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한 사람의 인생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는 일… 그게 사회복지죠”

엔젤스헤이븐 조규환 회장
보육원에서 시작해 장애인·노인 시설 갖춘 종합 사회시설로 성장
“이달 말 오픈 준비중인 사회복지 전시관 통해 복지 발전사 보여줄 것”

“1961년에 보육원에 있는 한 아이가 아파서 인천기독병원에 입원시켰던 일이 있었어요. 나오는 길에 어떤 아줌마가 길에서 거적때기를 깔고 애를 낳고 있는 것을 본 거예요. 급한 마음에 호주머니에 있던 돈을 전부 털어서 아줌마에게 쥐어줬죠. 나는 정작 차비가 없어 서울역에서 천사원까지 걸어왔어요. 2시간 이상 걸었는데, 하나도 피곤하지 않더라고요. 좋은 일을 하면 맘이 편하고 힘든 것도 몰라요. 그게 제가 지금껏 천사원에서 일했던 이유입니다.”

오는 3월이면 조규환 엔젤스헤이븐 회장이 사회복지기관에 발을 디딘 지 54년이 된다. 천막을 아무렇게나 쳐놓고 시작했던 작은 보육원은 그 사이 5개의 생활시설, 6개의 이용시설, 4개의 부속시설, 5개의 위탁시설을 갖춘 대단위 종합사회복지시설이 됐다. 한 해 예산은 300억원을 훌쩍 넘는다.

미상_사진_사회복지_조규환엔젤스헤이븐회장_2013엔젤스헤이븐은 1959년 3월에 문을 열었다. 전국에 부랑인과 전쟁고아가 넘쳐나던 때였다. 조 회장은 “당시 서울에 떠도는 고아들만 해도 10여만명이 넘었는데, 이들이 깡통을 차고 다니면서 밥을 얻어먹었다”며 “기독교세계봉사회(CWS), 케어(CARE), 한국선명회(World Vision) 등 한국에 들어와 활동을 하던 단체가 120개가 넘었다”고 한다. 엔젤스헤이븐도 그중 하나였다. 5명의 고아를 천막에서 보호하며 역사가 시작됐다. 조 회장은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근무했는데, 설립자인 고(故) 윤성렬 목사의 아들 부탁으로 보육원 봉사에 참여하게 됐다. 처음에는 자원봉사였지만, 총무, 부원장을 거쳐 5년 만에 원장까지 맡았다. 당시 나이 스물여섯 살 때였다.

1970년대 해외입양 붐이 일면서, 당시 150~200명 정도였던 시설 아동 수가 60명 정도로 급감했다. 마침 평소 친분이 있던 김기수 시립아동병원 원장이 “아무도 장애보육원은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고, 조 회장은 1980년에 장애 보육원인 은평재활원을, 이듬해에는 장애인 학교인 대영학교를 설립했다. 장애인을 보살피려면, 생활시설 외에 교육과 치료 시설도 있어야 한다는 주변의 충고를 따른 것이다. 이런 그에게 늘 주변의 도움이 따랐다. 공동설립자였던 아펜젤러(Appenzeller) 선교사는 1억원 상당의 유산을 기증했고, 텔마모(thelma maw) 선교사 역시 유산기증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야쿠르트 일가도 30년이 넘도록 금전적 지원을 해오고 있다.

조 회장은 한평생 시대가 요구하는 복지의 울타리를 쳐오며 살았다. 보육원으로 시작했지만, 장애인, 노숙자, 노인 시설 등을 갖춘 종합 사회복지시설의 면모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조 회장은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를 ‘또 하나의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월말쯤 선보이게 될 ‘사회복지 전시관’이 그것이다. 조 회장은 “59년부터 보관된 이사회 회의록을 보면 어디에, 어떻게 돈이 쓰였는지도 다 볼 수 있다”며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초창기 복지 환경과 발전단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회장은 사회복지 전문가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도움을 언제, 어떻게 주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어요. 만약 도움이 부족해 한 사람의 인생이 잘못되면, 그가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켜 세상에 기여하게 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만큼 사회복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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