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우리 옆집 난민 ②] “고국땅에서 못 이룬 법학 교수 꿈, 한국에서 이루고 싶습니다”

2006년 고향땅 콩고민주공화국을 떠나 한국으로 망명한 마퓨타 피오피오 프레디. 12년을 기다려 지난 2월 13일 난민으로 인정 받았다. ⓒ마퓨타 피오피오 프레디

마퓨타 피오피오 프레디(45)는 경계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자가 악수를 청하자,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그동안 기자들을 여럿 만났는데, 다들 심문하듯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다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난민이다. 고향땅 콩고민주공화국을 떠나 한국에 온 건 2006년. 콩고 최고 명문인 킨샤사대 법학과 2학년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당시 콩고는 정치적으로 혼란기였어요. 지식인으로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죠.” 그는 장기 집권 세력에 반대하던 콩고자유운동(MLC)에 가담했다가 쫓기는 신세가 됐다. 법학 교수를 꿈꾸며 착실히 공부하던 모범생이 하루아침에 정치범이 된 것이다. 기약 없이 숨어지내던 그는 결국 고국을 떠나기로 했다. “한국으로 가겠다고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주선자가 건네준 비행기표의 목적지가 한국이었을 뿐이죠.”

바다 건너 낯선 땅에 오니,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법학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난민 신청자가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난민으로 인정받기를 기도하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장 먹고사는 것도 문제였다. 어릴 적부터 그냥저냥 연주해온 젬베(아프리카 전통 타악기)가 밥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과 공연팀을 만들었다. 대학 축제 등을 돌며 젬베 연주를 했다.

난민지원 비영리단체 ‘피난처’는 그에게 큰 힘이 됐다. 그는 “피난처가 없었다면,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며 “난민에게 무엇보다 힘이 되고 필요한 존재가 바로 ‘피난처’ 같은 비영리단체들”이라고 말했다.

12년을 기다린 끝에 그는 지난 2월 13일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난민 인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심정은…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마음은 크게 안정됐지만, 실제 사는 형편은 그리 달라진 게 없어요. 그나마 지금은 건강이 나빠져 젬베 연주도 중단한 상태입니다. 다행히 난민 인정을 받고 나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돼 생계비를 지원받고 있어요. 거기서 지금 사는 고시원 월세와 식비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는 “당장은 몸이 아파 어쩔 수 없지만 꼭 이루고픈 꿈이 있다”고 했다. 고국에서 중단했던 법학 공부를 계속해 교수가 되는 것이다. 서울대·성균관대·연세대·이화여대 등 국내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학생들에게 난민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는 제 경험을 이야기했어요. 난민의 인권이나 관련 법에 대해서도 얘기했죠. 한국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이어갈 방법을 찾고 있는데 쉽진 않겠죠, 장학금도 받아야 할 테고…. 계속 방법을 찾아봐야죠.”

대학에서 강의 중인 프레디. ⓒ마퓨타 피오피오 프레디

한국 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마음도 내비쳤다. 한국전쟁 발발 연도 등을 정확하게 짚으며 이야기를 풀어낼 정도로 한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도 높았다. 그는 “한국어 대화는 아직은 어렵지만, 읽는 건 어느 정도 된다”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사회의 이야기니까 관심을 가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헤어지며 기자가 다시 한 번 내민 손을 이번엔 프레디도 흔쾌히 잡았다. “감사합니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또박또박 한국어로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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