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민주주의는 동사, 교육은 ‘건강한 시민’ 길러내야”… 비판교육 석학 마이클 애플 인터뷰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썼다는 촛불 이후에도, 세월호 참사를 겪고 난 지금에도, 학교는 왜 이런가요?”

지난달 26일, 국회도서관 소회의실에서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출범식이 열렸다. 청소년·교육·인권 등 214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연대체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는 “청소년도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지난 겨울 광장에서 평등하게 촛불을 들었지만, 촛불혁명을 계기로 탄생한 새로운 정부 하에서도 청소년 인권이나 삶은 달라진 게 없다”며 청소년 참정권 보장, 어린이 청소년 인권법 및 학생 인권법을 담은 청소년인권법 제정을 촉구했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지난 겨울, 1000만명이 광장에 섰던 촛불집회. 그로부터 수개월이 흘렀지만 학교 현장에서 ‘촛불’은 이어지고 있다. “광장에는 있어도 학교에는 없는 게 민주주의”라며 ‘교육에서의 민주주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것. 지난 7월엔 “경쟁과 사교육의 중심에 있는 외국어고·자립형사립고를 폐지하라”며 ‘특권학교 폐지 촛불시민행동’이 출범하는가 하면, 지난 9월엔 학생들의 참정권과 인권 보장을 요구하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도 출범했다.

교내 성 평등과 인권, 다양성에 대한 요구도 터져 나왔다. 지난 8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한 초등학교 교사에게 온·오프라인상의 인신공격이 계속된 것과 관련해 온라인에선 ‘#우리에겐 더 많은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캠페인이 진행됐다. 하룻밤 사이 1000명이 넘는 이들이 캠페인에 서명했다. 지난달 1일 열린 기자회견에서 더불어민주당 ​권미혁 의원과 ​전교조 여성위원회, 시민들의 직접 민주주의 플랫폼 ‘우주당’ ​등은 “학생들이 다양성과 자유 안에서 뛰어 놀도록 해야 하고, 여성이나 소수자라는 이유로 성 역할이나 편견을 강화해선 안 된다”며 교육부 내 성 평등 전담 부서를 설치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교육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학교는 어떤 공간이어야 할까.’

지난달 29일, 평화교육단체 ‘피스모모’ 5주년 국제 컨퍼런스 ‘전쟁의 북소리에 춤추지 않는 교육’의 기조강연을 위해 한국을 찾은 마이클 애플 미국 위스콘신대 석좌교수(사진)에게 그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교육의 역할’을 물었다. 세계적인 실천교육학자인 그는 비판교육학의 살아있는 ‘구루’다. 서구교육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술가 50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전미교육학협회 ‘평생업적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79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교육과 이데올로기(Ideology and Curriculum)’는 ‘지난 100년간 교육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계적인 책’ 반열에도 올랐다. 한국에서는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민주학교, 혁신 교육의 방향을 묻다’ 등의 저서가 번역·출간됐다.

ⓒ피스모모

◇한국, 거대한 ‘민주주의 실험장’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5번째다. 1989년 첫 방문 때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지지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연금 조치됐던 그는 이후로도 한국을 찾을 때마다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을 찾고 국정교과서 반대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 왔다. 실천교육학자로서, 지난 30여년 한국의 ‘민주화’ 과정을 지켜봐 온 셈.

그는 “한국은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향해 투쟁해 온 하나의 ‘거대한 실험장’”이라며 “이러한 변화가 저절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기억하고, 여성이나 이주민, 가난 등에 관계 없이 배제되는 이들이 없도록 하는 것이 ‘두터운’ 민주주의를 쌓기 위한 교육의 역할”이라고 했다. 

ㅡ1989년 처음 한국을 찾은 후 30년이 되어간다. 

“처음 한국을 찾았던 1989년도에 내 책은 판매 금지도서였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가 정보 요원에 의해 호텔에 연금됐다. 90년대 초, 한국을 다시 찾았을 때도 정보 요원이 다가와 협박했지만 체포하진 못하더라. 그 사이 군부 독재 세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마지막 방문이었던 2015년엔 세월호 유가족을 만났고, 국정교과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사회 내 우려할만한 부분이 많았는데, 지난 겨울 한국인들은 다시 한번 촛불 혁명을 통해 더 나은 민주주의를 이뤘다.” 

ㅡ그간의 변화를 어떻게 봤나.

“한국이 이뤄온 민주주의 성과는 대단히 놀랍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겠지만, 장기적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리라 믿는다. 다만 이 모든 과정이 자연스럽고 점진적이라고 봐선 안 된다. 민주주의를 위한 여정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면 다른 쪽으로 자연스럽게 반동하는 ‘시계추’가 아니다. 매 순간 투쟁하고 희생하며 이뤄낸 변화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ㅡ정권은 바뀌었지만 ‘일상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는 이들도 많다. 정치를 넘어, 학교·회사 등 다양한 층위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오고 있는데.

“‘민주주의’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전 대통령이 퇴진하고 새 정부가 들어섰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완결된 게 아니다. 가족 관계, 학교, 가사노동, 의료 시스템 등 일상 생활 속 모든 제도에 존재하는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인지하고, 저항하고 투쟁하면서 ‘민주적’으로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지금까지는 독재 정권이나 경제적 계급 등 대립이 선명한 영역에서의 싸움이었다면, 이제는 은밀하게 이뤄졌던 권력 구조와 억압에서 더 많은 목소리가 터져나올 것이다. 한국사회의 향후 이슈 중 가장 큰 변화는 가부장제에서의 여성(젠더) 문제, 이주민 문제에서 나올 것이라고 본다.” 

그는 “민주주의가 두텁게 깔린 사회란 시민사회 모든 일원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라며 “누군가를 ‘소수자’라고 규정짓는 행위 없이는 그 누구도 소수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소수자라고 규정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의 삶도 ‘소수자’가 아니다. 누군가를 ‘이주민’, ‘성소수자’ 등의 단어로 부르는 순간, 마치 우리와는 무관한 타인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이러한 언어를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언어 이면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삶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경계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확장해 나가는 게 비판적 교육의 역할이다.

◇교육 속 ‘다층적인 권력관계’ 들여다봐야

한평생, 사회 내에서의 교육과 권력관계를 들여다 본 그를 꿰는 키워드는 ‘교육과 권력, 이데올로기’. 교육은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통찰을 제시하면서 비판교육학의 이론을 닦았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는 사회 내 이데올로기와 정치 갈등구조에서 결정된다는 것.

그는 저작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에서 ‘미국 내 월마트와 같은 거대한 다국적 기업이 보수적인 집단과 연대해 커리큘럼 및 교육 방향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과정’을 서술하며 “전 세계적으로 경제만능주의가 교육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가 “비판적인 교육자라면 커리큘럼이나 가르치는 내용, 다층적인 힘의 역학관계,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는 방식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으로 되물어야 한다”고 한 이유다.

ㅡ다층적인 역학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했는데.

“공산당이 집권한 인도의 한 주에서 여성 및 낮은 계급으로 소외됐던 이들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컴퓨터 기술을 교육해 여성 컴퓨터 엔지니어와 프로그래머를 늘리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과거에 비해 혁명적인 교육 정책이었다. 소위 ‘진보적인’ 교육 단체들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와 여성학자인 내 아내를 초청했다. 그런데 학교에 가보니 취지와는 다르게 대부분이 남학생이었다. 학교 내 깨끗한 화장실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남자 아이들은 밖에서 볼일을 보면 됐지만, 여자아이들은 그런 행동을 하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낙인이 찍혔다. 성폭력 위협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다. 시민단체와 주정부에서는 가부장제라는 기존 권력관계를 민감하게 보지 않았던 것이다. 교육이 비판적인 시각에서 예리하지 않으면, 기존 사회 내 권력구조나 이데올로기를 답습하게 된다.

ㅡ한국에서 중고등학교는 ‘대학 입시’를 위해, 대학은 ‘취업’을 위해 존재하는 듯 보인다. 경쟁이 치열하고 사교육이 과열되기도 했다. 

“한국만의 사례는 아니다.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사회와 학교 제도가 시장 위주의 시스템에 통제됐다. 교육이 취직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고, 부유한 이들이 특정한 학교를 향유하고 기득권을 유지하도록 기능하게 됐다. 아이들은 사회의 미래다. 교육의 목적은 취업이 아니다. 한 사람의 존재 자체와 관련된 것이고, 그것이 모여 다시 사회의 기반이 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교육에선 ‘아이가 부모의 소유물이고,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힘이 없다’고 가르쳤다. 시험과 취직을 위한 ‘공부’만을 강요하면서 손목을 묶어두고 시스템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키운다.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대신,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만 강조해 왔다. 이건 상징적인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ㅡ교육이 정말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교육은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교육이어야 하는지,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고 가르치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빠진 내용은 무엇인지, 누구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교육자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교육 방식에서의 고민도 필요하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상호 존중하는 자세다. 위에서 이야기하고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얘기하며 비판적 민주주의를 연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학교의 역할은 민주적인 삶의 방식을 익히고, 시민으로서의 책무를 고민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의미가 없다.”

◇‘우리’ 개념 넓히고 ‘기억’ 보존하고

지난 29일에 열린 피스모모의 5주년 컨퍼런스. 마이클 애플 교수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피스모모

ㅡ교육이 사회 구조에 대항한 실제 사례가 궁금하다.

“미국의 ‘대수학 프로젝트(Algebra Project)’가 좋은 예다. 백인 아이들에 비해 흑인계 아이들은 고등학교 진학률부터 크게 차이가 난다. 대부분이 수학 점수에서 낙제를 받았다. 빈곤계층 흑인 여학생일수록 수학 교육을 접할 기회조차 없다는 통계도 있었다. ‘대수학 프로젝트’는 빈곤 계층 흑인계 학생을 대상으로 수학 지식을 가르치는 프로젝트였다. 삶에서 크게 쓸모 없어 보이는 ‘수학기술’이지만, 아이들 스스로 비판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게 만듦으로써 삶의 변화를 만들었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대수학 프로젝트를 진행한 교사와 학생들은, 이 지역에 빈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도소를 하나 더 짓겠다는 주정부 계획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아이들 스스로 찾아낸 문제였는데, 같은 일을 해도 흑인이 교도소 가는 비중이 훨씬 높았고, 아이들에게는 무기력한 느낌을 줬다.

교사와 학생들은 언론 단체, 지역 비영리단체와 협력해 캠페인을 벌였고, 수학적 지식과 통계를 활용해 현재 있는 교도소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1년 후엔 같은 예산을 교육에 쓰도록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힘을 주고, 기존의 커리큘럼과 구조에 대항한 사례다. 그 밖에도 아이들에게 연구 주제를 찾도록 하거나 비판적인 사고를 북돋는 등, 민주적인 혁신 교육 시도가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책 ‘마이클 애플의 민주학교: 혁신 교육의 방향을 묻다’에 더 많은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ㅡ더 나은 사회를 위한 민주적인 교육을 한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역사를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상식’ 혹은 ‘금기’로 여겨지는 것들에 끊임없이 도전한 이들이 있었다. 그 과정을 통해, 사회도 교육도 민주적으로 바뀌어 왔다. 그들의 어깨 위에 우리가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국적을 불문하고 기득권 층에서 역사를 왜곡하거나 망각하게 만들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늘 다루는 커리큘럼에서 빠진 내용은 무엇인지 찾아내고 저항했던 선조들의 기억을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금기에 도전할 힘을 얻는다.”

ㅡ한 명의 개인이 거대한 시스템을 바꾸는 게 가능할까. ‘일개 교사로서 무력하다’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회의적이기 쉽다. 그럼에도 ‘바꿔보겠다’며 투쟁했던 이들이 있었고, 그들로 인해 역사는 조금씩 진보했다. 광주 항쟁 때 거리로 나섰던 고등학생들을 떠올려보자. 거리에서 바로 체포됐다고 해도, 행동에 나섰던 그들이 있어 거대한 사회 변화가 만들어졌다. 그들이 ‘겨우 고등학생인 내가 무슨 힘이 있느냐’며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아무 변화도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희망을 갖고 일단 행동하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또한 하나의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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