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탈북 아동의 선배이자 보호자로 세상과 소통할 준비 도와야죠”

탈북 청소년 돕는 탈북자 최동현·순영옥 부부
적응 못 하고 겉도는 탈북 아동들
한국 생활 돕기 위해 학교 설립하고
사회복지사 등 자격증 5개 취득
운영비 부족해 1억 넘게 대출했지만
주변 기업·이웃에서 꾸준히 도움 줘

기타, 아코디언, 북…. 아이들은 각자 마음에 드는 악기를 손에 쥐었다. “저도 내일부턴 기타 배울래요.” 이화선(가명·12)양이 기타줄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였다. 아코디언을 어깨에 멘 남학생들은 팔을 움직이며 소리를 내보았다. 연주하러 들어온 15명의 아이로 8평 남짓한 방이 꽉 찼다.

2002년 서해 공해를 넘어 한국 땅을 밟은 탈북 부부 최동현, 순영옥씨 부부. 이들은 겨레얼 지역아동센터와 대안학교를 세워 탈북 아동, 청소년의 교육 및 자립을 돕고 있다.
2002년 서해 공해를 넘어 한국 땅을 밟은 탈북 부부 최동현, 순영옥씨 부부. 이들은 겨레얼 지역아동센터와 대안학교를 세워 탈북 아동, 청소년의 교육 및 자립을 돕고 있다.

“우리 학생들은 원하는 악기를 하나씩 배울 수 있습니다.” 최동현(55) 겨레얼 대안학교 대표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아이들이 한국에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뿌듯해요.” 순영옥(52) 겨레얼 지역아동센터 원장이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중국을 넘어, 바다를 건너, 산을 타고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아이들이다. 최동현, 순영옥씨 부부는 2011년 지역아동센터와 대안학교를 세우고, 탈북 아동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고 있다. “아이들만큼은 우리와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했어요.” 2002년 북한 신의주에서 배를 타고 월남(越南)한 이 부부는 아이들의 탈북 선배이자, 선생님이자, 보호자다.

◇목숨 건 48시간의 항해…탈북 부부가 한국 땅에 뿌린 나눔의 씨앗

2002년 8월 15일 새벽 4시. 북한 선천군 홍건도에서 대가족 21명이 배에 올랐다. 7세 아이부터 71세 노인까지 구성도 다양했다. 고기잡이 배로 위장한 20t급 목선은 바람을 타고 꼬박 하루를 항해했다. 서해 공해에 다다르자, 멀쩡하던 배가 휘청이기 시작했다. 컴컴한 배 밑바닥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배 안으로 차가운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했어요. 고장 난 배 위에서 물을 퍼내면서 ‘정말 한국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순 원장은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위해 중국과의 바다 무역을 꼬투리 잡는 북한 정부를 피해 탈북을 결심했다. 48시간의 항해 끝에 도착한 인천항. 순 원장은 “한국 생활은 생각만큼 녹록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최 대표는 주유소 아르바이트, 택배 기사, 신문 배달을 하며 하루를 꼬박 일했다. 순 원장도 파출부, 식당 일을 하며 생활비를 보태야 했다.

차츰 한국 생활에 적응해갈 무렵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가장 문제였어요. 특히 중국에서 재혼한 북한 여성들이 데려온 ‘중도 입국 자녀’들은 한국어를 전혀 모르니 학교에 가서도 겉돌기만 했습니다. 탈북 청소년들도 주변의 시선, 차별 때문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고요.” 북한에서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로 일했던 순 원장은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2006년 국제 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그녀는 3년 반 동안 사회복지사, 보육교사, 평생교육사, 청소년지도사, 건강가정사 등 자격증 5개를 땄다. 2010년부터는 탈북 아동들로만 구성된 진달래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사로 일했다. “2011년 6월 지역아동센터 운영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제 능력 밖의 일일까 염려됐고, 센터의 재정 상황도 좋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탈북 아동을 지원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센터 명칭도 ‘겨레얼’로 바꿨죠.” 막상 센터를 운영해보니 고민이 깊어졌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자란 아이들이 중학교에 가서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 부족한 학습을 보충하고, 학교 적응을 돕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3개월 뒤 이 부부는 지난 10년간 저축한 4000만원으로 센터 맞은편에 ‘겨레얼 대안학교’를 세웠다. 현재 27명의 아동·청소년이 겨레얼 지역아동센터·대안학교에서 한국을 배우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다.

겨레얼 지역아동센터·대안학교의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한국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고, 리더로 성장하고 있다.
겨레얼 지역아동센터·대안학교의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한국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고, 리더로 성장하고 있다.

◇맞춤식 공감 교육… 리더로 자라는 아이들

김광일(15)군은 요즘 부쩍 자신감이 늘었다. 얼마 전부터 수업 내용이 귀에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 문장이 이해되니 공부도 재미있다. 성적도 50점 이상 향상됐다. 겨레얼 대안학교의 집중 교육 덕분이었다. 대안학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문장 익히기, 겹받침 알기, 발음 익히기, 문장 만들기, 단어 알기, 독서, 수학, 영어, 음악, 율동과 노래, 도형 알기, 컴퓨터 등 과목도 다양하다. 김군처럼 학교 공부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에겐 일대일 맞춤 교육을 실시한다. “학교에 가면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있다가 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어요. 한국어 실력이 높아져도 국어·수학·사회·과학 등 과목을 따라가질 못하니 몇 번의 슬럼프를 겪더군요. 특히 광일이처럼 초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졸업하고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을 중심으로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과목 중에 수학을 제일 싫어하던 김군은 매일 수학 선생님을 따로 찾아가 질문하고 공부할 정도로 달라졌다.

정서·공감 프로그램도 겨레얼 지역아동센터·대안학교만의 차별화된 교육 방식이다. 순 원장은 지난해부터 교사들과 함께 일대일 상담을 시작했다. 친구 관계, 성적, 이성 교제, 가정환경 등 형식이나 주제를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학생들과 이야기한다. 상담이 끝나면 교사들끼리 모여 학생들의 고민을 함께 나누고, 토론했다. 교사도 학생도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고민을 맘속에 끙끙대던 아이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가정환경과 이성 문제 때문에 방황하던 한 여학생도 두 달 뒤 몰라보게 달라졌다. 성적도 90점으로 올랐고, 다음 학기 학급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교내 리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순 원장은 “아이들이 변화되는 모습을 본 학부모들이 ‘우리 아이에게 또 다른 부모가 생겼다’면서 감사 인사를 전한다”면서 “전국에서 탈북, 중도 입국 청소년들을 보낼 정도로 입소문이 났다”고 말했다.

먼 곳에서 대안학교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늘자, 이 부부는 학교 옆에 기숙사를 세웠다. 학생들은 한 달에 기숙사비 10만원만 내면 된다. 입학금, 수업료 등 모든 학비는 무료다. 물론 이를 운영하는 데 어려움도 많다. 학교 및 기숙사 임대료, 교사 월급 등 일년 운영비만 총 1억9000만원이 든다.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 부부는 1억 넘게 대출을 받았다. 최 대표는 개인택시를 운전하면서 매달 대출금과 이자를 갚고 있다. 순 원장은 “주변의 따뜻한 도움 덕분에 운영할 수 있었다”면서 후원자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동들에게 역사 강의 및 멘토링을 해주는 학부모들로 구성된 ‘하나봉사회’는 십시일반으로 2000만원을 모아 겨레얼 대안학교의 건물 보증금을 후원했고, 탈북 청소년들에게 재능 기부로 일대일 역사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전국 지역아동센터에서 독서 지도 봉사를 하고 있는 ‘한우리독서지도봉사단’도 2011년부터 매주 독서 지도를 통해 겨레얼 학생들의 언어 능력 향상을 돕고 있다. 인근 ‘이웃사랑 청소년 소아과’ 원장은 기숙사 비용으로 5000만원을 선뜻 기부했고, 아이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있다. 국내 최대 돼지 육종(우수한 품종 개량 및 보급)기업인 다비육종은 매주 3㎏씩 돼지고기를 지원하고 있고, 윤희진 다비육종 회장은 사재 5000만원을 기부해 ‘겨레얼 대안학교’의 설립을 도왔다. 포스코에너지는 대안학교 리모델링을 위해 8000만원을 후원했고, KT와 교통카드 관련 기업인 ㈜이비도 지역아동센터의 자립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최 대표는 “앞으로 탈북 아동·청소년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면서 “이들이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해 통일의 디딤돌로 자랄 수 있도록 따뜻한 응원을 부탁 드린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