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수)

미래 미소(美小) 캠페인⑥ 잊혀져 가는 문화, 위기의 자연… 시민이 지킨다

미래미소(美小) 캠페인 내셔널트러스트 운동
방치돼 위기에 놓인 유산·자연 확보… 시민들의 자발적 기부로 보존·관리
2000년 한국 내셔널트러스트 설립
최순우 옛집·도래마을 옛집 등 지키고 매화마름 군락지 등 환경유산 살리기도

위에서부터 ①친환경 유기농법으로 지은 매화마름 쌀. ②③생전 최순우 선생과 최순우 옛집의 모습. /내셔널트러스트 제공
위에서부터 ①친환경 유기농법으로 지은 매화마름 쌀. ②③생전 최순우 선생과 최순우 옛집의 모습. /내셔널트러스트 제공

차량이 많은 도로에서 불과 30미터 거리에 놓인 집이지만 발을 들여 놓은 순간 고요해진다. 사랑방 현판의 글귀처럼 ‘문을 닫아걸면 곧 깊은 산중’ 같은 집이다.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은 1976년 이사온 이 집에 직접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 쓰여진 현판을 써서 걸어두곤 1984년 운명하기까지 지내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남겼다.

2002년 최순우 선생의 유족은 이사를 가면서 ‘신축을 하지 않고 이 집의 모습을 유지하며 살 사람에게 집을 넘기고 싶다’는 뜻을 보였다. 당장 문화재로 지정이 되기 힘들더라도 문화유산의 가치를 지닌 이 집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김홍남 한국내셔널트러스트 공동대표가 일단 계약금을 먼저 내고 모금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큰돈과 작은 돈이 모여 이 집을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최순우 선생이 살던 모습 그대로 다시 이 집을 복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기억을 보탰다. 지역의 주민들, 최순우 선생의 가족과 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진과 증언들이 하나, 둘 모여 이 집은 최순우 선생이 살던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최순우 옛집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1895년 영국에서 시작돼 현재 26개 나라로 확장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자산기증과 기부를 통해 보존가치가 높은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확보해 시민의 소유로 영구히 보전하고 관리하는 시민운동이다. 영국내셔널트러스트는 430만 회원들의 활동에 힘입어 전 국토의 1.5%를 소유하고 있고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은 해안선을 매입해 법적으로 보호하고 있다.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는 2000년에 정식으로 설립됐다. 모금, 매입, 기증, 위탁의 방식을 통해 시민 스스로의 힘으로 자연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시민단체의 등장이다. 현재 한국 내셔널트러스트는 최순우 옛집, 도래마을 옛집, 권진규 아틀리에와 같은 문화유산과 함께 강화의 매화마름 군락지, 동강의 제장마을, 연천의 DMZ일원의 임야, 청주의 원흥이 방죽 두꺼비 서식지와 같은 환경유산을 국가나 개인이 아닌 시민의 소유로 선포해 관리하고 있다.

강화도의 매화마름 군락지는 초지진에서 500미터가량 떨어진 곳 일대의 6만평에 걸쳐 있다. 매화마름은 법정보호종으로 인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멸종위기종으로 꼽힌다. 가을철 추수가 끝난 논에서 얼음이 얼기 전에 발아해서 겨울에 얼음장 밑에서 생존해있다가 이듬해 봄에 줄기를 뻗고 꽃을 낸다. 98년에는 초지리 일대 전체에 매화마름이 서식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보호 중인 지역을 빼고는 경지정리가 되어버렸다.

현재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관리하고 있는 매화마름 군락지도 지난 2000년도에 경지정리예정구간이었다. 당시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나서서 매화마름이 있는 지역에 경지정리를 하지 말자고 주민들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주민들과 적지 않은 갈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주민이 자신이 가진 논을 경지정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싼 가격에 매입하고 다른 논들은 경지정리를 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시민성금이 모아져 2002년도에 800평을 매입했고 땅의 매입을 제안했던 주민은 112평을 무상으로 기증했다.

이후 매화마름 군락지 보존에 반대했던 주민들을 포함한 지역주민, 전문가, 내셔널트러스트가 모여 매화마름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매화마름을 잘 보존하면서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많은 시간 고민을 했고 ‘매화마름’이라는 상표를 특허로 상표등록해 912평에서 친환경 농법을 시작했다.

마을의 청년회에서 912평을 관리하고 농사를 지어 ‘매화마름쌀’을 생산하면 내셔널트러스트가 수매를 해 판매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강화도의 다른 유기농쌀보다 비싸게 판매되는 매화마름쌀을 작년에 6000㎏을 판매했고 올해는 8000㎏을 수매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배혜정도가와 협력해 매화마름 호랑이 막걸리를 출시하기도 했다.

친환경 농법을 유지하다 보니 매화마름의 서식환경이 좋아졌고 멸종위기 동물인 금개구리, 구렁이, 저어새 등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친환경 농법은 인근 지역 6만평으로 퍼져 나갔고 매화마름 쌀을 판매해 얻은 수익은 매화마름의 보존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그리고 2008년 논이라는 단일 습지로는 세계 최초로 람사르 습지에 등록이 되었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단순히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보호하자고 주장하는 단체가 아니다. 방치되거나 사라지거나 잊히기 쉬운 유산을 발굴해 시민의 힘을 모아내 지켜내고 다양한 기획을 통해 되살려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활동을 총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시민과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기획해내는 것이 이 활동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이며 노하우다.

한국내셔널트러스터의 최호진 문화유산부장은 “문화유산의 경우 관(官)이 주도해서 건물만 남겨두는 것보다 민간이 함께 해서 콘텐츠와 스토리들을 발굴하고 공간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기금이 모이고 봉사자가 모이고 관람객이 생기면서 ‘시민들이 참여하는 문화유산지키기’라는 본래의 취지가 달성된다는 것이다.

당산리 매화마름 군락지 전경. /내셔널트러스트제공
당산리 매화마름 군락지 전경. /내셔널트러스트제공

김금호 사무국장 역시 “환경을 지키자는 것이 명분은 있어 보이지만 해당 지역 주민들에게 사유재산 침해 등의 불이익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다”며 “환경적인 가치를 통해 이들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보존’이 ‘낙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2020년까지 전국 어디에서라도 한 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내셔널트러스트의 자산 20곳을 확보해서 지역, 세대, 계층의 차별 없이 누구라도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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