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놀이터를 빼앗긴 아이들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 그 후…

검사 기준 미달된 2064개 놀이터 임시 폐쇄
2008년 법 제정 후 7년 동안 보수 대책 없어

“저기선 못 놀아요. 친구들이랑 PC방 가거나 집에서 노는 거죠.”

지난 2일 인천의 A아파트 근처에서 만난 김우영(가명·10)군은 놀이터를 에둘러 주차 공간 쪽으로 걸었다. 놀이터 입구는 형광색 사슬로 묶여 있고, 녹슨 그네는 아예 안장이 위에 걸려 있었다. 놀이터 구석에는 쓰레기가 쌓여 악취가 났다. 김군이 사는 A아파트 놀이터 4곳은 지난 1월 한꺼번에 임시 폐쇄됐다. 벌써 여섯 달째 이대로 방치돼 있다.

A아파트 놀이터가 폐쇄된 이유는 지난 1월 시행된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 때문이다. 설치 검사를 받지 않거나 검사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전국 놀이터 2064곳이 일시에 폐쇄됐다. 불합격된 놀이터는 개보수한 후 재검사를 통해 합격 판정을 받을 때까지 기약 없이 문을 닫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2008년 법 제정 이후 7년의 유예기간이 있었지만 정부·지자체·아파트 관리사무소 모두 손 놓고 있다가 놀이터 폐쇄에 대한 후속 대책 없이 어린이들의 놀이 공간을 하루아침에 빼앗아버렸다”고 주장한다.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 시행 이후 설치 검사에 불합격한 놀이터를 완전히 철거한 광주 C아파트(위)와 6개월째 방치되고 있는 인천 A아파트의 놀이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제공, 권보람 기자
어린이놀이시설안전관리법 시행 이후 설치 검사에 불합격한 놀이터를 완전히 철거한 광주 C아파트(위)와 6개월째 방치되고 있는 인천 A아파트의 놀이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제공, 권보람 기자

◇임시 폐쇄 그 후… 좁아지고, 방치되고, 사라진 놀이터

국민안전처에 따르면 법 시행 이후 6개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898개의 놀이터가 이용 금지 상태다. 놀이터 개보수에 들어가는 비용은 공공 시설은 지자체가, 민간 시설은 놀이터 관리 주체가 부담한다. 문제는 예산이 없는 지자체나 영세·소형 공공주택의 민간 놀이터는 비용 부담 때문에 개보수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A아파트의 경우 폐쇄된 놀이터 4곳의 개보수를 위해 1억원의 공사 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아파트가 보유한 장기수선충당금(입주자가 공용 시설의 교체 및 보수를 위해 적립하는 금액)은 5000만원뿐이다. 단지 내 도로 포장, 주차장 보수 등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돈을 모두 놀이터에만 쓸 수도 없다.

A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은 “놀이터가 반년째 방치되다 보니 미관상 좋지 않고, 주민들도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면서 “급한대로 놀이터 2곳만 보수하고 나머지 2곳은 주차장으로 용도를 변경하는 방안도 고려 중”이라고 했다.

대구 북구에 있는 600여가구 규모의 B아파트 역시 시설 노후로 7개 중 3개 놀이터를 임시 폐쇄했다. 놀이터 한 곳당 공사 비용은 약 3000만~4000만원이다. 계획에 없던 비용을 장기수선충당금으로 쓰려면 입주자 절반 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주민들은 난색을 표한다.

“주민회의를 해보니 ‘주차 공간도 부족한데 이참에 그네며 미끄럼틀을 다 뽑아버리자’는 의견이 많았죠. 대표회의와 몇몇 주민이 ‘그래도 애들 노는 공간을 그렇게 쉽게 없애면 안 된다’며 겨우 설득했습니다.” B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관계자는 “반대했던 주민들을 생각해서라도 최저가 시공업체를 찾아야 하는데, 놀이터가 한꺼번에 폐쇄돼 설치 비용이 많이 올랐다”면서 “놀이터를 임시 폐쇄하기 전에 기존 놀이터만이라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마련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를 돌려주세요’ 개정안 발의

놀이터들이 다시 살아날 방법은 없을까. 이에 진선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설치 검사나 정기 시설 검사에 불합격한 놀이터에 대해 각 지방자치단체가 수리, 보수 비용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어린이놀이시설 안전관리법 일부 개정법률안’을 지난 4월 대표 발의했다.

해당 개정안 통과에 힘을 보태고자 아동복지 전문 NGO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지난달 16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놀이터를 지키자’ 캠페인을 통해 모은 시민 서명 1581장을 진 의원에게 전달했다. ‘놀이터를 지키자’는 아이들이 안전하고 즐겁게 놀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아동 놀 권리 옹호 캠페인이다.

이날 기자회견에 어린이 대표로 참석한 지효은(12)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연구원은 “낡은 놀이터를 고쳐 어린이가 안전한 환경에서 놀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말했다.

유미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복지사업본부장은 “지금까지 폐쇄 중인 대부분의 놀이터는 장기수선충당금이 충분하지 않은 영세 주택의 놀이터”라며 “아이들이 놀이터 이용에서조차 차별받는 것을 막고, 안전한 놀이 시설에서 놀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세계 놀이의 날인 지난 5월 28일부터 캠페인을 시작해 임시 폐쇄된 놀이터에 대한 지원 방안 마련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실시했다. 서명운동은 12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며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홈페이지(http://www.childfund.or.kr/main.do)를 통해서도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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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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