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화)

퀴퀴한 냄새에 사용법 모르는 동양식 변기… “학교에서 화장실 가기 싫어요”

학교 화장실 개선 시급

서울시 도봉구 방학초 동관 2층 남자 화장실. 제법 묵직한 유리문을 밀고, 화장실 안으로 한 발을 내딛자,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소변기는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고, 모서리가 깨져 세라믹 조각이 날카롭게 드러난 곳도 있었다. “위험하지 않아요?” 기자가 유건(8·방학초 2년)군에게 묻자,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덮으며 말했다. “화장실 냄새가 너무 나요. 다시 나가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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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초는 1982년 개교한 서울시내의 평범한 공립초등학교다. 올해로 설립된 지 35년째다. 유건군의 엄마인 전경옥(42)씨도 같은 학교 2회 졸업생이다. 전씨는 “내가 학교 다니던 80년대나, 아들이 다니고 있는 지금이나 학교 화장실이 변한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3년 전에 서양식 변기로 바꾼 거랑 핸드 드라이기가 설치됐죠. 근데 이 냄새의 근원은 배관이거든요. 화장실 뒤편이 바로 정화조예요. 창문도 못 연다니까요.” 학교 화장실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칙칙한 에메랄드색의 화장실 문과 파란색 비누. 세면대는 김진서(8·방학초2년)양에게도 한참 낮았다. “손 씻고, 걸레 빨다 보면 허리가 너무 아파요.” 70~80년대에 비하면 아이들의 평균키는 10cm 이상 컸다. 여자 화장실은 ‘수세(水洗·물로 씻어냄)’용 레버가 말썽이었다. 공중화장실에서 볼 수 있는 철재 레버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방학초 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인 홍혜란(39)씨는 “어른들도 어지간히 힘을 줘야 물이 내려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 아이들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했다. 2층 여자 화장실 6칸 중 절반은 물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방학초는 3년 전, 저학년 화장실을 서양식 변기로 바꿨지만 배관을 뜯어내는 대공사를 하지 않은 이상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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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길동초등학교의 화장실 모습. 동양식 변기가 눈에 띈다. / 서울시 제공

방학초보다 더한 학교들도 많다. 서울 시내 초등학교 616곳 변기 5만4268개 중에서 서양식 변기는 3만1966개인 것으로 집계됐다(서울시 교육청, 2016). 절반을 겨우 넘는다. 반대로 초등학교 2903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8.7%가 서양식 변기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두 아이의 엄마인 박지민(42)씨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아이들이 화장실에서 변기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면서 “동양식 변기일 경우 사용법을 몰라 용변을 참고 집에 오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문제는 예산이다. 서울시는 2015년부터 학생, 학교, 전문가가 참여해 다 같이 만드는 ‘꾸미고 꿈꾸는 학교 화장실’ 사업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에는 280억원의 예산으로 168개 학교를 지원했고, 올해도 320억을 들여 265개(초등 195, 중등 37, 고등 33)의 학교 화장실 보수 사업을 진행 중이다.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에서 학교마다 배정되는 예산은 1동당 4500만원에서 8800만원 선. 하지만 개보수를 기다리는 학교에 비해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기피 대상이었던 화장실, 이젠 인기 공간으로 변했어요!

반면 민간 기업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이 창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한 학교도 있다.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길동초등학교다. 지난 17일 오전, 길동초등학교의 쉬는 시간은 조금 달랐다.

“이것 봐라! 나 이만큼 또 자랐다. 너 얼마큼 컸어?”
“에이 그래도 나보다 작다. 꼬마네 꼬마.”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 교실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대화를 주고받는 장소는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숲 속 풍경이 그려져 있었고, 화장실 입구에 설치된 거울 테두리에는 키를 잴 수 있는 로봇 모양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김윤태(길동초 3년)군은 “화장실에 들어갈 때 한 번, 나올 때 한번 키를 잰다”며 쑥스럽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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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개선 사업 후 길동초의 모습. 화장실 입구에는 키를 잴 수 있는 로봇 모양 스티커가 부착돼 있다. / 오민아 기자

“이전 화장실이요? 생각도 하기 싫어요.” 이서진(9·길동초 3년)양의 얼굴이 금세 찌푸려졌다. “학교 화장실은 너무 깜깜하고, 더럽고, 냄새가 났어요. 화장실에 가고 싶어도 계속 참다가 집에 가면 엄마한테 인사하기도 전에 화장실로 뛰어갔어요. 지금은 저 혼자서도 잘 갈 수 있어요!” 박아름(9·길동초 3년)양도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겨울에는 물티슈를 들고 다니고, 화장실 문이 제대로 잠기지 않아 문이 열리는 바람에 놀란 적이 많았다”고 했다.

화장실 개선 사업 후 길동초의 모습. 화장실 입구에는 키를 잴 수 있는 로봇 모양 스티커가 부착돼있다.
사실 길동초는 2015년도 사업 대상에서 탈락한 학교였다. 그런데 지난해 5월, 타일·위생도기 제조업체인 ‘아이에스동서’가 서울시의 ‘학교 화장실의 꿈’ 캠페인을 보고 도움을 주고 싶다고 연락이 온 것. 2015년 학교 선정 작업은 끝난 터라, 후순위로 밀렸던 길동초가 행운의 대상이 됐다. 아이에스동서는 4층 건물의 4개 화장실 보수를 무상(4억원가량)으로 지원했다. 새롭게 탄생한 화장실이 아이들에게 개방된 것은 지난 10월. 서진양과 아름양은 “천국에 온 것 같았다”고 했다.

민간 기업의 든든한 지원 덕분에, 화장실 개선 작업에 아이들의 의사도 적극 반영됐다. 5주에 걸쳐 학생과 학부모, 교사, 건축 설계사까지 참여해 ‘내가 가고 싶은 화장실’에 대한 디자인 회의 작업이 진행됐다. 두 달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학년 층은 우주여행, 2학년 층은 바다 속 풍경, 3학년 층은 숲 속 동물 등 아이들이 원하는 주제로 화장실이 꾸며졌다. 학년에 맞춰 세면대와 변기의 높이도 차이를 뒀다. 장애인용 화장실도 기존에 1곳에서 한 층에 한 곳씩 총 4곳으로 확대됐다. TF팀에 참여했던 전태준(10·길동초 4년)군은 “친구들이 편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행복하다”며 “오랫동안 쓸 수 있도록 깨끗하게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나영균 길동초 행정실장은 “필수시설임에도 기피 대상이었던 화장실을 개선한 이후에 아이들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며 “화장실은 생리 현상을 해결할 뿐 아니라 아이들끼리 교류도 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시 금천구 동일여상 또한 전교생 900여명이 화장실 개조 프로젝트에 매달린 곳이다. 함주연(17·동일여상 3년) 총학생회장은 “쉬는 시간마다 각 반을 찾아 전교생에게 기존 불편 사항과 좋아하는 색깔, 디자인까지 세밀히 의견을 모았다”고 했다. 화장실 옆 작은 공간을 별도로 마련, 벽면에 여러 개의 전신 거울을 설치한 일명 ‘파우더룸’을 마련한 것도 학생들의 요구였다. 주연양은 “학교 특성상 학생들이 면접 볼 일이 많은데 전신 거울이 없어 불편하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사립학교인 동일여상에서는 학교 운영비를 줄여, 서울시 화장실 개선 공모 자금(2억)에다 6000만원의 예산을 보탰다. 교사들은 직접 도매 시장으로 뛰어다니며 가격 협상도 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3개뿐이던 실습동의 여자 화장실은 9개로 늘었고, 식당 건물의 일부 화장실도 개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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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여상 화장실은 학생들의 의견을 받아 전신 거울이 설치됐다.

가장 크게 바뀐 건 학생들의 밝아진 모습이다. 강다비(17·동일여상 3년)학생은 “예전엔 악취도 심하고 물도 제대로 안 나와 아예 화장실을 가지 않았는데 이젠 학교 화장실에 대한 이미지 자체가 바뀌었다”고 했다. 이선옥 동일여상 교장은 “앞으로 화장실과 파우더룸에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며 갤러리로 활용하는 등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존감을 높이는 공간으로 계속 활용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서경란 서울시 교육환경지원팀장은 “기업으로부터 운이 좋게 도움을 받은 몇몇 학교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학생들의 수요를 반영한 화장실을 만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제대로 된 화장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민간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경하·강미애·오민아 더나은미래 기자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고 싶은 화장실’을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요. 화장실문화시민연대가 서울시 초등학교 4~6학년 12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2012년), 학생들의 64.7%가 학교 시설 중 가장 불편한 곳으로‘화장실’을 꼽았습니다. 학교의 필수 공간인 화장실이 가장 후진적인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있는 셈입니다.

서울시가 2014년 10월, ‘함께 꿈 화장실 사업’ 시범학교로 선정된 7개교(초등학교 3곳, 중학교 2곳, 고등학교 2곳) 학생 541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도 비슷합니다. 학생들은 ‘냄새가 난다(58.9%)’는 것을 가장 불편한 점으로 꼽았고, 이어 ‘불결하다(29.3%)’, ‘공간이 협소하다(7.3%)’ 등의 순이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미끄러지거나 모서리에 부딪혀 다친 경험이 있는 학생들도 5명 중 1명(20.5%) 꼴이었습니다.

2015년부터 서울시는 서울시교육청과 함께 ‘꾸미고 꿈꾸는 학교 화장실, 함께꿈’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이 280억(2015년), 318억(2016년)의 예산을 편성해 학교 화장실을 개선하고 있습니다. 개선 사업 대상 학교는 교육지원청에서 신청을 받아, 실사를 거쳐 노후도를 점검한 뒤 선정됩니다. 하지만, 현재 학생들이 원하는 화장실로 탈바꿈하기에는 추가로 민간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입니다. 서울 시내 초·중·고교 1309곳 중 올해 개선 대상으로 선정된 학교는 265곳 정도에 불과합니다.

※ 학교 화장실 개선 사업을 돕고 싶은 기업 및 개인은 더나은미래 공익사업국(070-4616-5900)으로 연락주시면 됩니다. 많은 분의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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