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화)

성수역 주변 빼곤 한산… 구두 가게 찾기 힘든 ‘수제화 거리’

지역 재생 롤모델 성수동 수제화 거리 르포
서울시가 지원하는 성동구 수제화 매장 값싼 임대료에 10만원 후반에 구두 판매
시작 6개월 만에 월 1억2000만원 매출
제작업체 300곳 중 3%만 매장 입점 저렴한 가격 강조해 상품 차별화 어렵고
‘수제화 장인’ 지원 미흡하다는 지적도

지난해 말, 박원순 서울시장은 “성수동 수제화 타운을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키우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이에 따라 서울 지하철 2호선 ‘성수역’을 ‘구두테마역’으로 조성하고, 성수역 자투리 공간을 개조해 구두 공동판매 매장 ‘프롬SS’를 오픈했다. 서울시는 “지하철 역사(驛舍) 내 2층 1·4번 출구방향 공간과 3층 지하철 승강장 공간 일부에 성수동 수제화 산업의 가치를 확산·홍보하는 공간을 마련한다”고 했다. 과연 ‘성수동 수제화 타운’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을까. 지난달 31일 토요일 오후, 구두테마역인 성수역(서울 지하철 2호선)을 찾아가봤다.

지난달 31일 토요일에 찾은 성수역 4번 출구 앞‘성수동 수제화 타운’(왼쪽). 빨간 구두가 그려진 낡은 벽화만 눈에 띄었다. 지난해 말, 서울시는 성수역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성수역 1번 출구 앞에 구두 공동 판매장을(오른쪽) 오픈했다. /김경하 기자·성동구청 제공
지난달 31일 토요일에 찾은 성수역 4번 출구 앞‘성수동 수제화 타운’(왼쪽). 빨간 구두가 그려진 낡은 벽화만 눈에 띄었다. 지난해 말, 서울시는 성수역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성수역 1번 출구 앞에 구두 공동 판매장을(오른쪽) 오픈했다. /김경하 기자·성동구청 제공

“딱딱딱딱.” 구두 장인들이 만들어내는 흥겨운 소리를 기대했건만, ‘슈스팟(ShoeSpot) 성수’로 성수역을 홍보하는 대형 아크릴 패널만 요란했다. 패널을 가득 채운 ‘성수 구두지도’는 성수역 반경 1㎞ 이내의 구두 전문점을 업종별로(완제품 여성화·완제품 남성화·원부자재 유통 등) 표시해놨다. 하지만 수제화 매장은 성수역 1번 출구 앞, 서울시가 만든 ‘프롬SS’ 공동 매장과 맞은편 서울성동제화협회가 만든 ‘SSST’ 매장이 거의 전부였다. 이곳을 떠나자 더 이상 ‘수제화 거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지도와는 달리, 수제화 가게들은 성수역 출구 앞에 서넛씩 모여 있었다.

친구들과 성수동을 방문한 최민근(28·서울시 강남구)씨는 “지하철 역사 안을 제외하고는 성수역 부근이 ‘수제화 거리’라는 것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명동에서 구두 판매를 하다 12년 전 성수동으로 들어와 개인 공장을 운영하는 K씨는 “성동구와 서울시에서 수제화 특화 거리로 조성하면서 거리가 활성화되길 기대했지만, 주택가에 있던 대다수의 상점은 성수역과 떨어져 있어 그 효과를 거의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분식집을 운영하는 한 중년 남성 상인은 “말만 수제화 거리지 ‘피혁 거리’에 가깝다”면서 “성수동 일대 땅값만 평당 3000(만원)이 넘는데 시의 계획이 애초부터 무리였다”고 했다.

서울시가 ‘성수동 수제화 타운’을 조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 성수동과 뚝섬 일대는 섬유공장과 가죽공장이 모여들면서 구두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금강제화, 엘칸토, 에스콰이아와 같은 구두업체와 적정 거리에 있으면서도 명동·신촌 부근보다 공장 임대료가 싸다는 이점 때문이다. 이들은 주로 대기업 브랜드에 구두를 납품했고, 90년대까지만 해도 공장 개수가 800~900개에 달했다. 50년 가까이 구두 산업에 종사한 이재희 C’moi 믹스앤매치(C’moi Mix&Match) 대표는 “한때는 왕십리에서 건대까지 구두공장이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성수역 1번 출구에는 당시 밤늦게까지 일한 인부들이 많았던 탓에 먹자골목도 형성됐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값싼 중국산 저가 구두가 시장에 들어오면서 성수동 구두 산업이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기 시작하자 섬유, 가죽, 유통업체들이 한꺼번에 불황을 겪었다. 지금은 그 절반인 400여개 공장만 남았다. 이에 서울시가 지역경제와 전통 수제화 산업을 활성화시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성수역 1번 출구 앞, 검은색 컨테이너 박스 7개를 길게 이어 만든 구두 공동매장 ‘프롬SS’에 입점한 업체는 10곳이다. 성동구청에서 ‘수제화 판로’를 개척하고자, 지하철 교각 사이 자투리 공간을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10개 업체는 서울시 입찰 과정을 거쳐 입점했고, 이들은 1년간 공동매장을 활용할 수 있다(1년 연장하면 2년까지 가능). 3호점 매니저 조휘범씨는 “관리비가 월 50만원으로 저렴하고 홍보 효과도 있어 중소기업들이 많이 들어오려고 한다”고 했다. 값싼 임대료 덕분에 이곳에선 백화점에 납품하는 30만원짜리 수제화를 10만원 후반대로 판매한다. 40~60대로 보이는 손님들이 삼삼오오 매장을 들락날락했다. 김미숙(53·서울시 광진구)씨는 “기성화만 신다가 10년 만에 구두를 맞춰본다”면서 “수제화지만 가격도 상당히 저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대대적인 홍보와 지원이 시작된 지 6개월째, ‘프롬SS’ 공동 매장의 월평균 매출은 벌써 1억2000만원에 이른다. 현재 서울시가 추산한 성수동 수제화 제작업체는 300곳 정도. 이 중 공동매장인 ‘프롬SS’에 입점한 기업 숫자는 겨우 3% 미만에 그친다. 이 때문에 ‘성수동 수제화 타운’ 정책에 대한 반응은 엇갈렸다. 문정찬 칠성제화 대표는 “중국시장과 백화점 상권 때문에 침체됐던 수제화 시장이 3~4년 전부터는 ‘수제화’ 브랜드 홍보에 힘입어 살아나고 있다”면서 “외국 관광객들이 수제화 타운을 찾기도 하고, 구두제조 유명업체들이 성수동으로 본사 이전을 하기도 한다”고 했다. 전국에 20~30개 대리점을 가지고 있는 칠성제화도 6개월 전, 성수동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바로 ‘프롬SS’ 맞은 편에 위치한 ‘SSST’ 수제화 공동 판매 매장의 A직원은 “우리는 서울시와 아무 관계도 없다”며 거리를 뒀다. 시 사업보다 ‘SSST’ 매장이 먼저 만들어졌고, 서울시가 발을 담근 이후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SSST’ 매장은 지난 2011년, 브랜드 기업에 납품하는 수제화 제작업체들이 마을기업으로 마련한 공동 매장이다. 백화점 매장에서 판매하는 고급 수제화 품질 수준에, 가격은 30%가량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는 기업이어야 입점이 가능하다. 초창기에는 35개 업체가 참여했지만, 임대료 부담 등의 이유로 현재는 11곳만 남아있다. 성수동에서 신사화 공장을 20년 가까이 운영한 B씨는 “서울시 매장과 협회 운영 매장 간 임대료 지원 금액의 차이가 5배가 넘는 바람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명동 구두 판매상인으로 시작해 50년 가까이 구두 사업에 종사 중인 A씨도 “성수역 근처에 조성된 공동매장 물품이 ‘저렴한 가격’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입점하지 않은 개인 브랜드는 오히려 타격을 입고 있다”면서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특색 있고 좋은 상품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했다.

상인들은 “토요일이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토요일에 찾은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서는 구두 가게 간판 찾기가 어려웠다.
상인들은 “토요일이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토요일에 찾은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서는 구두 가게 간판 찾기가 어려웠다.

‘수제화 장인(匠人)’에 대한 지원도 아쉬운 대목이다. 25년째 구두 산업에 종사 중인 J씨는 “시에서 ‘성수동 수제화 타운’이라고 홍보하지만, 공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진짜 장인들의 모습은 비중 있게 조명되지 않아 아쉽다”면서 “공동매장을 통한 판로 개척뿐만 아니라 장인의 가치를 이끌어내는 ‘명품 구두 도시’로 발돋움할 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현재 성수동 일대 구두 산업 관련 종사자는 6000명이 넘는다. 서울시 성동구 지역경제과 관계자는 “지금은 사업 초기라 미약한 수준이지만, 피혁·부자재 업체 등 단계별로 정책을 확대 시행할 것”이라면서 “오는 9월에는 장애인을 위한 수제화를 전문으로 만드는 공동 매장도 오픈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에는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와 현대해상이 함께 하는 소셜에디터스쿨 ‘청년, 세상을 담다’ 과정에서 실습 중인 이예림, 김민정, 윤지혜, 박찬근 청년기자단이 참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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