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아동학대 특례법 2년… 정부의 “대책 수립” 말 잔치로 끝나나

美·英 아동 정책과 비교해보니

지난해 12월, 아버지의 학대와 굶주림을 피해 맨발로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한 소녀가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었다. 이후 전국적인 아동학대 실태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실은 더 잔혹했다. 4년 만에 냉동된 주검으로 발견된 부천의 초등학생, 11개월간 시신을 집 안에 방치했던 목사 아버지와 계모, 3개월 동안 화장실에 감금됐다 암매장 당한 아동…. 하나씩 발견되는 학대아동 사망 사건들은 사람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관련 정책들이 쏟아지고 대응 방안이 발표됐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월, “아동학대 근본 대책을 수립하라”고 지시했고, 황교안 국무총리는 “범 정부 아동 학대 예방·근절 대책을 조속히 수립하라”고 뒤를 이었다.

사실 정부 차원 대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 2월, ‘아동학대 특례법’ 시행을 앞두고 정부는 ‘아동학대 예방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해 9월부터는 아동학대 특례법도 시행됐다. 변화는 있었을까. 특례법 시행 후 2년, 아동 선진국과의 비교를 통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짚어봤다.

42개 시민사회단체_사진_아동학대 성명서_2016
지난 3월, 굿네이버스, 세이브더칠드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등 42개 시민사회단체는 공동성명을 통해 아동학대 전담 컨트롤 타워를 구축하고 아동보호예산을 증액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정부는 2년 전 아동학대예방종합대책을 발표하고도 손 놓고 있다가 11세 아동이 탈출한 뒤에야 다시 비슷한 대책을 쏟아놓으면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난 지금, 복지부에서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에도 아동보호예산은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42개 시민사회단체

◇영국, ‘정부·의회’ 리더십으로 아동보호체계 전환 이끌어

2000년 2월 24일, 코트디부아르 출신’빅토리아 클림비'(사망 당시 9세)의 죽음이 영국 사회를 뒤집었다. 클림비의 몸엔 128군데 상처가 있었다. 담뱃불로 지지고, 자전거 체인이나 망치와 쇠사슬로 때린 흔적이었다. 학대자였던 고모할머니와 동거남은 이듬해 종신형에 처해졌다. 잔인한 아동학대에 영국 사회가 들끓었다.

그러나 영국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1년 4월, 영국 의회와 보건성 장관은 ‘빅토리아 클림비의 죽음을 철저히 복기하라’는 주문을 내렸다. 158명의 관계자와 121명의 아동보호 전문가가 청문회에 섰다. ‘클림비의 죽음을 막을 기회는 없었는가’, ‘아동보호체계의 구멍은 무엇이었나’ 같은 질문을 물고 늘어졌다. 조사 기간 3년, 들어간 예산 380만파운드(약 56억원), 2003년 1월 발표된 400쪽 분량의 클림비 보고서에는 108가지 정책 제안이 담겼다.

클림비 보고서 이후, 정부는 아동보호체계를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2003년 6월, 영국 최초의 아동부 장관이 임명됐다. 그해 6월, 영국 정부의 아동을 정책 최우선에 둔 국가아동정책 ‘모든 아동은 소중하다(Every Child Matters)’가 새롭게 발표됐다. 정책의 핵심은 기관 간 ‘함께 일하기’와 ‘조기 개입하기’. 이듬해 2004년에는 정부 정책을 반영한 아동법이 새롭게 개정됐다.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관련 기관이 연계해, 학대 사건 발생 이전부터 가족을 지원하는 체제로 아동보호서비스가 전면 개편됐다.

대대적 개편이었지만, 한 번의 시스템 개편이 모든 것을 막진 못했다. 2007년 8월, 학대로 세상을 떠난 피터(사망 당시 1세)의 죽음이 알려지며 영국 사회는 다시 한 번 들끓었다. 2008년 11월, 영국 하원은 클림비 보고서를 진행한 래밍 경(卿)에게 아동보호체계를 다시 돌이키는 새로운 보고서를 요청했다. 아동 지원, 예산, 법적 제도 등에 관한 58개의 새로운 정책 제안이 이뤄졌다. 정부의 대처도 빨랐다. 2009년, 정부는 아동 보호를 위한 새로운 액션플랜을 발표했다. 김기현 성균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영국은 지역정부와 함께 가정 관리와 학대 예방에 방점이 있다”며 “전체적인 아동 보호 체계 안에서 빈곤 가정이나 학대 보호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큰 그림이라는 점에서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했다.

◇미국, ‘더 나은 아동 보호 체계’ 위한 실험과 개혁 진행 중

미국은 어떨까. 지난 2월, 미국에서는 ‘아동학대 근절을 위한 국가전략보고서’가 발간됐다. 보고서를 발간한 곳은 ‘아동학대 및 사망 근절을 위한 위원회(CECANF)’. 2012년 국회에서 통과시킨 ‘아동 보호법(Protect Our Kids Act)’에 의거해 신설됐던 조직이다. 상·하원 의원, 현직 교수, 관련 단체 종사자, 판사 등 12명으로 꾸려졌다. 위원회 운영비로만 연간 200만달러(약 22억원)가 법으로 보장됐다.

‘지난 5년간,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이들의 죽음을 꼼꼼하게 되짚을 것’. 국가전략보고서에서 다루는 첫 번째 정책 제언이다. 아이들의 죽음을 복기하는 게 모든 전략의 첫 단추라는 것. 아동 보호 체계 이행을 위한 충분한 예산 확보, 데이터의 공유 등 아동학대를 근절하기 위한 여러 정책 제언이 보고서에 담겼다.

이뿐만 아니다. 기존 아동복지시스템 개혁이 한창 진행 중이다. 아동학대 위험군에 따라 대응을 다르게 하는 ‘차등적 대응 시스템’이 바로 그것. 고위험 아동학대의 경우 이전과 같이 아동학대 조사와 함께 분리 조치가 들어가지만, 방임 등과 같이 낮은 위험도의 아동학대는 가정 중심의 사례 관리나 복지 서비스가 들어간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미국도 우리나라처럼 ‘신고’와 ‘조사’ 위주로 아동학대 체계가 잡혀있다보니, 신고되지 않은 사례는 발견되기도 쉽지 않고, 설사 신고됐다고 하더라도 다른 위급한 응급 사례에 밀리거나 방치되기 쉽다는 한계가 있었다” 며 “더불어 조사와 처벌 방식으로 갈 때엔 궁극적인 가족의 변화를 끌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연방정부와 주정부 차원에서 막대한 자원과 인력을 투입하고 있다”고 했다. 일리노이주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은 현재 30곳에 달하는 주에서 전격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다른 주에서도 도입을 검토 중이다. 미국 아동학대 사례관리 민간기관인 뉴욕아동센터에서 직접 근무하기도 했던 노충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미국에선 조사 영역은 국가에서 담당하고 사례 관리는 민간에서 담당하게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는데다가, 사회복지사 한 명당 연간 12명의 사례만 담당하도록 정해져 있어 상담원 한 명당 연간 100명에 달하는 사례를 봐야 하는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다”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아동 보호 체계를 더 촘촘하게 다듬기 위해 계속적인 논의와 투자가 이어진다”고도 덧붙였다.

◇대한민국, 말뿐인 정부와 의회?

대한민국은 어떨까. 2013년 12월, 갈비뼈 24개 중 16개가 부러진 채로 사망한 ‘서현이 사망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분노했다. 정부와 국회도 빠르게 움직였다. 1년 넘게 국회에서 계류 중이던 ‘아동학대 특례법’이 국회를 통과했고, 정부는 범 부처차원의 ‘아동학대 예방 및 피해아동 조기발견 종합대책’을 내놨다. 박근혜 대통령부터 여·야 국회의원까지 “근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는 인프라. 현장에서는 “아동 죽고 나면 정부는 떠들썩하게 대책 발표하고, 국회에서도 대책이 줄 잇는 게 여러 번인데, 막상 열어보면 대책을 밀고 나갈 알맹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김정미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사업본부장은 “특례법이 시행되고 아동학대를 ‘범죄’로 인식하고 법무부·경찰청·복지부 등 정부 부처가 같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면서도 “법은 시행됐지만 인프라는 전혀 늘지 않아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간의 인력차도 크고 업무량은 배로 늘어, 상담원들이 수두룩하게 지쳐 떨어져나간다”고 했다. 김 본부장은 “좋은 대책이 쏟아져도 실행할 인력이 없으면 말뿐인 대책에 그칠 뿐”이라고도 덧붙였다.

지난 3월 29일, 정부는 제8차 아동정책조정위원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아동학대 종합 방지대책’을 내놨다. 올해를 “아동학대 근절의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도 밝혔다. 아동보호전문기관 인프라도 확충하고, 빅데이터를 활용해 위험 아동을 발굴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5일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내년도에도 아동보호 전문기관 증설은 없어 보인다. 예산안에는 지역 아동보호 전문기관을 60곳까지 증설한다고 명시했지만, 이는 2016년 예산안에 이미 반영된 내용이기 때문. 168명 상담원을 충원하는 비용으로 잡힌 27억원도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2년 전, ‘2019년까지 지역 아동보호 전문기관을 100곳까지 확충하겠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했던 정부 대책이 ‘말 잔치’로 끝나버린 것 같은 이유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