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일)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기쁜 기부, 해피플’ 캠페인] ⑤ 35년간 아동 후원해온 ‘지구 동쪽 끝 한국 할아버지’ 김형기 성성산업기계 대표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기쁜 기부, 해피플’ 캠페인(5)

미상_사진_기부_김형기_2015

“81년에 미국으로 출장을 가는데, 기내에 해외로 입양 가는 어린애 몇이 쉴 새 없이 울더라고.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하더이다. 남 일 같지 않았거든. 처음 결연한 아이는 미국으로, 다음 애는 네덜란드로 입양 보낸 때였으니까. 세 번째 연을 맺은 가영이만큼은 절대 보내지 말자 싶었지.”

지난달 18일, 경남 양산 자택에서 만난 김형기(66·사진) 성성산업기계대표는 30년도 더 된 일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1985년부터 김 대표는 가영(가명·31)씨를 후원하기 시작했고, 태어난 지 3일 만에 부산의 한 영아원에 맡겨진 그녀를 ‘막내딸’로 입양까지 했다.

“아버지를 만난 건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죠. 앞으로도 제가 받은 사랑 이상으로 나누고 갈 겁니다.” 가영씨 또한 어려운 아이들을 후원한다. 해외 입양을 막기 위해 시작했던 김 대표의 아동 후원은, 이제 해외 빈곤국의 아동들을 돕는 곳으로도 향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그는 ‘지구 동쪽 끝 한국의 할아버지’로 통한다.

◇35년 ‘반평생’ 바친 ‘아동 후원’ 외길

김 대표는 아동 후원에 반평생을 보냈다.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을 돕기 위해 1981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정기 후원을 시작한 이래, 35년 동안 단 한 번도 후원금을 거른 적이 없다. 별도로 일대일 후원을 맺어 생활비며 학원비를 챙기는 아이 수는 2000년 들어서만 22명. 명절이나 자신의 환갑 등 특별한 날엔 재단에 추가로 기부금을 보낸다. 올해는 막내딸인 가영씨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더나은미래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이 함께 하는 ‘기쁜 기부, 해피플 캠페인’에 참여키로 했다.

1983년 중소기업 이사 당시, 회사 사정이 어려워 집을 담보로 맡겼다가 부도가 나서 하루아침에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회사 빚까지 떠안게 됐을 때도 그는 후원을 끊지 못했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용광로를 옮기는 대형 전기자석을 만드는 현재 회사를 창업하면서 월 후원금을 50만원까지 늘렸다.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이제 아내와 단 둘뿐이지만, 그는 대상포진에 걸린 줄도 모를 정도로 여전히 일에 몰두한다. 그 이유는 “아이들을 계속 돕고 싶어서”다. ‘나눔’이 원동력이 된 덕분에 회사 제품은 국내 대부분의 제철소는 물론 러시아, 일본 및 동남아 대부분 국가에 수출, 연 매출 10억원에 달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난 속 ‘동아줄’이 되어준 ‘나눔’

아동 후원에 이토록 헌신적인 이유를 묻자,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여섯 살 때, 선생님이던 아버지는 배가 뒤집어지는 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스물일곱에 두 형제를 홀로 키우게 된 어머니는 매일 빚에 쫓겼다. 장남이었던 그는 학비는 물론 생계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고등학교를 두 번 다녔지. 고1 때 전교 3등을 하는 바람에, 전교 1등에게만 주는 장학금을 놓치고 결국 학비를 못 구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1년 뒤, 다시 학교에 들어갔지만 석 달 내내 신문 배달을 해도 돈이 모자라더라고.”

그에게 동아줄이 된 건 ‘성우 장학금’. 성우 장학금은 그의 고향 공주에서 미국으로 유학 간 선배 한 명이 한 푼씩 모아 지역 후배들을 후원했던 기금이었다. 덕분에 한양대 공과대학에 입학하고 기술군무원(현재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현재의 사업을 이뤘다. “그때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공부도 마치지 못했을 거고, 지금처럼 다시 누군가를 돕지 못했을 거야.”

◇’돌려주자’ 했는데… 언제나 배로 이익이 돼

‘받은 것을 돌려주자’는 생각에, 우연히 본 초록우산어린이재단(당시 한국복지재단) 팸플릿의 ‘아동 결연 후원’이라는 단어만 보고 바로 후원을 시작한 지 35년. 하지만 나눔은 언제나 ‘몇 배 남는 장사’였다.

“후원하고 있는 아이 중 슬기(가명·16)가 있는데, 부모는 이혼하고 아픈 할머니와 남동생 셋이서 살지. 나라에서 나오는 20여만원으로 살았는데, 연락도 안 되는 엄마가 재산이 있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끊겼어. 똘똘한 아이인데 공부할 형편이 안 돼. 1년 동안 학원 다니라고 300여만원을 마련해줬는데 그 이후로 ‘간호사’라는 ‘꿈’이 생겼어.”

이뿐 아니다. 김 대표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부산후원회 내에서 14년 동안 함께 봉사활동을 해온 ‘소망지회’ 사람들과 2005년부터 에티오피아를 시작으로 우간다, 스리랑카 등에 매년 500만원을 모아 보낸다. 에티오피아에는 식수 시설과 다리가 만들어지고, 우간다 학교는 건물이 3개나 지어졌다. “먼 지역 애들도 몰릴 정도로 ‘학교가 좋다’ 소문이 났다는데, 정말 우간다에 갔더니 상점 주인도 ‘소망지회’를 알아보더라고.”

2008년부터 일대일로 결연한 스리랑카의 찬두니 이야기도 했다. “찬두니는 부모 없이 친척집에 얹혀사는데, 다리 뻗고 눕기도 어려운 작은 방 한 칸에 온 식구가 살더라고. 작심하고 ‘얼마면 번듯한 가게 하나 차려줄 수 있느냐’고 했는데, 돌아오는 답이 ’60만원’이었어. 가지고 간 것을 다 털었을 뿐인데, 한 아이가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니 마음이 놓이더라고.”

그의 ‘나눔 셈법’은 자녀들은 물론, 회사 전 직원에게도 이어졌다. 직원 10여 명 모두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후원자이다. 연말에 아이들이 만든 성탄 카드가 오면 회사 분위기가 달라질 정도로 좋아한다고 한다. “남을 위해 기도하면, 나만 생각할 때보다 욕심도 내려놓게 되고 머리도 덜 아프지. ‘나눔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말을 몸으로 느껴. ‘나눔’만큼 더 좋은 ‘보약’은 없을 테니까.”

※기념일 혹은 특별한 날 기부하는 ‘기쁜 기부, 해피플’ 캠페인 참여 문의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대표 번호

1588-1940

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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