몸으로 개념을 익히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성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교사 류호정 씨는 “아이들이 느리지만 기다려주면 할 수 있다”며 “최대한 아이들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농촌 영상에 나오는 단어들을 전지에 적으며 ‘생각 지도’를 만들고 있다. /백민정 청년기자
학생들이 농촌 영상에 나오는 단어들을 전지에 적으며 ‘생각 지도’를 만들고 있다. /백민정 청년기자

‘장애’가 아닌 ‘개성’, 존중받고 존중해요

“선생님, 지후랑 범서랑 자리 바꾸라고 해주세요.”

자폐성 장애를 가진 상연(14)이는 친구들의 ‘자리’에 관심이 많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자리를 바꾸고 싶어 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상연이의 행동을 고치려 하지 않는다. 나눔학교에서 장애는 결핍이 아니라 그 아이의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는 것은 아이가 ‘나’를 인식하고 표현하도록 돕는 첫 단계다. 

“네가 직접 물어봐. 거절하면 거기서 그만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할 수는 없어.” 

상연이는 상대방의 눈을 보며 원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익혀간다. 선생님의 역할은 상연이가 적극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면서도, 상대의 거절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류 교사는 “아이들에게 거절이나 실패의 경험은 필요하다”며 “자신의 행동이 집단 속에서 어떤 반응이나 결과를 가져올지 인내심을 가지고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기표현과 상호존중의 규칙을 익힌다. 나와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연습하는 것. 나눔학교는 이런 방식으로 느린 학습자의 ‘관계 맺기’를 돕는다. 

영문도 모른 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다가 전학 온 지우(16)는 “친구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하는지, 어떻게 친해져야 하는지 나눔학교에 와서 알게 됐다”면서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며 웃었다. 수업 시간에 앉아 있는 걸 힘들어 해서 조퇴를 밥 먹듯 했던 진영(19)이도 달라지고 있다. 취재 당일에는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 소식을 전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축하받았다.

학교 1층 ‘꿈너머 카페’에서 진행되는 진로(바리스타) 수업 모습. 최다원씨도 이곳에서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백민정 청년기자
학교 1층 ‘꿈너머 카페’에서 진행되는 진로(바리스타) 수업 모습. 최다원씨도 이곳에서 바리스타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 합격했다. /백민정 청년기자

졸업생 최다원(22)씨는 중학교 1학년 때 나눔학교에 전학왔다. 그전까지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따돌림을 당했고, 분노조절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 행동을 깨닫는 데 한 달이 걸렸고, 행동을 고치기 시작한 건 3년 뒤였어요.” 다원씨는 제빵사를 꿈꾸며 제빵기능사와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고,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동네 빵집에서 1년간 주방 아르바이트도 했다. 

“일을 하면서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농담과 진담을 잘 구별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했어요.” 현재 다원씨는 서울의 한 빵집에 취업해 제빵사의 꿈을 이어가고 있다.

강소영 교장은 “교육의 본질은 잠재된 능력을 발굴해 스스로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고 했다. “누구나 잘하는 게 있고, 못하는 게 있어요. 조금씩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없어요. 같이 노력하고, 같이 흘러가는 게 중요해요.”

사람사랑나눔학교
서울시 영등포구에 있는 ‘느린 학습자’를 위한 대안학교다. 서울시교육청 위탁교육기관 ‘사람사랑나눔학교’와 학교밖청소년 대안교육기관 ‘나눔공동체학교’를 함께 운영한다. 위탁교육기관은 초-중-고 과정별로 반을 나누어 수업이 이뤄지며, 졸업 시 본래 소속된 일반학교 소속으로 학력이 인정된다. 대안교육기관은 나이에 상관없이 함께 수업을 받고, 교과보다는 주제별 통합 학습에 중점을 둔다. 사람사랑나눔학교는 사회적기업 ‘아주건강한속삭임’을 설립해 학생들이 졸업 후 인턴십을 하며 진로 탐색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김채운·백민정·한명현 청년기자(청세담1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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