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0일(화)

시각장애인 일러스트레이터 ‘미긍주혜’, 희망을 그리다

뇌병변·시각장애 딛고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로

걸림돌을 디딤돌로···‘미긍주혜’의 희망 메시지

 

“뺨을 스치던 바람까지 생생해요. 그날 만난 친구는 제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고 했어요. 집을 바로 앞에 두고 큰 길을 건너고 있었는데, 그 이후 기억이 사라졌어요.”

의상디자이너를 꿈꾸던 여대생이 25살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차량에 치여 8미터를 날았다. 의사는 살아날 확률이 5%라고 했다. 뇌사상태였다. 산소호흡기로 간신히 수명을 연장한 지 26일째 되던 날, 그녀는 깨어났다. 그리곤 뇌병변장애 1급 판정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격 뇌 손상으로 인한 시각장애도 나타났다. 모든 사물이 5도 기울어진 상태로 겹쳐보였다.

“처음엔 입술만 꼬물꼬물 거렸대요. 엄마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3살’이라고 답했대요. 목소리도, 지능도 전부 아기에 머물렀어요. 사람들이 절 보면서 울던 게 기억나요. 하루에 약을 한 주먹씩 다섯 번 먹었는데, 싫어도 열심히 삼켰어요. 아기는 세상을 ‘긍정’하잖아요. 약을 잘 먹으면 주변에서 박수치며 칭찬해주니 마냥 좋아서 웃었다네요. 여기저기 인공뼈와 철심을 박았어요. 수차례 수술을 받고 1년 반 후 퇴원했어요. 서서히 본래 나이의 지능으로 회복되고 나니, 현실이 참 끔찍했습니다.”

 

'미긍'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강주혜 작가는 "세상의 벽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나은미래
‘미긍’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레이터 강주혜 작가는 “세상의 벽에 부딪혀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이 위로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더나은미래

 

강주혜(37) 작가는 검은색 백팩에 가득 담은 작품들을 하나 둘 꺼내들었다. 볼펜으로 그린 일러스트 속엔 14년 전 사고 당일부터, 병원을 퇴원하던 날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라며 꺼내든 작품 속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모든 상이 2개로 맺히는 그녀가 달을 보고 직접 그린 일러스트였다. 그림 옆엔 짧은 시가 적혀있었다. 

두 개의 달을 보며 소원을 빌었어/마비된 손으로 단추를 채울 수 있게 해달라고/이젠 그 손으로 긍정의 그림을 그리고 있지/이루고 싶은 꿈이 있니? 두 개의 달을 불러줄께/진실되고 절실한 소원이라면 이루어질거야/반드시!
'미긍주혜'가 그린 작품 '두 개의 달'. 시각장애로 사물이 겹쳐보이는 그녀는 보이는 그대로를 작품 속에 담는다. ⓒ더나은미래
‘미긍주혜’가 그린 작품 ‘두 개의 달’. 시각장애로 사물이 겹쳐보이는 그녀는 보이는 그대로를 작품 속에 담는다. ⓒ더나은미래

강씨는 ‘미긍(美肯·아름다운 긍정)’이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글쓰는 일러스트레이터’. 두 개로 겹쳐진 사물을 보이는대로 그리고, 자신의 경험과 감성을 담은 글귀를 함께 적는다. 개성 담긴 일러스트는 SNS에서 연일 화제다. 페이스북 라이브 구독자 수가1만명이 훌쩍 넘을 정도로 유명인이다.

그녀의 일러스트는 스타와 디자이너가 미션을 수행하며 우승자를 가리는 SBS 서바이벌 프로그램 ‘패션왕코리아2’에서 가수 황광희와 디자이너 곽현주팀이 만든 패밀리룩으로 재탄생했고, LG유플러스에서 고객 사은품을 위해 제작한 ‘무한긍정우산’도 강씨가 직접 디자인했다.

그녀는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더라”면서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녀의 삶을 바꾼 두 번의 교통사고

“병원 퇴원 후 몇 년간 방 안에만 틀어박혀있었어요. 용기를 내서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다니게 됐어요. 세상에서 제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에선 제가 가장 어리고 시력도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햇빛을 본 기억이 없다고 하셨어요. 태어날 때부터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전맹(全盲)인 분들에게 어깨를 빌려주고, 눈이 가장 밝다는 이유로 반장도 됐죠.

때마침 복지관에 그림 그리기 취미반이 생겼다. 사고 직전까지 명동·동대문에서 점포 3개를 맡아 패션 유통과 디피(디스플레이)를 맡았던 그녀의 눈은 반짝였다. 의상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던 예전 꿈이 떠올라 정말 열심히 그렸다. 3년 후, 그림 그리기 수업이 없어지자 강씨는 홍대 일러스트 학원을 찾아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이 너무 부러웠다고. “나도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원장을 설득해, 매일 아침 이젤 앞에 앉았다.

“무릎이 너무 아파서 오래 앉아있을 수 없었어요. 눈도 잘 안보이니 속도도 느려서 점점 격차가 벌어지더라고요. 그래도 열심히 그렸어요. 이제 막 희망이 생겨나던 시점에 또 한 번의 사건이 터집니다.

2011년 브레이크 사고로 도로 위를 빙빙 돌던 자동차가 전봇대에 부딪혔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강씨의 무릎은 다시 깨졌고, 그 날의 충격으로 오른손 마비가 더 심해졌다. 최소 10시간 간격으로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굳어버린다고 했다. 이제 막 그림에 재미를 붙이던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강씨는 ‘양들을 부탁해’로 유명한 동화 일러스트 작가 김세진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깁스 한 다리를 질질 끌면서 김씨의 작업실이 있는 낙산공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선천적 장애로 다리가 불편한 김씨는 오랜 시간 그녀의 멘토 역할을 해왔다. 그는 “1주일에 100장씩 그림을 그려오라”고 했다. 시각장애로 그림 그리는 시간이 오래걸리고 자주 고쳐야하다보니, 강씨는 연필 대신 볼펜 드로잉을 시작했다. 0.03㎜ 펜으로 점을 찍고 천천히 선으로 연결해나갔다. 처음엔 재활을 목적으로, 그 다음엔 눈에 들어오는 사물을 그리고 싶어서 시작된 드로잉이 하나 둘 작품이 됐다

“그때 나온 작품이 바로 ‘목발에 핀 복숭아’에요. 복숭아꽃의 꽃말을 아세요? 용서, 희망, 매력이에요. 두 번의 사고 없이 전처럼 편안하게만 살았다면 내가 이렇게 절실하게 매달리고 노력할 수 있었을까요? 미긍이란 필명도 이때 만들었죠. ‘아름다운 긍정’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미긍'이란 필명으로 처음 그린 그림. 목발에 핀 복숭아꽃의 꽃말은 '용서, 희망, 매력'이라고. 미긍주혜는 '아름다운 긍정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나은미래
‘미긍’이란 필명으로 처음 그린 그림. 목발에 핀 복숭아꽃의 꽃말은 ‘용서, 희망, 매력’이라고. 미긍주혜는 ‘아름다운 긍정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더나은미래

◇중도장애를 겪는 이들에게 희망이 되길    

발달장애센터에서 강씨의 작품 원본을 오픈식 행사에 걸면서, 그녀의 그림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개성과 희망을 담은 강씨의 일러스트는 입소문을 탔고, 곧 작품 요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2013년 말엔 개인전도 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손가락질하던 경험을 ‘광대 시리즈’로 녹여냈다.

“여자 혼자 다리를 절거나 두리번거리면 이상한 사람이 툭툭 어깨를 치며 말을 걸어와요. 약장수, 의료기기 판매원, 사이비 종교 전도사 등 다양해요. 지하철을 혼자 타는게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어요. 계단에서 절룩거리면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상처도 많이 받았고요. 그러다 깨달았어요. ‘남들보다 잘하기보단 어제보다 잘하면 된다’는 걸요. 나를 믿고 한 걸음씩 나아가자는 마음을 담아 광대 시리즈를 그렸고, 그때부터 그린 그림을 책으로 펴냈어요.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필요로 하는 곳에 꾸준히 재능기부를 해왔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에도,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한 복지관, 척수장애협회 등에도 강씨의 작품이 걸려있다. 얼마 전엔 국내 최초 어린이재활병원 푸르메재단에서도 그녀의 작품 원본을 구매해갔다. 그녀는 장애인식 개선을 위한 전시회도 꾸준히 열고 있다. 중도장애인이 된 여학생에겐 멘토를 자처해 진로 상담도 한다. 매주 화요일엔 페이스북 라이브 ‘미긍 TV’를 방송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녹십초 요양병원에 걸린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긍주혜
두번째 사고 후 13개월간 치료받았던 녹십초 요양병원에 재능기부 전시회를 열었다. ⓒ미긍주혜

“전시회에서 만난 분들이 참 많이 우셨어요. ‘나도 계단 내려갈 때 이렇게 힘들고, 사람들 손가락질에 상처를 받았다’면서요. 26살에 교통사고로 다리가 절단된 여학생은 제 작품을 보고 위로가 됐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습니다. 얼마 전엔 장애의 달을 맞아 장애인 잡지사에 작품 3점을 보내드렸어요. 이 그림 좀 보시겠어요? 엘리베이터 앞에서 휠체어를 타고 기다리는 장애인 분의 모습이 보이죠? 제목이 ‘13분째’예요. 실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걸리는 평균 시간이에요. 저도 25살 사고 전까진 병원을 가본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죽기 전에 내가 장애를 입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어요. 조금 더 상대방의 입장에서 배려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미긍주혜가 펴낸 책 '아름다운 긍정, 미긍' 속에 담긴 작품들의 모습. ⓒ더나은미래
미긍주혜가 펴낸 책 ‘아름다운 긍정, 미긍’ 속에 담긴 작품들의 모습. ⓒ더나은미래

그녀의 도전은 계속된다. 자신의 작품 58점을 담은 책 ‘아름다운 긍정, 미긍’ 800권에 대한 수익금으로 장애인식 개선 전시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하려 한다. 장애인복지관 등 자신의 작품이 필요한 곳에 재능기부를 하고, 중도장애인의 멘토 활동도 확대할 계획이다.

“제 그림과 이야기가 세상의 벽에 부딪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싶습니다. 세상을 긍정하는 미긍의 일러스트를 기대해주세요.”

정유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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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공익 전문 미디어 ‘더나은미래’와 해피빈은 장애인의 날을 맞아 그녀의 작품 활동을 응원하는 공감펀딩을 기획했습니다. 미긍주혜는 그녀가 그린 일러스트를 담은 800권의 책자 수익금을 장애인식개선 전시회, 장애인복지관 등을 위한 작품 기부, 재능기부 활동 등에 사용하게 됩니다. “내 그림과 이야기가 세상의 벽에 부딪혀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고 싶다”는 미긍주혜 작가를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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