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9일(목)

아이 잃고 시들었던 삶, 나눔으로 다시 피었죠

배우 이광기 인터뷰
“2010년 아이티 구호 현장서 지진으로 부모 잃은 아이 만나…’나눔 전도사’ 된 계기였죠”
자선경매·콘서트 열어 기부하고 아이티에 아들 이름 딴 학교 설립
“나눔이 쉬워지는 세상 됐으면”

(사진제공=월드비전)2013년 10월 아이티 케빈스쿨을 방문한 이광기 홍보대사 가족(5)
이광기는 월드비전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아이티,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등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과 소통했다. / 월드비전 제공

 
배우 이광기(47). 그의 삶은 2009년을 기점으로 나뉜다. 아들 석규군이 신종플루 합병증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전(前)과 후(後) 다. 7년의 세월은 그를 ‘나눔 전도사’로 탈바꿈시켰다. 지난달 24일, 우간다 내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굴루 지역을 방문하고 돌아온 이광기와 마주앉았다.

“우리 가족은 시들어가는 꽃이었습니다. 하나가 시들면 주변의 꽃도 함께 지듯이, 석규를 잃고 하루하루 메말라가고 있었죠.”

일곱 살 남자아이만 보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곱슬머리 뒤통수만 봐도 달려가 얼굴을 확인할 만큼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아이티에 강도 7.0의 강진이 발생했다. 아비규환의 현장에 있을 아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차마 쓸 수 없었던 아들의 보험금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매체들은 그의 기부를 연일 보도했고, 한 방송사가 아이티 구호 현장에 함께 가자는 제안을 해왔다.

월드비전_2016년 우간다 굴루지역에서 이광기 홍보대사
2016년 우간다 굴루지역을 방문한 이광기 홍보대사. /제공 월드비전

“처음엔 가지 않을 생각이었어요. 석규 또래 아이들이 다친 모습을 보면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 같았거든요. 가족들도 여진(餘震) 위험이 있으니 가지 말라며 말렸죠. 그런데 마음이 절 자꾸 그리로 이끌더라고요. 아내에게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정 가야겠으면 그냥 가지 말고 옷이라도 주고 오라’며 석규가 입던 옷을 싸줬습니다. 이민 가방 두 개에 꽉 찬 아이 옷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어요.”

아들의 옷을 준비한 것도 모자라 그는 200벌의 티셔츠를 더 제작했다. 석규가 마지막으로 그린 아빠의 얼굴을 옷 위에 새겨 넣고 ‘Love & Bless(사랑과 축복)’라고 써넣었다. 석규와 함께 준비한 선물이 조금이나마 그곳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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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이광기 홍보대사. /제공 월드비전

 
아이티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지진으로 공항이 폐쇄돼 도미니카에서 버스를 타고 7시간을 달린 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그곳에서 이씨는 아들과 같은 나이의 세손을 만났다.

“다른 아이들은 선물을 받아서 기뻐하는데, 그 애만 혼자 멀찍이 떨어져 울고 있더라고요. 부모님을 여의고 슬픔에 빠져있었죠.’아저씨도 얼마 전에 아들을 잃었어’라고 말하며 세손을 안아주는데 저를 확 마주 안더라고요. 마치 석규를 다시 품에 안은 것만 같았죠. 그날 밤, 꿈에서 아들이 ‘아빠, 친구들을 많이 도와주세요’라고 당부했어요. 제 가슴에 나눔의 씨앗이 꾹 박힌 날입니다.”

◇시든 꽃, 나눔으로 다시 피다

2010년, 아이티 방문 이후 그는 한국월드비전의 홍보대사가 됐다. 직접 지인들을 섭외해 6차례나 자선 경매를 열었다. 서양미술화가 이세현 작가, 종이공예가 이승오 작가 등이 작품을 내놨고, 부활의 김태원은 그의 소개로 자선 콘서트에 참여한 데 이어 친필 기타까지 기부했다. 이렇게 모인 후원금은 4억6500만원에 달한다. 연극 ‘가시고기’ 출연료는 소아암 환자에게 기부했고, 에티오피아 육상 꿈나무를 도울 수 있다는 말에 난생 처음 마라톤에도 참여했다.

꿈속 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2012년에는 아이티 페촌빌(Pentionvile)에 아들의 영어 이름을 딴 초등학교 ‘케빈스쿨(Kevin School)’까지 지었다. 이씨는 중학교 1학년이 된 세손을 보기 위해 올해도 아이티에 방문할 예정이다.

올해부터 이광기는 프로 사진작가로 변신했다. 피사체로 자주 등장하는 시든 꽃<아래 사진>과 피어나는 꽃은 아들을 잃고 죽어가던 자신이, 나눔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모습을 대변한다. 지난달 부산에서 공개된 작품 ‘Sympathy vs Empathy’는 알파벳 하나 차이로 ‘동정(Sympathy)’이 ‘공감(Empahty)’이 되듯, 작은 생각의 차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암시했다. 이 작품의 판매 수익은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할 예정이다. 퍼내면 퍼낼수록 깨끗한 물이 솟아나는 샘처럼, 그의 나눔은 끝을 모르고 솟아난다.

“제 마음에 꽃이 핀 건 나눔 덕분이었습니다. 석규와 세손이 제 가슴에 씨앗을 심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무것도 피워낼 수 없는 땅으로 남았겠죠.”

◇내 안의 변화 전하고파… 나눔의 리더 키우는 것이 꿈

이광기의 나눔 바이러스는 주변인들의 삶도 변화시키고 있다. 2014년, 함께 아프리카 현장을 방문한 현대미술가 문형태 작가 역시 이광기의 나눔에 전염된 사람 중 한 명이다.

“이 녀석이 굉장히 시니컬하게 굴더라고요. ‘형이 가자니까 같이 오긴 했는데 우리가 대체 뭘 바꿀 수 있는지 모르겠다’면서요. 그렇게 3일쯤 지났을 거예요. 여자애 한 명이 헤어질 때쯤 되니까 문 작가 손을 꽉! 잡더라고요. 문 작가가 벌떡 일어나서 골목 끝으로 막 달려가기에 쫓아가봤더니 눈물을 쏟고 있었습니다. 가만히 어깨를 두드려줬죠. 그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 저도 세손을 안았을 때 같은 마음이었는걸요. 그 후로 가난과 함께 싸우는 일, 해외에 있는 아이들을 돕는 일에 대해 색안경이 완전히 벗겨졌죠. 얼마 뒤엔 ‘아이들에게 받은 마음이 너무 크다’면서 기부를 시작하더라고요. 제가 하는 일이 작게나마 누군가의 생각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최근 아이들과 나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도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늦둥이 아들 준서(4)는 아직 어리지만, 고등학교 2학년인 큰딸 연지와는 종종 지구 반대편의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이루고 싶은 최종 꿈은 ‘나눔의 리더’를 키워내는 것이다.

이광기_사진전시_꽃_'삶이 꽃이라면 죽음은 삶의 뿌리다'_2016
이광기 홍보대사가 2016년 연 첫 개인전 ‘삶이 꽃이라면 죽음은 삶의 뿌리다’에서 발표한 작품.

“내가 더 가진 것을 덜 가진 사람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에 나눔을 알려주는 리더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티의 케빈스쿨은 나눔으로 지어졌어요. 천막 몇 칸이 고작이던 건물이 지금은 교무실과 태양열 발전기까지 갖추고 있죠. 케빈스쿨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는 리더를 키워낸다면 저는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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