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100만개 일자리 만드는 영국 사회적기업의 비밀

‘2015 한·영 사회적경제 지원기관 교류 프로그램’ 동행 르포

시민사회 발달되어 자선단체 등의 투자 많이 몰려
수익사업 가능하도록 정부 법적·제도적 지원도 한몫

영국 스코틀랜드 북서부 글래스고(Glasgow).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의 모교 글래스고 대학교가 있는 도시다. 이곳에서도 기차와 배를 타고 2시간 30분을 이동하면 더눈(Dunoon)이라는, 쇠락해가는 지역이 나온다. 지난 4일, 방문한 이곳은 중세 유럽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 등장할 만큼 고풍스럽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배에서 내린 지 몇 분 되지 않아 을씨년스럽게 텅 빈 상점이 여럿 눈에 띄었다. 1만5000명이 사는 이곳의 고민은 청년이 떠나고 고령의 은퇴자들만 들어온다는 것이다.

‘이 지역을 어떻게 활력 넘치게 할 수 있을까.’

사회적기업 지원 기관인 퍼스트포트(Firstport)는 일명 ‘바이털 스파크(Vital Spark)’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해결 열쇠는 바로 ‘사회적기업’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쇼나 네일(Shona Neil) 프로그램 매니저는 “초기 자금(Seed funding)을 1인당 최대 5000파운드(900만원)까지 지원해준다”며 “허브 공간을 만들어 서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비즈니스 기본 교육도 한다”고 말했다. 사용하지 않는 정원을 기부받아 야채농장을 만드는 기업(Fuss Pot Farm), 자폐아 부모를 위한 교육 서비스 전문기업(Inspired by Autism), 장애인용 목발 거치대가 있는 저렴한 전동휠체어 제조기업(ZERO Limits) 등 15명이 사회적기업의 첫 단추를 꿰었다. 지역의 비영리단체 활동가에 가까운 이들은 “우리 지역을 되살리겠다”는 포부로 사회적기업 CEO로 변신했다.

영국 사회적기업 ‘빅이슈’ 창립자 존 버드의 제안으로 시작된 홈리스 월드컵.
영국 사회적기업 ‘빅이슈’ 창립자 존 버드의 제안으로 시작된 홈리스 월드컵.

◇7만개 영국 사회적기업의 든든한 힘은 쫙 깔린 ‘신뢰자본’

영국 스코틀랜드의 이 작은 마을에까지 뻗친 사회적기업 열풍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난 11월 29일부터 12월 6일까지 7박 8일 동안 주한영국문화원 초청으로 이뤄진 ‘2015 한-영 사회적경제 지원기관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그 배경을 들여다봤다.

현재 영국의 사회적기업은 7만개나 된다. 2400만파운드(420억원) 정도 매출 규모를 갖고 있으며, 100만개의 일자리를 만들어낸다. 경제 위기 속에서도 지난 10년 동안 가장 크게 성장하는 분야다. GDP의 4%, 전체 일자리의 5%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적기업 성장에 기여하는 건 바로 든든한 ‘신뢰자본’들이다. 폴라 우드먼 영국문화원 사회적기업 프로그램 고문은 “2002년 설립된 사회적기업 지원기관인 언리미티드(UnLtd), 그로부터 10년 후인 2012년 조성된 빅소사이어티캐피털(BSC) 등이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언리미티드는 복권기금 1억파운드(1700억원)를 투입, 빅소사이어티캐피털은 은행 휴면계좌 등을 활용한 6억파운드(1조5000억원)를 투입해 사회적기업 지원에 쓴다.

사회적기업의 성장 단계별, 종류별 인큐베이팅이나 지원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기술(테크놀로지)에 기반한 사회적기업을 키우는 인큐베이팅 기관 ‘캐스트(CAST)’의 키에론 커클런드(Kieron Kirkland) 공동디렉터는 “기업마다 성장 단계별로 투자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 구간이 발생하는데, 우리는 그 갭을 매워준다”고 말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기술기업에 주로 투자하는데, 화가 났을 때 호흡 조절을 통해 진정시키는 모바일 게임, 고령의 부모와 떨어져 사는 자녀를 연결시키는 소셜네트워킹서비스 등이 그 예다.

베스널 그린 벤처스(Bethnal Green Ventures)는 아예 초기 단계 소셜벤처 65개팀을 지원하고 있다. 비키 기번스(Vicki Gibbons) 매니저는 “사업 초기에 1만5000파운드(2600만원)를 운영 자금으로 투자하고, 3개월 동안 사무 공간, 멘토링 등을 제공한다”며 “주요 투자 분야는 보건, 지속 가능성, 교육, 민주주의&사회 분야 기업”이라고 말했다.

전기 에너지를 공유하는 플랫폼 기업 ‘오픈 유틸리티(Open Utility)’,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에 따라 구매를 도와주는 기업 ‘포지션 다이얼(position dial)’, 노동 착취를 하는 광산이 아닌 윤리적인 부품으로 만들어지는 스마트폰 기업 ‘페어폰(Fairphone)’ 등에 투자했다. 비키씨는 “페어폰은 매주 100만파운드(17억원) 정도 판매되고 있는데, 아직 수익을 올리지는 못하고 있다”며 “향후 10년까지는 수익을 예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0년 후를 내다보는 엄청난 ‘인내 자본’인 셈이다. 이번 교류 프로그램에 동행한 조영복 부산대 경영대학장은 “영국은 시민사회가 발달하다 보니 기존의 많은 채리티(charity)나 재단(foundation)의 자금이 사회적기업 쪽으로 점차 몰리는 상황”이라며 “이것이 영국 사회적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①커피전문점이나 아동 돌봄서비스 등 신생 사회적기업에 매뉴얼을 지원하는 디토(ditto) 프로젝트. ②쇠락한 지역을 재생하기 위한 ‘스파크 프로그램’. ③주한 영국문화원 초청 방문팀이 지난 12월 초 의회를 방문, 영국 정부의 사회적기업 지원정책을 들었다. /각 사 제공
①커피전문점이나 아동 돌봄서비스 등 신생 사회적기업에 매뉴얼을 지원하는 디토(ditto) 프로젝트. ②쇠락한 지역을 재생하기 위한 ‘스파크 프로그램’. ③주한 영국문화원 초청 방문팀이 지난 12월 초 의회를 방문, 영국 정부의 사회적기업 지원정책을 들었다. /각 사 제공

◇사회적기업 조달 배려하는 정책적 뒷받침

한 축이 ‘신뢰자본’이라면, 다른 한 축은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다. 사회적기업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법적인 기반을 마련해주고 판로를 개척해주는 매우 디테일한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게 2005년 회사법 내에 ‘지역공동체이익회사(CIC·Community Interest Company)’라는 법인 형태를 포함시켜 상법상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비영리기관이 수익 사업을 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수익 사업이나 주식 발행을 통한 투자 유치도 가능하다(단, 이윤과 자산은 지역 공동체에 귀속되어야 한다). 2005년 200개에 불과하던 CIC는 2014년 9871개로 늘었다.

피터 홀브룩(Peter Holbrook) 영국사회적기업협회 대표는 “2013년에는 공공기관이 발주하는 외주 사업이나 물품 조달에서 사회적·환경적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는 ‘사회적가치법(Social Value Act)’이 발효됨으로써 크나큰 전기가 마련됐다”며 “영국 정부는 43% 정도가 공공조달을 통해 물품을 구매하는데, 사회적가치법은 사회적기업 육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했다.

스코틀랜드 사회적기업 지원단체 CEIS 제리 히긴스(Gerry Higgins) 대표는 “스코틀랜드에서도 지난해 ‘사회적기업공공조달법'(공공섹터의 제품 및 서비스를 구매할 때 최소 1년 전에 웹사이트에 공지하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돼 발효를 앞두고 있다”고 했다.

한편, 미래 세대를 위한 사회적기업 교육 또한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사회적기업 아카데미의 샌드라 이언(Sandra Ewen) 대표는 “2007년 10개 학교에서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700개 학교에서 진행 중”이라며 “사회적기업 창업 과정을 통해 학생들이 공동체와 사회적 이익을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즈니스를 접목하는 등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했다.

사람을 키우고, 자금 생태계를 조성하고, 법적 뒷받침을 해준 덕분일까. 이번 교류 프로그램 중 만났던 사회적기업 해크니 커뮤니티 운수(HCT·Hackney Community Transport) 그룹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2014년 말 현재 차량 500대, 종업원 930명, 연간 4372파운드(약 740억원)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이다. 33년 전인 1982년 미니버스 2대와 직원 2명만 있던 비영리단체에서, 1995년 사회적기업으로 변신한 후 매년 20~25%씩 매출이 수직상승하고 있다.

다이 파웰 대표는 “지자체 보조금이나 후원금에 의지하던 운영 방식에서 벗어나 영리 기업 형태로 자립하기 위해 갖은 진통을 겪었지만, 지금은 유럽의 다국적기업과 경쟁해서 입찰을 따낼 만큼, 치열한 경쟁에서 고품질 서비스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런던, 글래스고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