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Cover Story]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 10년

‘아이들이 건강한 세상’ 10년···이젠 ‘재능키우기’에도 도전
“앞으로 20년은 좋은 사회 만들기에 앞장서겠습니다”
박세준 한국암웨이 대표

“4학년 때였어요. 싸움으로 근처에서 저를 당해낼 애가 없었는데, 옆 학교에서 누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당장 싸우러 갔죠. 그런데 거기에서 그 학교 축구부 선생님을 만났어요.”

제주유나이티드FC의 공격수 강수일(24) 선수는 그날 선생님 덕에 싸움을 못했고 대신 달리기 시합을 했다. 인생을 바꾼 달리기였다.

“그러고는 얼마 후에 그 학교로 전학을 갔어요. 축구를 시작한 거죠.”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 아이들이 지구촌국제학교 축구팀과 축구시합을 벌였다. (오른쪽 아래) 제주유나이티드FC의 강수일 선수가 축구교실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 아이들이 지구촌국제학교 축구팀과 축구시합을 벌였다. (오른쪽 아래) 제주유나이티드FC의 강수일 선수가 축구교실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강수일 선수는 ‘싸움꾼’이었다. 얼굴을 보고 놀리는 아이들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여지없이 싸운 결과다. 상처 많은 자신의 아이 시절을 담담히 돌아볼 수 있게 된 강수일 선수는 웃으며 얘기했다.

“제가 살아보니 다문화가정 아이로 자라거나 소외계층 아이로 자라면 소심해지고 위축되기 쉬운 것 같아요. 저도 그랬고 요즘 아이들도 그렇겠죠. 그런 아이들에게 꼭 운동을 권하고 싶어요. 운동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고 아이들과 어울려 웃으면서 피해의식도 사라졌거든요.”

지난 10월 8일 강수일 선수는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과 함께 하는 지구촌 축구한마당’에서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과 지구촌 국제학교 아이들을 위해 하루 선생님으로 나섰다. 아이들에게 드리블과 패스, 슛에 대해 가르치고 실습도 도왔다. 발 딛는 위치부터 시선까지 꼼꼼히 챙겨 지도하고 실습을 마친 아이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수일 선수는 “지금은 작은 역할 밖에 못하지만 더 유명해지고 더 잘하는 선수가 되어서 더 많은 나눔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축구를 통해 희망을 가질 수 있다”라는 바람은 단순히 꿈이 아니라 비전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암웨이의 뉴트리라이트 어린이 축구교실이 그렇다.

한국암웨이는 지난 2001년 10월 ‘뉴트리라이트 어린이 축구교실’을 창단했다. “아이들이 건강한 세상”에 기여하겠다는 목표로 시작했던 축구교실이 올해로 만 10년이 되었다. 몸의 건강과 마음의 건강을 모두 챙긴 10년이었다.

처음에 서울지역 저소득층 아동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축구교실은 어느새 전국 12개 지역에서 다문화가정 아동, 한국암웨이 독립자영사업가(IBO) 자녀 등이 함께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그사이 축구교실을 거쳐간 아이들만 2200여명이다.

한 기업에서 10년 동안 꾸준하게 사회공헌사업을 전개하고 발전시키는 경우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기업 사회공헌 사업 담당자들이 사회공헌 사업도 유행을 타야 한다고 공공연히 푸념하는 것이 세태인 까닭이다. 그러나 지난 13일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 10주년 홈커밍데이(Homecoming Day)에서 만난 이들은 기업의 일관되고 꾸준한 사회공헌활동이 분명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산 증인들이었다.

백운태(24)군은 중학교 1학년이던 2002년에 선생님의 권유로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에 들어왔다. 일주일에 3회씩 축구교실에 나갔고 교내외 축구대회에 아이들의 추천으로 자주 나갔다. 그러다 보니 학교생활에 자신감도 붙었고 아이들과의 관계도 원만해졌다. 그러면서 체육지도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운 운태군은 지금 체육교육과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얼마 전엔 심판 자격증도 땄다.

“체육은 의학, 인문학, 역학과 통계학 등이 모두 포함된 복합적인 학문이더라고요. 공부가 어렵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뉴트리라이트축구교실에 대해 인문학적으로 설명해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운태군은 달변으로 답했다.

“어릴 때는 아이들이 모르는 사람과도 빨리 친해져요. 이런 시기에 집에만 있으면 소심해지고 소외도 심해지죠. 축구를 통해 또래와 어울리고 서로 격려도 해주면서 자신감이 생길 거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한국암웨이는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의 업그레이드를 구상하던 중 축구에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엘리트축구단도 창단했다. 기존의 축구 교실과는 별도로 한 단계 나아간 ‘재능 키우기’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14살 황준호군은 지금 부산 아이파크의 유소년 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에서 맺어진 축구와의 인연이 프로축구선수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다. 177cm의 키를 활용해 헤딩을 잘하고 미드필더에서 공수전환을 빠르게 유도하는 것이 특기다. 일주일에 5일 내내 연습을 하는 힘든 생활을 하고 있지만 FC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 같은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다. 더 큰 꿈도 있다. 10년 후에 위대한 축구선수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엄마에게 효도하고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고 싶다”는 의젓한 답이 돌아왔다.

뉴트리라이트 부산축구교실의 김수진 감독은 “뉴트리라이트 축구교실은 아이들이 운동을 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만들고 있다”며 “아이들의 인성이 성숙하고 동시에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국암웨이의 박세준 대표는 “지난 10년간 우리의 관심은 아이들의 신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북돋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였다며 “뉴트리라이트 어린이 축구교실은 이런 우리의 고민을 실천하는 방법이며 한국암웨이가 우리 사회를 위해 실천하는 사회적인 투자이기도 하다”고 그 취지를 밝혔다.
“여기에서 일하면서 사람의 힘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에 2년만 일해보자는 것이 어느새 15년이 됐습니다.”

미상_사진_사회공헌_박세준한국암웨이대표_2011힘들어하는 사람들과 절망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며 물었다. 2년만 일해보자고 일터에 들어섰던 사람을 ‘CEO’로 만들어버린 ‘사람의 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국암웨이의 박세준<사진> 대표는 “꿈, 긍정적인 생각, 열정”이라고 답했다.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다. 박세준 대표는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꿈에 대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던 사람이다.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당시 대구동산기독병원에서 미국에서 온 평화봉사단 일행과 같이 일을 했습니다. 귀가 안 들리거나 정신지체가 있거나 뇌성마비 등이 있어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언어교정을 해주는 일을 도왔습니다. 한 아이의 입에서 ‘엄마’라는 말이 6개월 만에 흘러나왔고 아이의 엄마는 펑펑 울었습니다.”

‘엄마’라는 말은 이 어린아이와 부모의 꿈이었다. 평화봉사단은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창설했다. 미국의 자원봉사자들을 2년간 개발도상국에 보내 봉사를 실천하도록 한 프로그램이다. 박세준 대표는 결핵, 한센병, 무지로 신임하는 한국사람들과 이들을 돕는 평화봉사단을 모두 보았다. 절망과 열정은 삶이라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IMF 외환위기 시절에 저희 회사에 화이트칼라 분들과 이들의 배우자 분들이 많이 찾아오셨습니다. 절망 속에서 한국암웨이의 자영사업가(IBO)가 되겠다고 찾아오신 분들이 첫 번째로 얘기하는 것이 자신의 꿈이었습니다.”

평생직장의 틀이 붕괴되고 대량해고가 연일 신문의 1면을 장식하던 시절이다. 이때 꿈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영사업가로 한국암웨이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이제는 한국암웨이와 함께 사회공헌에 나선다.

“한국암웨이와 자영사업가 분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다음 세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0년 전만 해도 지속가능성이 있게 성장을 하자고 하면 사람들이 이해를 못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하는 공헌이 우리의 비즈니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암웨이는 국내에서 소비자와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기업 중 하나다. 과연 소비자들은 변화하고 있을까? ‘마켓3.0’의 저자 필립 코틀러는 다가오는 시대에는 소비자가 기업의 영혼과 교감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세준 대표는 “피부로 느낀다”고 답했다. “학자들이 내놓은 이론적인 정의를 피부로 느끼는 것이 재미있을 정도”라고 한다.

“한국암웨이의 초기 전략은 100%의 소비자 만족도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제품의 질에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옛날에는 제품의 질과 기능만으로 충분히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소비자들의 ‘감성’을 터치해야 하는 시기가 왔습니다. 소비자가 점점 우리의 제품뿐만 아니라 우리의 서비스, 우리가 소비자에 대해 생각하는 바에 대해 감정이 결부된 소통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소비자의 변화에 발맞추기가 무섭게 소비자는 매섭게 변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회사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우리 회사의 가치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 내부를 보더라도 자영사업가 분들의 학력이 올라가면서 회사의 사회 기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회공헌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공헌을 해야 할까. 박세준 대표는 ‘자선적인 활동’의 한계를 지적했다.

“자선적인 공헌이 어찌 보면 가진 자의 오만일 수 있습니다. 자선적인 공헌을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더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암웨이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국내외에서 많은 지원을 해왔다. 결식아동 지원부터 교육지원, 체육지원까지 진행한 끝에 도달한 것이 한국영양학회와 공동으로 개발 중인 건강지수(NQ, Nutrition Quotient)다. 어린이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궁극적으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사회적으로 올바른 영양관리를 위한 지표라는 인식에서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우리가 제시한 지표로 아이들의 영양에 대해 고민하고 좋은 식습관을 가질 수 있게 돕는 것”, 박세준 대표는 이를 일컬어 “자선적인 기부와의 균형을 맞추는 사회적인 투자”라고 설명했다.

박세준 대표는 비즈니스와 사회적인 투자의 상생모델도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원포원(One for One) 마케팅’이 그 예다.

1998년 IMF 외환위기로 국내 중소기업들이 줄도산을 할 때 박세준 대표는 ‘암웨이 미국 본사 제품 1종이 국내에 출시될 때마다 국내 기업 제품 1종을 암웨이 유통망을 통해 전 세계에서 판매하는’ 마케팅을 시작했다. 전 세계 58개국에서 활동하는 암웨이의 유통망을 국내 중소기업의 시장으로 만들어낸 셈이다. 지금 암웨이를 통해 전 세계에서 판매되고 있는 국내 중소기업의 제품은 260여종이다. 최근에는 제품에 이어 국내의 우수한 기술력을 암웨이 본사에 수출하는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결국 한국암웨이는 어떤 회사가 될까. 박세준 대표는 “암웨이의 비전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해 도움을 주는 기업(Helping People Live Better Lives)’이라며 이는 결국 더 나은 삶에 대한 플랫폼”이라고 답했다.

“한국암웨이가 올해 20주년을 맞았습니다. 과거의 20년은 좋은 생활을 만들어가는 회사였습니다. 앞으로 20년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한국암웨이가 될 겁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