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월)

[희망 허브] 비행청소년 600명에게 새 삶 선물한 ‘아버지’

36년간 소년원 찾아가 봉사하는 김원균 목사
아이들 위한 공동체 운영하며 정작 자신은 월세집 전전
“비행청소년은 환경 탓 커… 그들 위한 여생 보낼 거예요”

“어느 날 방에 들어갔는데, 아이가 빨간 줄로 자기 몸을 의자에 칭칭 감아 놨더라고요. 공부를 하고 싶은데, 앉아 있기가 힘들어 ‘앉아서 버티기’ 연습을 한다고 했어요.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가정이 해체되고, 오토바이 폭주를 하며 여러 문제를 일으켰던 아이였죠. 반항심과 증오심만 가득했던 아이가 그렇게 변하더라고요.”

36년 동안 600명의 아버지로 산 사람, 김원균(65·경기 군포 겨자씨선교회) 목사의 이야기다. “수많은 아이에게 삶의 용기를 준 사람이 있다”는 내용을 SNS를 통해 알린 사람은 윤용범 법무부 사무관(전 서울소년원 분류보호과장). 김 목사 덕분에 8명은 목사가 됐고, 3명은 선교사가 돼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잠비아에 파송됐다. 무연고 행려아동 5명은 새로 호적을 만들어(성본창설) 한 성(姓)씨의 시조가 됐다. 36년 동안 비행 청소년들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느라 정작 자신의 월세 집은 27번이나 옮겼다고 한다.

김원균 목사는 “아이들 덕분에 나도 소년의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며 “아이들을 섬기는 특권을 누리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라고 말했다. /겨자씨선교회 제공
김원균 목사는 “아이들 덕분에 나도 소년의 마음을 간직한 채 살고 있다”며 “아이들을 섬기는 특권을 누리는 내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라고 말했다. /겨자씨선교회 제공

◇가장 소외받는 곳 ‘소년원’, 좁은 문으로 들어가다

김 목사가 처음 소년원 아이들을 접한 것은 1978년 무렵. 보육원·양로원·구치소·경찰서·병원 등을 돌며 어려운 이들을 만났지만, 소년원에서 그는 ‘이 아이들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성경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구절이 많이 생각나더라고요. 결손가정에서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이 빵 하나 훔쳐 먹고 소년원으로 왔죠. 가정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 가장 소외받고 있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곳에서 제 할 일을 찾았습니다.”

29세 청년 김원균은 ‘겨자씨선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서울소년원(고봉중고등학교)에서 매주 종교 활동을 열고, 아이들을 만나 고민을 들어줬다. 여름·겨울에는 수련회도 개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년원 선교·봉사 활동이었다. 일회성 이벤트가 아닌, 지속적인 보살핌에 닫혀 있던 아이들이 반응했다. 당시 서울소년원생이었던 김선동(가명·36)씨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소년원은 늘 삭막했어요. 드센 아이들은 기 싸움만 했고, 약한 아이들은 항상 얼어 있었죠. 웃을 일도 거의 없었고요. 처음 목사님을 봤을 때는 굉장히 어색했어요. 그런데 늘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함께 노래하고 공부도 하면서 마음이 녹는 것 같았어요. 주말만 기다리는 아이가 하나 둘 늘어났죠.”

◇겨자씨마을 공동체 운영하며 아이들과 생활

소년원 아이들과의 인연은 출원 이후에도 계속됐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하나 둘 돌봐주던 손길이 ‘겨자씨마을’이라는 자립생활 공동체로 이어져, 10명 내외의 아이들이 김 목사와 함께 생활했다. 집을 빌리고, 운영하기 위해 매일 후원 요청에 동분서주했지만, 김 목사는 “절대 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제불능이라던 아이가 훌륭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는 기쁨 때문이었다. 김 목사는 “고아 출신인 아이가 자라 탄자니아에서 현지의 고아들을 보살피고 있다”고 했다. 경기도 안산에서 개척교회 목사로 활동하는 김선동씨도 그중 하나. 김씨는 “도둑질로 소년원을 드나들던 내가 지금은 지역의 어려운 아이들을 돌본다”며 “목사님이 행했던 섬김, 희생, 사랑이 내게 살아 있는 교재가 됐다”고 했다. ‘겨자씨마을’을 거쳐 간 600여명의 아이들은 전부 그런 식으로 새 삶을 일궜다.

김 목사의 활동은 입소문을 타고 확대됐다. ‘아이들이 변한다’는 소문에 전국 소년원에서는 앞다투어 김 목사를 초청했다. “춘천소년원에 계시던 원장님은 제 활동을 정리해서 법무부 장관에게 보고하기도 했어요. 아이들 심성이 순화되고, 소년원에서 이뤄지던 기존 교육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요. 그 결과 전국 12개 소년원 아이들과 연을 맺을 수 있었죠.”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초기에는 직접 전국을 누볐지만, 시간이 흐르며 전국에 퍼져 있는 동료 목사들이 가까운 지역의 소년원을 보살피는 지금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현재 김 목사는 매주 목요일(미술 치료·무의탁학생위로회·합동생일잔치)과 토·일요일(예배 및 분반공부) 서울소년원을 찾고 있다.

◇’나오는 아이들 맞기보단 들어가는 아이들 막는 일 할 것’

하지만 2011년을 끝으로 ‘겨자씨마을’은 문을 닫았다. 민간 후원만으로는 한계에 직면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다. 김 목사는 “국민소득이 올라갈수록 역설적으로 온정의 손길은 줄어들더라”고 했다. “예전에는 가출한 아이를 함께 찾아 헤매고 설득해 데리고 와주는 의인들이 많았는데, 그런 도움을 기대하기 힘들어지는 사회가 됐다”고도 덧붙였다. 가출 후 선택의 여지가 많아진 아이들이 공동체를 떠난 것도 큰 이유였다. 김 목사는 “찜질방, PC방 등 24시간 열린 곳도 많아졌고, 지역에 일시·단기 쉼터도 생겨나다 보니 규율과 통제가 있던 우리 공동체보다는 자유롭게 있는 곳을 원하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했다.

김 목사는 이제 비행 청소년을 위한 ‘예방적 활동’에 전력을 쏟고 있다.

“수만 명의 소년원 아이를 만나왔어요. 순진하고 착한 아이들도 많았죠. 환경 탓이에요. 미혼모나 이혼녀들이 아이와 함께 살 수 있는 ‘모자원’이나 가정이 해체된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기숙형 대안학교’를 만들어 그들에게 실질적인 울타리를 제공할 계획입니다. 이를 위해 지역사회의 수많은 분을 만나고 있어요. 이미 불행을 겪은 아이들이 소년원 문턱까지는 넘지 않도록 하는 데 여생을 쏟을 계획입니다.”

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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